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영화를 마주할 때가 있다. “그 영화 어때?” 라는 말에, “재밌어”라고도, “흥미로워”라고도, “잘 만들었더라”라고도 대답할 수 없는, 사무치는 마음과 조심스러워지는 생각에 아무런 이야기조차 내어놓을 수 없는 영화. ‘다음 소희’(2023)도 그런 영화 중 하나다.
이 영화를 보게 된 건 아주 단순한 계기였다. 지난 여름, 거실에서 에어컨을 켜고 누워 있다가 문득 영화가 보고 싶어서 티빙에 들어갔다. 그리고 ‘너와 나’(2023)를 통해 알게 된 김시은 배우의 이름을 치자 이 영화가 나왔다. 그래서 틀었을 뿐이었다. 핸드폰을 하고 있던 엄마도 어느 순간부터 TV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보는 내내 우리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영화가 끝난 후 엄마의 감상을 그저 깊고 긴 한숨. 영화가 끝난 후에도 우리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서야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적는 이유는 이 영화를 한 명이라도 더 보고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소희는 학교와 연계된 콜센터에서 일하게 된 고3 현장실습생이다. 소희의 업무는 해지 방어를 위해 계속해서 반복되는 질문과 지연에 지칠 대로 지친 고객들의 전화를 받는 일. 아무도 막아주지 않는 욕설과 성희롱에도 불구하고, “그만두면 안 돼”, “너 하나 때문에 우리 실적이-” 같은 말들에 소희는 꿋꿋이 자리를 지킨다. 인간성을 상실한 자본주의의 압력이 꼭대기에서부터 내려와 가장 아래에 있던 현장실습생 소희의 생을 앗아갔다. 중간에 누구라도 멈춰줬으면, 살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소희의 죽음 이후 직장, 학교, 교육부, 그 어느 곳도 서로 책임을 전가하기만 할 뿐 자신들의 잘못이 없다 말한다. 모두가 피해자임을 주장하는 기묘한 상황, 소희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소희와 같은 아이들과 가족뿐이다.
영화의 중반부에서 소희가 죽은 이후로는 해당 사건을 파헤치는 형사 유진이 주로 등장하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우리는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소희의 고통을 함께 겪기도 하고, 끝끝내 알 수 없는 소희의 마음이 있음을 알게 되기도 한다. 혼자서도 열렬히 춤을 추던 그 연습실 뒤편에 조용히 앉아 춤을 추는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던 소희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 가게에서 가만히 앉아 맥주를 마시던 소희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팀장의 자살에 관해 입막음하는 각서에 끝내 사인을 할 때 소희는 무엇을 내려놓았을까?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은 생각을 하게 했던 부분은 이준호 팀장과 소희의 관계였다. 소희를 대하는 팀장의 모습은 항상 긍정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직장에서 소희가 그나마 의존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였다. 아주 조금이라도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던 이준호 팀장은 그랬기에, 결국 자살한다. 그리고 이준호 팀장의 죽음을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회사, 이러한 사건을 금방 떨쳐내고 하던 일을 하는 것이 프로페셔널한 것이라는 곧바로 대체된 새 팀장의 발언, 그리고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일하기 시작하는 동료들. 소희는 이 고장이 난 사회를 고스란히 감각한다. 그 안에서 소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찾은 이준호 팀장의 장례식장에서 다른 회사 사람은 단 한 명도 오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하며 눈물 흘리는 유족을 봤을 때, 소희는 자신의 가족을 생각했을까? 끝없이 떠오르는 의문들이 보는 이를 속상하고, 억울하고, 미안하게 한다.
이 영화는 고통스럽다. 영화를 모두 본 이후에도 한참이나 갑갑하고 치밀어 오르는 감각이 여전했다. 그날은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궁금하고 생각을 떨쳐낼 수 없다. 생각하기를 그만두는 것이 소희를 외면하게 되는 것만 같아 계속해서 ‘어떻게 하면 소희가 살 수 있었을까?’를 고민하게 된다. 명확한 답은 없다. 모두가 잘못했고, 모두가 가혹했으니 말이다. ‘소희가 살아 있었더라면, 소희가 죽지 않을 수 있는 세상이었더라면 소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었을까?’ 여전히 춤을 추고, 여전히 명랑하고, 여전히 친구를 위해 나서는 그런 소희를 상상한다. 그리고 이내 알게 된다. 우리에게는 지켜야 할 소희가 있다.
이 영화는 2017년 전주 콜센터 현장실습생 자살 사건으로부터 제작됐다. 현장실습생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돼 값싼 노동력으로서 산업 현장에 내몰리는 학생들, 소희가 이 ‘다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으려면, ‘다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언제 어디서 또다시 ‘다음 소희’가 나타날지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