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 세상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요즘이다. 불과 몇 년 사이, 우리는 일상 속에서 AI를 사용하는 것이 당연해졌고, 길거리에는 공유 킥보드가 즐비하게 늘어섰으며, 국제 정세도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다. 여름방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화여대 앞에는 3층짜리 올리브영이 들어섰고, 정문의 나무는 꽃봉오리를 떼어낸 채 푸른 빛을 찬란하게 뿜어내고 있었다. 모든 것이 변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변화는 계속되고 있다. 강산조차 10년이면 달라진다고 하지 않는가. 이렇게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과연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 나는 주저 없이 영원하고 무한한 사랑을 떠올린다. 엄마의 사랑 말이다.
하루는 친구들과 신나게 놀고 집에 들어가는 길이었다. 엄마의 전화가 걸려왔다. 엄마는 나에게 수십 가지의 질문을 쏟아냈고, 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이어 나갔다. 그러다 문득, 누구보다 무미건조한 내 말투를 마주하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애써 모르는 체했던, 내 안에 자라난 귀찮음이라는 감정을 깨닫고 나니 이내 곧 부끄러움으로 바뀌어 갔다. 엄마는 항상 나만 바라보는데 나는 엄마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엄마의 물음표 개수가 늘어날수록 그 안에 담긴 애정과 나의 무심함이 느껴져서 가슴이 아려온다. 내가 엄마에 대해 궁금해한적이 몇 번이나 될까 하고 말이다. 엄마가 먼저 보낸 수많은 연락들을 되새겨본다. 이보다 계산 없는 사랑이 있을까.
하루는 엄마와 뜻이 맞지 않아 언쟁을 한 날이었다. 엄마는 내 의견을 존중한다고 메시지를 보내온다. 결국 다 내 고집이었는데도 말이다. 스마트폰 화면에 떠 있는 각진 활자 속에서도 엄마의 조심스러움과 다정함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엄마가 보내온 메시지의 ‘~’은 파도가 되어 내 마음을 일렁이게 했고, ‘^^’은 내 입가에도 미소가 번지게끔 한다. 이보다 진실된 사랑이 있을까.
25년 대한민국의 상반기를 강타했던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2025)가 떠오른다. ‘폭싹속았수다’에서는 부모가 자식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금명이가 태어난 그 순간부터, 그녀는 영원히 애순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1순위였을 것이다. 드라마 속 애순은 늘 같은 자리에서 딸을 기다린다. 하루에도 몇 번씩 금명이의 연락을 기다리고, 오늘은 무슨 일을 했을까 궁금해하며, 세상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해가도 언제나 제주도의 그 집 앞에서 딸을 향한 변치 않는 사랑을 품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나는 내 엄마를 보았다. 애순의 기다림과 애정은 드라마 속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나의 현실이기도 하다. 엄마는 늘 내가 돌아올 자리를 비워 두고, 늦은 밤이든 새벽이든 나의 귀가를 확인하며 안심하신다. 세상이 변하고, 내가 커 가며 엄마의 손길을 점점 덜 필요로 하게 되는 것처럼 보여도, 엄마의 마음만큼은 단 한 번도 줄어든 적이 없다. 그러나 드라마를 본 우리는 알 수 있다. 애순도 한때는 꿈 많던 청춘이었다는 것을. 엄마라는 이름을 얻기 전, 그녀 역시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이루고 싶은 것도 많던 누군가의 딸이었음을 깨닫는다. 엄마의 현재는 나에게 온전히 쏟아지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 속에는 채 피워내지 못한 꿈과 미처 다 하지 못한 이야기들도 숨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드라마를 본 우리는 알 수 있다. 애순도 한때는 꿈 많던 청춘이었다는 것을. 엄마라는 이름을 얻기 전, 그녀 역시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이루고 싶은 것도 많던 누군가의 딸이었음을 깨닫는다. 엄마의 현재는 나에게 온전히 쏟아지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 속에는 채 피워내지 못한 꿈과 미처 다 하지 못한 이야기들도 숨어 있을 것이다.
이 생각에 나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엄마의 무한한 사랑과 희생이 나에게는 삶의 버팀목이 되었지만, 동시에 그 사랑 뒤에 가려진 엄마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는 얼마나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나는 언제부턴가 엄마의 사랑을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꿈꾸며 사는 동안, 엄마는 그 시간들을 나를 위해 기꺼이 내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다짐하게 된다. 엄마의 사랑을 더 이상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겠다고. 그 무조건적이고 계산 없는 마음에 감사하며 살아가겠다고. 드라마 속 애순이 금명이의 이름을 불러주던 것처럼, 나 역시 엄마의 이름을 불러 드릴 수 있는 딸이 되고 싶다고. 언젠가 내가 누군가에게 사랑을 줄 때, 그 뿌리에는 엄마로부터 배운 이 무한한 사랑이 자리 잡고 있을 것임을 믿는다.
애니메이션 ‘강철의 연금술사’(2011)에는 “등가교환이다! 내 인생 절반을 줄 테니까 네 인생도 절반을 줘”라는 인상적인 대사가 나온다. 등가교환이란 무언가를 얻기 위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법칙이다. 이는 애니메이션 속 설정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며 자연스레 깨닫게 되는 삶의 진리이기도 하다.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서는 놀고 싶은 마음과 시간을 포기해야 하고, 건강을 위해서는 먹고 싶은 음식을 포기해야 한다. 인간관계 또한 마찬가지다. 서로에게 관심과 마음을 쏟아야 비로소 관계가 유지되고, 양보를 주고받으며 애정의 관계가 쌓여 간다.
그러나 이러한 등가교환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관계가 있다. 바로 엄마와 자식의 관계다. 대가가 없어도 무한한 관심과 애정을 쏟아주는 엄마의 사랑 앞에서, 나는 언제나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존재였다. 그래서 이제는 나 또한 그 사랑에 보답하는 삶을 살고 싶다. 영원히 변치 않을 엄마의 사랑에 존경을 표하며 이만 글을 줄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