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지우는 환각제로 만들어진 나비 날개. 사춘기 소년들 사이 성적 흥분의 소재로 쓰이는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폭도들에게 구타당하고 불타 사라지는 얼룩말. 엘비스 프레슬리 분장을 한 채 ‘파티용 물건’으로 불리다 사망하는 어린 소년. 혼란스럽고 엽기적인 이미지와 극장이라는 점잖은 장소에서 쉽게 연상할 수 없는 극단적인 폭력이 뒤섞이며 ‘머큐리 퍼’의 불협화음을 만들어낸다.
2005년 무대에 처음 오른 ‘머큐리 퍼’는 영국 극작가 필립 리들리의 다섯 번째 희곡이다. 극은 디스토피아로 전락한 근미래 런던의 이스트엔드를 배경으로, 의뢰인의 지시에 따라 소년을 살해하는 파티의 기괴한 광경을 그려낸다. 극의 인물들은 폭격과 마약으로부터 안전을 꾀하고자 타인의 오락을 위한 비인륜적인 행위들로 돈을 벌어 연명하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와 서로를 파괴해 나간다. 리들리는 데뷔작 ‘피치포크 디즈니’부터 꾸준히 선정성과 폭력성에 대한 비판을 받아온 작가였으며, ‘머큐리 퍼’는 공연일마다 관객들의 항의 퇴장이 이어지고 비평가들에게 ‘불필요하다’라는 평을 받을 만큼 다양한 층에서 유독 강한 저항을 겪어 왔다. 그러나 ‘머큐리 퍼’에게는 시간이 흘러도 유의미한 극으로 남을 수 있는 일종의 힘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힘은 극이 현대 사회 내에서 가지는 입지에서 비롯된다.
‘머큐리 퍼’에서 눈여겨볼 만한 점이 있다면 극단적인 폭력이 늘 동등하게 강한 사랑의 표현과 병치된다는 것이다. 극의 첫 몇 분을 장식하는 형제 ‘엘리엇’과 ‘다렌’의 대화에는 인종차별적이고 장애 혐오적인 욕설이 난무하지만 동시에 런던이 멸망하기 전 가족과 함께한 좋았던 나날과 조건 없는 사랑에 대한 그리움이 드러난다. 형제의 교류는 엘리엇과 다렌이 어린 시절 아버지와 즐겼던 경찰과 도둑 놀이를 하며 서로에 대한 사랑을 토로하는 장면으로, 즉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가까움의 순간으로 끝난다.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갱의 리더 ‘스핑크스’는 파티를 진행하러 모인 이들뿐만 아니라 시각장애와 정신적 불안에 시달리는 자신의 연인 ‘공작부인’에게도 무차별적인 폭언을 쏟아붓는 동시에 공작부인이 머릿속으로 만들어낸 환상이 깨지지 않도록 주변의 환경을 조정하는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극의 정점이자 가장 폭력적인 행위인 ‘파티 의뢰인’의 살해 역시도 사랑으로부터 비롯된다. ‘파티용 물건’이 살해되기 전 사망해, 갱단과 임시 동맹을 맺은 ‘나즈’가 ‘파티용 물건’을 대신해 살해당할 위기에 놓인 순간, 다렌은 친구를 살리기 위해 방아쇠를 당긴다. 극의 마지막 순간 등장인물들에게 피할 수 없는 파괴의 광경이 닥칠 때마저도, 사랑하는 사람을 폭력으로써 폭력에서 구제하는 것이 정당한지에 대한 고민 위로 막은 내린다. 이러한 근본적인 연관성은 ‘머큐리 퍼’가 일부 평론가들의 의견과는 달리 그저 또 다른 선정주의 극에 그치지 않음을 보여준다. 리들리는 최선을 다해 관객에게 무언가를 느낄 것을 강요하고 있다.
1990년대, 미국의 사회학자 스체판 메슈트로비치는 현대 사회를 일컬어 ‘탈감정주의 사회’라는 말을 남겼다. 근대와 현대의 참상을 목격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점점 무언가를 느끼거나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을 잃어간다는 주장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날카로운 비판으로 작용한다. 2020년대에 이르러 기술은 냉담을 향해 뜀박질하는 사회의 등을 떠미는 힘으로써 작용한다. 숏폼 미디어는 내용에 대한 비판적인 사고나 감정적 과정을 거칠 시간도 없이 사용자가 다음 도파민 러쉬를 찾아 떠돌게 하고, 챗GPT와 같은 AI 챗봇은 사용자의 푸념에 대한 간편하고 무조건적인 공감을 건넴으로써 자기성찰과 이해로 가는 길을 차단한다. 공감 능력의 상실은 개인의 성장을 저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정치와 사회를 막다른 길로 이끈다. 내 일이 아니라는 간편한 합리화 아래 타자의 고통을 눈감고, 나아가 그들을 짓밟고 나아가는 정책과 구조를 지지하는 이들을 우리 주위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우경화가 세계적인 현상이 된 2025년의 맥락에서 ‘머큐리 퍼’가 관객에게 선사하는 충격적인 고통과 감정의 경험은 냉담을 깨부수는 장치로써 의미가 있다.
극 중에는 모호한 정치적 상황이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인물들은 격한 고통의 순간 사이 핵무기와 암살, 폭동과 군대에 관한 이야기를 흘리고 지나간다. 불분명한 정치적 맥락은 ‘머큐리 퍼’의 보편성을 극대화한다. 현재를 살아가는 관객은 나즈의 어머니와 동생을 죽인 무리를 보고 2020년 백악관에 침투한 폭도들을 떠올릴 수 있고, 엘리엇과 다렌에게 쏟아지는 폭탄으로부터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는 폭격을 연상할 수 있다. 만약 극장을 나서거나 대본을 덮는 이의 감상이 단순히 끔찍하다는 반응에 그치지 않고 고통과 폭력이 어떻게 인간을 망치는지에 관한 사고까지 확장된다면, 혹은 2025년의 가혹한 현실을 살아가는 이웃에 대한 연민으로 이어진다면, ‘머큐리 퍼’는 충분히 가치 있는 창작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