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제법 쌀쌀해진 날씨에 잊고 있던 누군가를 떠올리는 계절이 왔다. 그건 친밀한 사람일 수도 있지만 가끔은 전혀 뜬금없는 누군가가 되기도 한다. 다음 주에 만날 아직은 서먹한 동아리 부원, MT에서 밤새 수다를 떨었던 선배나 후배도 있다. 아주 가끔 잊고 지냈던 누군가가 생각날 때면, 당신은 어떤 마음인가. 연락 한 번 해볼까 싶다가도 괜히 망설여지고, 이내 들었던 핸드폰을 다시 내려놓는 것이 대부분의 모습일 것이다. 먼저 연락을 할 정도로 친하지는 않은, 그저 내 삶에 스쳐 간 지인의 관계. 이를 사회 연결망 이론에서는 ‘약한 유대 관계(Weak ties)’라고 한다. 사회에서 우리는 많은 사람들과 다양하게 연결되고 있지만, 특별히 ‘이화여대’라는 공간 안에서 우리는 ‘벗’이라는 이름을 가진 많은 사람들과 스친다.
대표적인 스치고 지나감의 장으로는 팀 프로젝트를 빼놓을 수 없다. 대학생이 돼 강의를 듣다 보면 수많은 팀 프로젝트, 즉 ‘팀플’을 수도 없이 하게 된다. 분명 이제는 얼굴조차 가물가물한 벗들이다. 어떤 과제를 했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데, 하물며 같이 진행했던 벗들이 누구였는지 기억할 수 있을까. 그러나 어떤 계기가 있다면, 과제가 끝나고 당연하게 헤어지는 한 명의 벗이 내 인생에 기분 좋은 한 장면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2학년 때 복수 전공을 위해 들었던 경영학 수업에는 매주 토론 과제가 있었다. 조를 짜서 토론을 하고 보고서를 작성하는 수업이었는데, 그냥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팀플이었을 뿐이었다. 종강 이후, 며칠 있다가 취미로 보러 간 야구장에서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매주 같이 토론을 했던 선배 분이셨다. 가은 벗, 하고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고는 몇 마디 나누지 못하고 금방 각자의 길을 갔다. 정말이지 사소한 일이었는데도 그날은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물론 응원했던 구단이 이겼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어떻게든 자그마한 인연이 ‘이어졌다’라는 사실은 나를 웃음이 나게 했다. 그분이 나를 기억했다는 것, 내가 그분을 기억했다는 것이 아직도 마음을 울린다.
한 심리학자가 약한 유대 관계가 주는 효과에 대해 연구했다. 참가자 여러 명을 대상으로 며칠 간의 사회적인 상호작용을 기록해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이후 참가자들에게 주관적인 행복감을 질문했더니, 다양한 사회적 상호작용 상황을 경험한 참가자일수록 높은 행복감과 상관관계를 보이는 경향성이 있었다. 사람들이 보고한 사회적인 상호작용은 정말이지 사소한 것들이었다. 카페 직원과의 작은 대화, 이웃과의 우연한 만남, 학원 강사와의 수업 등 일상생활을 하며 흔히 발생하는 소통이었던 것이다. 연구를 진행한 학자는 약한 유대 관계의 ‘가벼움’을 행복감 증진의 이유로 삼는다. 강한 유대 관계가 주는 진지함과 따뜻함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그저 스치는 사람들의 경우 상대방과 의미 있는 대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부담이 적고, 상호 간에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한 짧은 의사소통을 하기 때문에 이러한 장점들이 행복감을 만드는 데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학교 안에서 우리는 하루에도 수백 명이 넘는 벗들과 마주치며 살아간다. 각자 전공도, 목표도 전부 다르지만 이화의 ‘벗’이라는 이름으로 일상을 함께한다. 조별 과제를 할 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이번 일주일, 나의 일상을 되돌아보면 크고 작은 도움과 대화들이 존재했다. 학생증을 안 가져왔을 때 선뜻 먼저 자신의 카드를 찍어준 벗, 갑작스레 내린 비에 곤란해할 때 먼저 우산을 내밀어 준 벗,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잘 듣지 못해 냅다 말을 걸었던 옆자리 벗, 콘서트 굿즈를 선뜻 나누어준 벗까지, 내게 돌아온 수많은 호의가 기분 좋았던 한 주였다. 돌이켜 보면 나는 그들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는데도.
교내 커뮤니티에는 하루에 몇 번씩 ‘벗들 사랑해’, ‘벗들아 행복하자’ 같은, 특별히 누군가를 지칭하는 것이 아닌 글이 올라온다. 누군가의 하루를 위로하고 잔잔한 용기를 주고받는 글도 많다. 길에서 마주하는 약한 유대가 하루를 살아가는 데에 예상치 못한 즐거움과 희망을 주는 시대에서, 인간이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말을 다시 한번 되새긴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긍정적인 상호작용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사회에 발 붙이고 서 있다는 기분을 느끼곤 한다. 내가 마주한 이화의 벗들은 이렇게 누군가의 하루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이름도 얼굴도 잘 모르지만 바깥에서 마주치면 한없이 반가운 사람들이다. 내 일상에 어느 벗이 기분 좋게 스치고 가는 것처럼, 나도 일상에서 소소한 행복을 줄 수 있는 누군가의 벗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지친 일상에 위로가 되는 순간들이 있다. 어쩌면 야구장에서 나를 보고 인사를 건넸던 벗도 반가운 마음이지 않았을까.
‘벗’, 순우리말로 친구라는 뜻인 이 단어가 얼마나 친밀한지 모른다. 이화라는 공동체 안에 있는 한, 그 이유 하나만으로 사회에서도 큰 도움과 안정을 주는 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약한 유대는 절대 약하지 않다. 그러니까 벗들 덕분에 행복하다는 말은 거짓말이 될 수 없다. 지금 선선한 날씨에, 만일 이 글을 읽고 떠오르는 누군가가 있다면 슬쩍 핸드폰을 들어 문자 하나라도 남겨보는 것은 어떨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