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리부트 10년 이화인의 눈으로 바라보다 ④

편집자주 | 2015년 한국 사회에서 부상한 페미니즘은 여러 사건을 겪으며 강력한 사회 의제로 떠올랐다. 언론과 사회는 당시 페미니즘이 대중화된 흐름을 ‘페미니즘 리부트’로 명명했다. 이후 페미니즘은 한국 사회를 살아온 여성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본지는 페미니즘 리부트 10주년을 맞아 우리대학 재학생을 대상으로 페미니즘 인식을 묻는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설문에는 534명이 참여했고, 관련 기사는 2주에 걸쳐 연재된다. 1716호는 10년간 페미니스트들이 겪은 한국 사회와 현재 시급한 여성의제, 탈코르셋과 4B라는 여성운동 세 가지 측면을 분석했다. 1717호는 페미니즘 진영 내 퀴어 인식과 조용히 페미니즘을 실천하는 ‘스텔스 페미니즘’을 다룬다.

☞ '리부트 ' 기사에서 계속

이화인들은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인식하고 있지만, 우리대학 바깥에서는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는 ‘스텔스 페미니즘’ 양상을 보이고 있다. 페미니즘 리부트 초창기, 여성들이 페미니스트 정체성을 드러내고 집단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던 것도 잠시, 윤석열 정부 출범과 함께 백래시(Backlash·반동)의 역풍이 거세졌다. 어느새 위협이 돼버린 ‘페미’라는 호칭을 피하기 위해, 이화인들은 상황에 따라 페미니스트임을 숨기는 경향을 보였다. 간접적 페미니즘 실천 태도인 스텔스 페미니즘을 자연스러운 생존 방식으로 보면서도,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광화문 앞에서 진행된 제 40회 한국여성대회의 전경. 참가자들이 정의와 존엄을 상징하는 보라색 피켓과 깃발을 들고 있다. 출처=이대학보DB
광화문 앞에서 진행된 제 40회 한국여성대회의 전경. 참가자들이 정의와 존엄을 상징하는 보라색 피켓과 깃발을 들고 있다. 출처=이대학보DB

 

조용한 페미니즘, '스텔스 페미니즘' 

대부분의 이화인이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정의했지만, 상당수가 이를 숨긴 경험이 있었다. 설문 결과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는 응답자의 약 80%가 ‘일상생활에서 스스로 페미니스트임을 숨기거나 언급을 꺼리게 됐던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강경하게 페미니스트임을 부정하기보다는 상대방이 페미니즘에 우호적인지를 가늠하고 관련 주제를 꺼내는 경향이 확인됐다. 유예은(전전·21)씨는 여고 동창들과는 페미니즘 관련 대화를 편하게 나누지만, 남성 지인들과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오랜만에 만난 사이에 그런 이야기를 꺼냄으로써 갈등을 빚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다영(동양화·20)씨는 페미니스트 정체성을 공격하려는 의도가 담긴 질문에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답하지만, “조심스럽게 물어본다거나 여성 의제에 관해 물어볼 때”에는 페미니스트 정체성을 인정한다고 말했다.

페미니스트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사회에 어울리기 위함이었다. ‘가까운 이들과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73.3%), ‘사회에서 받을 불이익이 부담스러워서’(43.3%), ‘사회적 낙인이 두려워서’(38.3%)가장 큰 원인으로 꼽혔다. 이는 정체성 공개에 따른 사회적 불화를 꺼리는 것을 시사한다. 일각에서는 페미니스트임을 밝혔을 때 설명해야 할 것이 많아 귀찮고 피로하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ㄱ씨는 페미니즘을 “‘극단적 여성우월주의’로 여기는 가족들과 자신 간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긴 대화를 하는 것이 피로하다고 느꼈다”며 “가족들에게는 페미니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ㄱ씨는 신원이 특정될 것을 우려해 익명을 요청했다.

사회적 반발을 피하기 위해 자신이 페미니스트임을 드러내지 않은 채 일상 속에서 성평등을 실천하는 전략적 움직임을 ‘스텔스 페미니즘’(Stealth Feminism)이라고 한다. ‘스텔스’는 레이더에 포착되지 않도록 한 군사용 은폐 기술에서 비롯된 말로, 드러나지 않게 움직이는 방식을 뜻한다.

