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엉망이 되어갈 때 여러분은 무엇을 하는가?” 미래에 대한 불안, 기후위기에 대한 공포, 멀리서 들려오는 전쟁 이야기, 폭력이 난무하는 세계, 낙관적이지 않은 경제 지표들, 취약한 노동 시장, 쌓이는 과제와 미친 듯이 다가오는 데드라인에 쫓기는 일상∙∙∙, 우리 모두의 삶이 불안정한 것 같다.“삶이 엉망이 되어갈 때 여러분은 무엇을 하는가?” ‘세계 끝의 버섯’이라는 책은 이 질문으로 시작한다. 이 책의 저자인 애나 로웹하웁트 칭은 이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이렇게 답한다. “나는 산책을 한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버섯을 발견
최근 뉴스 기사를 읽거나 학생들과 상담을 하다 보면 인공지능이 모든 분야를 대체할 것 같다는 불안감을 자주 느낄 수 있다. 실제로 기술 기업들은 인공지능이 의학, 금융, IT 등 다양한 영역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말한다. 특히 IT 영역에서는 주니어 개발자들이 모두 인공지능으로 대체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연 인간이 할 일은 무엇인가라는 걱정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 역시 인공지능과 관련된 연구를 수행하고 있고 때론 불안감을 느끼지만, 가까이에서 관찰할수록 아직까지는 인공지능의 한계가 분명하다는 사실을 확인
19세기 말은 한국이 본격적으로 서구와 조우하던 시기였다. 개항 이후 한국을 방문한 서구인들은 풍물과 풍속, 제도와 사회 구조만 기록한 것이 아니라, 한국인의 일상에 스며있던 노래와 시에도 눈길을 줬다. 흥미로운 점은 그들이 단순히 민속학적 호기심으로만 접근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한국인의 정서와 문화적 깊이를 진지하게 파악하려 했다는 사실이다. 이들의 기록은 한국 시가(詩歌)의 의미와 가치를 당대의 세계적 지평 속에서 어떻게 조망했는지를 보여 준다.우선 캐나다 출신 장로교 선교사 제임스 게일(James S. Gale)은 문헌에 정
‘치매’라는 단어는 이제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하다. 반면 ‘실어증(Aphasia)’은 비교적 낯설고, 들어본 적은 있어도 치매와 어떻게 다른지, 어떤 증상을 말하는 것인지 선뜻 설명하기 어려운 용어일 수 있다.‘실어증(失語症)’이라는 한자어를 들여다보면, 다소 무겁고 무시무시한 뜻을 담고 있다. 말 그대로 언어를 잃어버리는 증상이라는 의미다. 영어 용어인 ‘Aphasia’ 역시 비슷하다. 접두사 ‘a-’는 ‘없다’를 의미하고, ‘phasis’는 ‘말’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 결국 실어증은 ‘말을 할 수 없는 상태’를 내포한
성경을 보면 에덴동산에 살던 최초의 남녀, 아담과 하와에게 허락되지 않은 두 나무 실과가 있었다. 그들이 그중 선악과를 먹었다. 하나님은 인간의 손이 닿지 못하도록 나머지 한 나무를 지켜냈는데, 그 나무는 생명나무였다. 참 역설적으로 우리나라 사이비 종교사를 보면, 생명나무를 손에 쥐겠다는 구호로 가득 차 있다. 영생교는 이름 그대로 영생을, 신천지는 ‘신인합일 육체영생’을 교리로 내세워 사람들을 현혹한다. 하지만 영생불사가 사이비 교주의 혹세무민하는 구호가 아니라 이제 첨단 과학의 구호가 되고 있다. 인간은 저속노화를 넘어 신체
“진리가 없단 말인가? 모든 지적 탐구는 허망한 일인가?” 학생들로부터 매 학기 받는 질문이다. 이에 이 지면을 빌어 절대 그렇지 않은 이유를 적어보려 한다. 이를 위해 학생들이 왜 위와 같은 의문을 품게 되는지부터 봐야 할 것이다. 그 원인은 필자의 주요 연구 영역인 지식사회학, 특히 과학지식사회학에 있다. 과학지식사회학은 진리. 더 나아가 그 대상인 자연의 실재, 즉, 실제로 존재하는 것과 그 정체가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짧은 글에서 실재가 어떻게 사회적으로 구성되는지까지 설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사
어느 날 아내가 카톡으로 그림 한 장을 보냈다. 만화책의 삽화치고 좀 익숙하다 했더니 지난 여름 오키나와 여행 갔을 때 찍은 나와 아내, 그리고 중학생 아들의 모습이다. 유행에 민감한 사람답게 아내는 요즘 유행한다는 지브리풍 프사(프로필 사진)을 만들어 보내곤 하루 종일 미소가 가지실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턱수염이 아무렇게나 자라 마치 초췌한 '바람 계곡' 농사꾼 같은 나와 달리, 아내와 아들 녀석은 지브리 애니메이션의 공주님, 왕자님처럼 예쁘고 귀여운 모습이다. 그날의 ‘진짜’ 사진은 여행에 지친 가족들의 모습을 가감없이 담고
