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문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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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젊음을 영원히 소유하고자 했던 사람의 이야기다. 도리언 그레이는 몹시 아름답고 부유한 청년이다. 그는 화가 배질의 뮤즈가 되어 화실에 드나들던 중 배질의 친구 헨리 경을 만나고, 그로부터 젊음이 얼마나 빛나며 짧게 타오르는 것인지 듣는다. 젊음에 집착하게 된 그레이는 ‘그림이 변하고 나는 지금 모습대로 영원할 수 있길’ 바란다. 그리고 그레이가 연인을 버리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순간부터 그 소원은 이루어진다. 

그가 죄악을 저지를수록 그의 초상화는 추하게 늙어가지만 ‘진짜’ 그레이는 가장 아름다운 청춘, 배질이 그의 초상화를 그리던 순간의 모습에서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배질이 그레이를 둘러싼 소문을 듣고 그에게 진상을 묻자, 그는 배질에게 변해버린 초상화를 보여주고 경악하는 그를 살해한다. 마침내 스스로에게 환멸을 느낀 그레이는 초상화를 없애면 자신의 악행도 초기화될 것이라 생각해 초상화를 칼로 찌른다. 그러나 칼에 찔린 것은 그 자신이었다. 그의 하인들이 흉측한 초상화의 모습 그대로 죽어있는 그를 발견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도리언 그레이의 두 친구, 배질과 헨리 경은 순응과 쾌락주의라는 대립된 개념을 상징한다. 도리언 그레이는 본래 소박한 성품을 지닌 순수한 청년이었다. 때로 무료함을 느꼈지만 삶이 그에게 쥐여주는 것을 바꾸려 하지 않았으며, 어떤 평가도 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었다. 배질이 그레이를 뮤즈로 삼은 것은 비단 외모 때문만이 아니라 배질이 추구하는 가치가 그레이의 이러한 기질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레이가 배질의 화실에서 헨리 경을 처음 만난 오전은 어떤 의미에서든 삶의 터닝포인트가 되었으며 그 순간부터 그레이의 시간은 째깍째깍 흐르다가-악마의 귀에 소원이 들어간 후 다시 멈춘다. 쾌락을 즐긴다는 것은 자기를 의식한다는 뜻이다. ‘삶’이 아닌 ‘나의 삶’을 살고, ‘슬픔’이 아닌 ‘감정적 손해’를 겪는 것이다. 자아를 강하게 의식하는 사람은 사르트르가 <말>에서 묘사했듯 ‘죽음이 왈칵 밀어닥쳐서, 혈기 왕성한 그들의 산 육신을 이 세상으로부터 앗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짧은 시간 동안 최대한의 만족을 느껴서 되도록 손해 보지 않아야 한다. 현재 나의 삶이 다른 전제에서의 나의 삶과 끊임없이 비교되며, 평행세계의 나는 곧 타자이고 타자의 삶도 어떠한 경우의 ‘나의 삶’이다. ‘나의 삶’은 ‘타인의 삶’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쾌락의 전제조건은 나와 타자의 구별인 것처럼 보이지만 앞선 논리에 의해 결국 나와 타자의 합일이다. 

그레이는 정말 초상화 속 악마의 계시라도 받아서 배질을 찔렀는가? 악마 같은 건 실재하지 않는다. 그레이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해도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배질을 보고 세계의 작위성을 느껴 초상화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배질이 그를 ’숭배‘하기를 마침내 그만두자, 그 민낯을 대면하지 못하고 그를 살해했다. 그레이는 자기와 세계 사이의 모순을 없애려 발버둥 쳤고 그 발버둥이 살인을 통해 이루어졌을 뿐이다. 발악의 매개 따위가 영혼의 순도에 정말로 영향을 미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배질의 경악이 그레이에게 비보였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그레이는 타인에 의해, 특히 자기에게 가장 호의적이던 배질에 의해 언제나 대상화되었다. 그는 ’아름다운 외모의 청년‘, ’예술적 뮤즈‘였지만 단 한 번도 다면적 특성을 가진 인간으로 취급되지 못했다. 오직 헨리 경만이 그레이의 욕망을 인정했다. 세속적 욕망을 추구한 도리 그레이의 삶은 명백한 ‘타락’이지만 동시에 하나의 인간으로서 인정받기 위한 자기 파괴적인 여정이기도 했다. 

“오, 주여! 대체 내가 뭘 숭배했었단 말인가! 이건 악마의 눈이잖아.”

“우리들 모두는 다 자기 안에 천국과 지옥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배질.”

절망의 거친 몸짓을 내보이며 도리언이 말했다. 

그레이는 자기 또한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갖고 있는 인간일 뿐이라고 호소했으며 그 지옥을 초상화에서 목격한 배질은 마침내 이 사실을 인정한다. 배질의 신에서 인간으로 강등된 그레이는 오히려 내심 기뻤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신이 인간임을 확인받았기 때문에 배질을 죽일 수 있었다. 

내가 작품을 읽는 내내 느낀 의문점은, 오스카 와일드가 ‘도덕’의 존재, 신과 악마의 대립을 진심으로 믿어서 이 작품을 썼는가 하는 것이다. 당시 한창 유행하던 과학기술을 위시한 세속적 욕망과 선에 대한 믿음, 그리고 그 사이에서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도리언 그레이 즉 인간 존재.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일은 쉬우며 만약 이게 전부라면 감상을 쓸 여지조차 없을 것이다. 내가 지적하고자 하는 부분이 작가의 편협한 시각에서 나오는 것인지, 우화를 표방한 고도의 장치인지 구분하는 일은 늘 어렵다. 나는 언제나 후자를 믿으려고 노력한다. 설령 작가의 자신의 세계가 지극히 단순하다 해도, 해석은 결국 독자의 것이며 가장 평면적으로 보이는 인물의 행동 이면에도 가늠할 수 없이 복잡한 메커니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소설은 세계의 조작된 재현이므로 작가는 등장인물의 욕망을 완벽히 컨트롤할 수 없다. 인간은 자기가 쓴 이야기에서조차 신을 흉내 낼 수 없다. 나는 이 ‘독자의 몫‘과 인간의 한계에 형언할 수 없는 안도를 느낀다. 남의 의도는 나를 지배할 수 없으며 나의 의도 또한 남을 지배할 수 없다. 적어도 읽고 쓰는 행위에 있어 우리는 모두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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