 

페미니즘 숨 막히게 하는 백래시 정서

미아역 1번출구 도로에서 이어진 ‘미아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규탄시위’. 약 800명의 참여자들이 ‘여자 골라 죽인놈 제대로 수사하라’, ‘여성혐오범죄 엄벌하라’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있다. 출처=이대학보DB
미아역 1번출구 도로에서 이어진 ‘미아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규탄시위’. 약 800명의 참여자들이 ‘여자 골라 죽인놈 제대로 수사하라’, ‘여성혐오범죄 엄벌하라’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있다. 출처=이대학보DB

여성들을 스텔스 페미니즘으로 이끈 가장 큰 사회적 배경은 단연 백래시다. 여성들은 온오프라인에서 발생한 ‘페미 사냥’으로 직장에서 해고되거나 폭행을 당하는 등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민소원(심리·22)씨는 직장에서 부당한 처우를 받는 여성을 보고 백래시를 실감했다. 그는 ‘페미’로 의심된다는 이유로 해직당한 ‘림버스 컴퍼니 부당해고’ 사건에 대해 “한 사람의 경력을 단절시킬 만한 일인가”라는 의문이 강하게 들었다고 말했다. 하경연(화신공·22)씨는 학창 시절 페미니스트임을 밝힌 다른 반 친구를 남학생들이 집중적으로 괴롭힌 백래시를 경험했다. 이에 그는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드러낼 수 없는 상황”에 답답함을 느꼈다.

여성들이 백래시 속 주장들을 사실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더 큰 문제라는 지적도 나온다. 전제영(행정·23)씨는 ‘여자들도 대학 많이 가고 공부도 잘하는데 오히려 남자가 차별받는 거 아닌가, 남자는 군대도 가야 하지 않냐’는 말을 여성 지인에게 들었다고 전했다. 전씨는 “성차별의 양상이 복잡해지며 성 불평등에 대한 구체적 정의가 모호해지자, 사람들이 구조적 성차별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13일 오후7시경 대강당 계단에서 열린 긴급 학내집회는 윤석열 구속 취소를 규탄하는 목소리로 채워졌다. 이화인들은 "해방의 역사에 쿠데타는 들어올 수 없다"며 "해방"과"투쟁"을 외쳤다. 출처=이대학보DB
13일 오후7시경 대강당 계단에서 열린 긴급 학내집회는 윤석열 구속 취소를 규탄하는 목소리로 채워졌다. 이화인들은 "해방의 역사에 쿠데타는 들어올 수 없다"며 "해방"과"투쟁"을 외쳤다. 출처=이대학보DB

전문가들은 윤석열 정부가 출범하면서 페미니즘에 대한 사회적 반감을 공론화했고, 정부 차원에서 이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흐름이 강화됐다고 분석했다. 윤석열씨는 대선 후보 시절부터 ‘더 이상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고 주장했고, 여성가족부 장관을 16개월간 공석으로 뒀다. 김주현 연구교수(젠더법학연구소)는 최근 몇 년 사이 늘어난 페미니즘에 대한 노골적인 멸시와 낙인에는 윤 정부 출범 이후의 변화가 가장 크게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페미니즘을 사회 갈등과 분열의 원인으로 몰아가며 여성가족부 폐지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페미니스트들의 결집과 활동이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 수수(활동명)씨는 특히 이준석 의원이 국민의힘 당대표를 지내던 시기에 윤석열씨와 힘을 합쳐 “정치 영역에서 페미니스트를 ‘비합리적이고 자기만 아는 여성’으로 프레이밍한 전략이 효과를 거뒀다”고 설명했다.

 

우리대학 안과 밖에서의 차이

우리대학 학생들을 모두 페미니스트로 규정하는 외부의 시선에 대해서는 엇갈린 의견이 나타났다. 설문 결과 10명 중 6명이 그러한 시선이 불쾌하지 않다고 답했고, 4명은 불쾌하다고 답했다. 불쾌하지 않다는 이들은 ‘스스로가 페미니스트라는 사실에 당당하다’는 입장이었다. 민씨는 여대를 다닌다는 이유로 ‘너도 페미냐’라고 물은 외부인의 질문에 진정한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됐다. 이후 답을 찾고자 여성학 수업을 수강하고 일상 속에서 페미니즘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민씨는 이전에는 여성 의제 언급을 꺼리는 ‘스텔스 페미니스트’였지만, 여성학을 공부하며 “페미니스트 정체성이 숨길 필요 없는 사실임을 깨닫고 적극적으로 이야기하게 됐다”고 말했다.

