흔히 대화 소재나 면접 질문으로 많이 사용되는 질문인 “어떤 걸 좋아하세요?”는 정중한 상황에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막막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 “저는 늦게 일어나 뒹굴뒹굴하면서 쇼츠를 보면서 요즘 트렌드를 파악하는 것을 좋아합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에, 결국 그 자리에서 정제된 버전의 답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이번에는 약간의 암묵적인 대답에서 벗어나 진짜 내가 좋아하는 사소한 것들에 해 이야기하고 싶다.
우선 나는 눈이 쌓이고 공기가 차갑지만 바람 하나 불지 않는 날에 나가는 것을 좋아한다. 보통 이런 상황은 전날 밤 내내 눈이 온 다음 날 아침에 찾아온다. 본가가 부산이기 때문에, 부산에선 눈이 ‘온다’라는 것도 드물었지만, 눈이 ‘쌓인다’를 목격한 건 20년간 살면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다. 거짓말이 아니라 우리는 ‘눈으로 추측되는 존재’가 콩알만큼만 내려도 수업 중에 다 같이 밖에 나가서 구경할 정도로 눈은 귀한 존재였다. 서울살이 n년차로서 예전보다 눈에 익숙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마음 한쪽에는 여전히 설렘이 존재한다. 그리고 유독 더위를 많이 타는 나는 여름이 정말 싫다. 찝찝하고 덥고 땀도 나고 벌레도 많은데, 그럼에도 낭만 있게 여름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성격이 정말 좋을 것이라고 늘 생각해 왔다. 겨울은 한 해의 끝과 시작이 교차하는 시기라 그런지 늘 마음이 싱숭생숭해진다. 그래서 왠지 모르게 마음도 쓸쓸해지는데, 이열치열인 것처럼 쓸쓸한 날씨가 그 마음을 달래주는 것 같기도 하다. 쓸쓸함과 몽글함이 더해지는 계절에, 내 앞머리를 방해하는 바람도 없을뿐더러 뽀로로 마을처럼 하얗게 덮인 우리 동네를 마주하면 그날이 기말고사 당일 아침이라도 그 순간만큼은 괜히 기분이 좋다.
다음으로, 나는 체크리스트를 좋아한다. MBTI로는 전형적 계획형인 J이기도 한데, 고등학교 스터디 플래너를 썼을 시절부터의 나의 통계로 보면 사실 써놓기만 하고 안 지킬 확률이 더 높다. 생각해 보면 계획을 지키기 위해서 세운다기보다는 그냥 그 행위 자체를 좋아하는 것 같다. 특히 진로를 결정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하는 시기에는 걸핏하면 나태해지고 무력해진다. 그런 무거운 생각들은 나의 몸까지 무겁게 만들어 행동을 시작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런 상황 속에서 계획은 나에게 나침반 같은 존재이다. 어쩌면 무료한 일상을 보내는 나에게 주는 미션 같기도 하다. 이것도 계획형의 특징인지 모르겠는데,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지면 그 계획은 쳐다보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시간까지 정해두고 적진 않고 그냥 오늘 할 일을 네모 칸 옆에 적어두는 걸로 만족한다.
마지막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아아)가 좋다. 사실 언급한 것 중에 가장 좋아하는 것을 골라보라고 하면 망설임 없이 아아를 선택할 것 같다. 20대 초반 때만 해도 커피를 마시지 못했다. 쓰기만 하고 무슨 맛으로 마시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처음 접하게 된 건 그저 다이어트 때문이었다. 디저트와 음료 둘 다 포기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디저트를 먹되 “그래도 아메리카노랑 먹어서 괜찮아”라는 말을 하고 싶었나 보다. 처음에는 자의보단 강제로 아메리카노를 선택하였는데, 어느 순간 그 특유의 맛에 중독되어 이제는 마시지 않으면 하루를 시작할 수 없는 정도가 되었다.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좋아하지 않는 것을 보면 아직은 맛보다 그 시원함에 더 빠져있는 것 같긴 하다. 앞서 말한 눈 오는 날씨에 아아 한 잔을 들고 학교를 가면, 그게 나의 소확행이 된다. 이제는 카페에서 친구들이랑 이야기하거나 할 일을 할 때, 아침에 부기를 뺄 때, 혼자 먹기는 정말 단 디저트를 더 맛있게 즐길 때 등 내 하루에 없으면 안 되는 존재가 되었다. 체크리스트에도 ‘아메리카노 2잔 마시기’는 빠지지 않는다. 그리고 카페마다 아메리카노의 맛이 조금씩 달라서 계속 마시다 보면 나의 취향을 알 수 있다. 나는 아직 산미가 없는 고소한 원두를 좋아하는데, 나이를 더 먹으면 언젠가는 쓴 커피도 여유롭게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요즘은 거창한 목표에 집중할 수밖에 없게 된다. 사회로 나가기 위한 첫 발돋움의 시기인지라, 큰 포부를 가지려고 한다. 그러다가 좌절하고 무너진다는 생각이 들 때, 언제나 초심을 떠올리려고 한다. 내가 너무 무료하고 무감각한 삶을 살고 있다고 여길 때 이렇게 사소하지만 무해한 작은 생각들은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잊지 않게 해주고 다시 일으켜 세워준다. 이제 글을 다 썼으니, 체크리스트에 체크 표시를 해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