오늘은 제103회 어린이날이다. 그런데 소파 방정환 선생님께서 ‘어린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시고 ‘어린이의 날’을 제정하시기 훨씬 전부터 이 땅에 어린아이, 특히 여자아이들을 품어 교육하는 기관이 있었으니 그곳이 “이화”였다. 필자는 이화유치원, 이대부초, 그리고 이화여대를 다녔으니 이 역사를 모를 리 없지만, 작년부터 인문관 승강기를 이용할 때마다 사학과 교수님 연구실 문에 붙은 라는 전시 포스터가 유난히 내 마음을 건드리면서 이상한 부채감으로 쌓여있었다. 해를 넘기고 지난 4월 초순의 어느 화창한 금요일 낮,
20세기에 태어나 20세기에 20대를 보낸 나는 늘 궁금했다. 21세기는 어떤 모습일까?20세기가 끝나고 21세기가 시작되었을 때, 그리고 몇 년이 흘러갔을 때, 나는 실망했다.“애걔, 겨우 이거야? 숫자만 바뀌었을 뿐인거야?”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면서 물리학은 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1900년 플랑크의 양자가설은 현대물리학 혁명의 서막을 열었고, 1905년 아인슈타인은 원자의 존재를 이론적으로 증명하고 광양자설로 양자역학의 발전을 본격화했다. 또한 특수상대성이론으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류의 통념을 근본부터 뒤흔들었다
“MBTI가 어떻게 되세요?”마이어스-브릭스 유형 지표로서 성격 유형을 16가지로 구별하는 MBTI. 신뢰도는 차치하더라도 현대인의 상식이 된 지 오래이니, 자신이 어느 유형인지 정도는 알아 둬야 사회생활이 원활하다. MBTI 열풍에 대한 해석은 그동안 충분히 제시되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 유형화의 재미, 소속감을 원하는 청년 세대의 열망, 불확실성의 시대에 선호하게 되는 명료함, 일종의 롤플레잉, 대인관계에서 위험 부담을 피하려는 안전 욕구 등등…. 동시에 이런 유형화를 경계하며 ‘MBTI 과몰입’을 성토하는 목소리도 나날
“자, 이제 눈을 감고 누워주세요. 그리고 자신의 호흡에 집중해 주세요. 나의 몸이 어디에 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오로지 몸의 감각으로 내 몸이 닿아있는 곳을 구체적으로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잠이 들것 같다면 억지로 몸을 깨우지 말고 그대로 두시기 바랍니다.” 의 실기수업 첫날, 체육관에 모인 학생들에게 몸을 눕히고 눈을 감아달라는 요청을 합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당혹스런 표정을 보이며 눕기를 주저합니다. ‘누워서 하는 수업이라더니 정말이구나!’ 학생들의 마음속 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이내
“이 행성에 깃들인 사람들과 생명체들의 일인칭을 끈질기게 상상하는, 끝끝내 우리를 연결하는 언어를 다루는 문학에는 필연적으로 체온이 깃들어 있습니다.” 한강은 노벨문학상 수상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타자의 일인칭을 상상하는 것은 공감 행위를 초과한다.타자를 독립적 존재로 두되 ‘나’처럼 생각하는 일은 곧 내 안에 숨어있던 타자를 대면하게 한다. 이는 내 경험만이 유일한 진실이 아니며 나는 오로지 나로만 구성되지 않음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문학은 일인칭 주체의 권위를 파괴하고, 나와 타자가 서로에게 결부되어 있음을 상기한다.1
“우리대학은 지속 가능한 사회를 위한 대학의 책임을 적극적이고 구체적으로 이행하기 위해 환경·안전(E), 사회공헌(S), 윤리경영(G)을 실천하고자 합니다.” 이화여자대학교 웹사이트의 ‘ESG 경영’ 페이지에 적힌 목표다.최근 몇 년 동안 본교는 이처럼 ESG라는 용어를 내걸고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고 이와 연관된 교육 및 연구 활동을 수행했다. 몇 가지 예만 살펴보자. “국제 기후리스크 관리모형 ‘프론티어-1.5D’ 개발 추진을 위한 산·관·학 협력 업무협약을 체결”, “‘2021 이화 탄소중립 포럼’을 10월 20일(수) 오후 2
영화 "아마데우스(Amadeus)"는 천재 작곡가 모차르트(Mozart)와 동시대 작곡가 살리에리(Salieri)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인간의 욕망, 시기, 불완전함 등을 다루면서 예술과 재능, 나아가 인간성의 본질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 걸작입니다. 아쉽게도, 거의 40년 전 중학교 3학년생이던 어느 날 부모님과 함께 극장에서 처음 이 영화를 보았던 저에게는 가끔 들어본 유명한 클래식 음악 몇 곡과 주인공 모차르트의 기이한(!) 웃음소리를 제외하면 영화의 내용이 사실 크게 흥미롭게 다가오지는 않았습니다. (작품의 진가를 알기에는 당시