신남성연대의 배인규 대표를 비롯한 윤석열 대통령 탄핵 반대측이 “탄핵 반대”를 외치며 총무처 직원과 대치하고 있는 모습. 출처=이대학보DB
신남성연대의 배인규 대표를 비롯한 윤석열 대통령 탄핵 반대측이 “탄핵 반대”를 외치며 총무처 직원과 대치하고 있는 모습. 출처=이대학보DB

불쾌하다고 답한 응답자의 경우 페미니스트라는 인식 자체에 대한 거부감보다 페미니즘을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고 폄하하려는 행태에 대한 반감이 컸다. 전씨는 외부에서 “여대를 다닌다는 이유로 듣는 ‘페미’가 많냐는 질문이 불쾌하다”고 답했다. ‘사상 검증’의 의도를 내포한 채 던지는 질문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김씨는 “만들어진 가상의 과격한 페미니스트 이미지를 우리대학 학생 모두에게 적용하는 것 같다”며, 외부의 시선이 문제적임을 지적했다.

외부와 달리 우리대학 안에서는 페미니스트임을 드러내기 어렵지 않다는 입장이 다수였다. 설문을 통해 우리대학 외부는 페미니스트 정체성을 드러내기 어려운 환경인지 물었을 때, 91.6%가 ‘그렇다’고 답했다. 반면 우리대학 내부를 두고 같은 질문을 하자 96.6%가 ‘어렵지 않다’고 답하며 정반대의 양상을 보였다. 박주원(영문·24)씨는 “여성들끼리 여성 의제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환경이어서 안전하다고 느낀다”며, 우리대학 안팎의 환경 차이를 강조했다. 여자대학이라는 공간의 특성상 바깥과는 달리 사회 문제를 여성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당당히 발언하고 토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생존 전략이지만, 목소리 낼 필요 있어 

여성해방 메시지가 담긴 현수막과 피켓을 들고 신촌을 지나 광화문으로 행진하고 있는 대학생들 이화선 기자 lskdjfg41902@ewhain.net
여성해방 메시지가 담긴 현수막과 피켓을 들고 신촌을 지나 광화문으로 행진하고 있는 대학생들 이화선 기자 lskdjfg41902@ewhain.net

전문가들은 스텔스 페미니즘을 백래시 가운데 등장한 생존 전략으로 분석했다. 권김현영 교수(한국여성연구원)는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자신이 느끼는 억압을 이해한 여성들도 이에 대항하는 것은 어려워하며 “살아남기 위해서 입을 다물게 된 결과”가 스텔스 페미니즘이라고 설명했다. 억압받는 위치에 있는 이들은 약자이기에 조용히 저항하는 전략을 선택하고, 여성들 역시 그러한 양상을 보이게 된 것이다. 김보명 교수(여성학과)는 스텔스 페미니즘은 일상 속에서는 조용해 보이더라도 “늘 페미니즘적 사고를 지니고 있다가 여성혐오 범죄 등 사회적 계기가 발생하면 모이게 하는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봤다.

일차적으로는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인식하는 여성이 많다는 사실 자체가 긍정적이라는 평이 나온다. 수수씨는 페미니즘 리부트의 효과로 “적어도 모든 사람이 페미니스트가 뭔지는 알고 있다”고 변화를 강조했다. 그는 여성 의제와 관련된 집회들이 이어지며 지속적으로 관심을 표현하는 이들이 많아진 점은 고무적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장기적으로는 페미니스트로서의 의견 표명을 지향해야 한다고 짚었다. 수수씨는 “백래시 가운데서 페미니즘을 이야기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필요한 지점에서는 목소리를 꼭 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혼자보다는 여럿이 만나 의견을 나눌 때 “생각이 다양해지고 서로가 존재함을 알리기 쉽다”며 집단을 통해 목소리를 내는 시도가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권김 교수 역시 억압을 이해한다는 것 자체로 의미가 있지만 결국 “(페미니스트들이) 진짜로 생각하는 걸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분석했다. 자신이 겪는 억압에 대해 말하지 못하는 것은 내면의 상처가 되기 때문이다.

 

· 이대학보 취재2부서(최영서, 박희원, 이지원, 한재유) 공동취재

· 조사 기관=이대학보

· 조사 대상=우리대학에 재학하는 이화인

· 조사 기간=8월28일~10월16일

☞'리부트⑤' 기사로 계속

 

관련기사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