며칠 전 외국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온 친구를 만났다. 친구가 외국에 나가 있는 동안 가끔 메신저로 대화는 했었지만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햇수로 7년 만인 것 같았다. 겉모습도 달라졌지만(나이가 들었다) 무엇보다 생활 습관이 많이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 챙겨주는 사람 없이 혼자 생활을 이끌어가고, 또 일이나 공부와 씨름하다 보면 마음이 불안해지거나 조급해지는 등 심리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가 많다. 친구는 그런 어려움을 매일의 일과(routine)를 정하고 지켜가면서 일상과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다고 했다.일과를
2024년 8월에 정년퇴직을 할 때 받은 선물 중에 내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이 있다. “정동의 봄” 이라는 책이다. 이화여대 설립자인 룰루 프라이 여사가 한국에 선교사로 파견되신 1893년부터 1921년 돌아가시던 해까지의 편지와 일기를 엮어 만든 것이다. 룰루 프라이 여사를 이화여대 설립자라 지칭한 것은 1910년 룰루 프라이 여사에 의해 이화학당에 대학과가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스크랜튼 여사가 이화학당을 설립하였지만, 여성에 대한 대학교육기관으로서의 발전은 룰루 프라이 여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이 책은 룰루 프라이 여사의
“어떤 연구를 하세요?”라는 질문에 ‘색채과학’이라고 답하는 것은 여전히 저에게 낯선 감이 있습니다. 물리학을 전공하던 시절, 색채를 정량화하는 발표 세미나에 우연히 참석한 경험이 있습니다. 이 세미나는 제 학문적 방향을 바꿀 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겼으나, 안타깝게도 세미나의 제목이나 강연자의 이름은 현재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경험은 취업을 고민하던 저에게 학문적 호기심을 자극하며, 연구를 지속할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물리학이 자연현상을 규명하는 학문인 만큼, 색채, 즉 빛에 대한 연구는 비교적 쉽게 접근
학생들 대부분은 알고 있지만 애써 외면하거나 미루어 두는 현실은 4학년 1학기가 되면 패닉이 찾아온다는 사실이다. 모두가 어느 정도 나르시시즘에 빠진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결국 경쟁에 지친 시지프스에 불과하다. 학교 전체를 짓누르고 있는 성공의 환상이 마침내 4학년 1학기가 되어 취업과 현실이라는 구렁텅이로 떨어지게 되면 비로소 참아왔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음을 느낀다.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이런 패닉은 소셜미디어 주목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누구도 승리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조금의 승리라도 전시하고자 애쓰는 곳이 소셜미디
우리 사회가 당면한 큰 사회문제 중 하나가 바로 인구 고령화라는 사실은 모두가 공감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2023년 기준 한국의 65세 이상 노인인구는 950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18.4%를 차지하고 있고, 이 비율은 2025년 20.6%, 2050년에는 40.1%까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통계청의 자료는 한 번쯤은 대부분 들어보았으리라 생각합니다.한국에서 올해 초 개봉한 ‘플랜75’(2022)라는 일본 영화는 인구 고령화 문제를 매우 충격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일본 정부가 75세 이상의 노인들에게 삶을 마무리할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月はどっちに出 ている)”택시 회사를 중심으로 재일 한국인과 이방인들의 밑바닥 인생을 블랙 코미디로 다룬 재일교포 최양일 감독의 일본 영화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月はどっちに出ている)’에는 손님을 태우고 나갔다가 길을 잃어 돌아오지 못하는 택시 기사가 나온다. 그는 낯선 곳에서 길을 잃으면 공중전화에서 회사로 전화를 걸어 동료들에게 돌아갈 길을 묻는다. 전화를 받은 동료는 달이 어디에 떠 있는지 묻고는 이렇게 말해준다. “달을 향해서 달리세요.”머리 위 어딘가에 달이 있다. 길을 잃었어도, 방향을 놓쳤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