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알기 힘든 것들이 있다. 그렇기에 무언가를 호명(呼名)하는 일은 어설프다. 어설프지만 끈질기게 달라붙어 매달린다. 무언가를 일련의 단어(들)로 호명하는 순간, 호명의 대상은 물 밑으로 가라앉는다. 호명으로 인해 까마득한 밑바닥에 내려진 닻이 그를 가라앉히는 것이다. 이는 유동하는 자아를 멈추게 하고 일말의 흔들림 없이 침몰하게 한다. 그렇다면 이서수가 그리는 'AKA 신숙자' 속 신숙자의 초상은 어떠한가. 신숙자는 어떻게 호명되며, 어떻게 움직이는가. 신숙자는 누구인가.
소설 속 '나(미리)'는 자신을 과민하게 만드는 세 가지 명사, "박미리, 프리랜서 작가, 부양자"로 자신을 정의한다. 그중에서도 미리를 자꾸 돈에 얽매이게 하는 것은 '부양자'라는 명사다. 생산 활동에서 멀어진 노인으로 당당히 인정받길 원하는 엄마 숙자 씨의 진심을 알면서도 애써 모른 척하는 미리는 지금 부양자다. 돌봄에의 경제적 부담을 느끼며 짜증스럽게 술을 들이마시는 부양자의 초상이다.
부양자인 미리는 숙자 씨의 초상을 알지 못한다. 정확히는, 알려고 하지 않는다. 원래 옛날 엄마들은 모성애가 넘쳐서 자식을 무한히 품어주지 않았냐는 둥, 옆집 할머니의 연애 사실에 대해서는 물으면서도 숙자 씨의 성생활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물을 용기는 나지 않을 것이라는 둥. 미리는 제도로서의 모성이라는 표지의 갈고리로 숙자 씨를 자꾸만 가라앉히려 한다.
제도로서의 모성이란 여성혐오에 뿌리를 둔 모성으로 가부장제에 종속하는 혐오의 일종이다. 이화여자대학교 한국여성연구원 강혜경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모성이란 여성의 심리학적 및 도덕적 특성의 문제가 아니라 성인으로서 여성들의 정상적 성 역할로 당연시되어 인식됨으로써 여성 억압의 핵심 요소로 지목되어 왔다고 말한다. 미리 또한 이러한 모성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여 숙자 씨에게 모성애를 바라며, 제도화된 모성 바깥에 있는 숙자 씨의 모습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미리가 그리는 숙자 씨의 초상에는 부침(浮沈)이 없다.
그러나 소설은 미리가 망각하고 있는 지점을 짚어낸다. 장대비가 퍼붓던 날 길가에서 매몰차게 울어대는 어린 고양이를 발견한 미리는 이를 데려와 '퐁이'라 이름 붙이고 돌보기 시작한다. 그러고는 옆에서 투박한 이름을 붙여줘야 오래 산다며 일침을 놓는 숙자 씨에게 묻는다. 개명하고 싶은 생각은 없는지, 자기가 늙었다고 생각하는지... 이러한 숙자 씨에 대한 물음들은 이내 머릿속에 자주 맴도는 두 가지 질문으로 이어진다.
신숙자는 무엇일까. 신숙자는 궁극적으로 무엇이 되고 싶나.
그러나 신숙자에 대한 물음도 잠시, 미리의 '내 새끼' 퐁이는 흑사병에 걸려 죽을 위기에 처하고, 숙자 씨는 퐁이 때문에 식음을 전폐하는 미리를 위해 "이 땅에 태어난 것들은 다 죄를 지었다"며 퐁이의 죄를 대신 갚는 굿을 한다. 이 땅에 태어난 것들은 다 무슨 죄를 지었길래.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취약성이란 삶 자체에 선행하는 조건이며, 인간은 모두 관계적이고도 상호 의존적인 존재들이라 말한다. 즉 인간은 애초부터 취약성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이 가장 무력할 때 다른 누군가의 돌봄을 통해 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돌봄은 취약한 '나'를 살게 하는 인류 보편적 가치이기에 외면당하지 않아야 마땅하지만, 전통적 윤리학이 대두되었던 근대서부터 인간 성장의 표준은 이성, 독립 등과 같은 위계적 가치였으며 돌봄이 가진 감정, 연결 등과 같은 관계적 가치는 열등한 것으로 여겨졌다. 더불어 돌봄은 제도화된 모성이라는 틀에 갇혀 이 땅의 숙자 씨들에게 당연하게 요구되며 이들의 유동하는 정체성을 묶어버렸다. 그러니 이 땅에 태어난 것들은 모두 원죄적(原罪的)이다. 가장 취약할 때 돌봄 수혜 덕분에 세상에 발붙일 수 있게 되었음에도 돌봄의 손길을 내민 이들에게 따뜻한 시선을 내어주기는커녕 이를 망각하고, 제도로서의 모성을 투사하여 바라본다.
그러나 'AKA 신숙자'는 다채로운 '되기'를 통해 가장 중요한 돌봄의 가치를 실현했던 행위자의 풍부한 서사를 그려내며 숙자 씨의 삶에 숨을 불어넣는다. 소설 속 신숙자는 무당, 퐁이의 할머니, 미리의 엄마 등 다양한 '되기'를 통해 활력 있는 주체로 그려진다. 이토록 폭 넓은 '되기'는 자꾸만 가라앉던 숙자 씨의 삶을 물 위로 길어 올려 움직이게 한다. 미리는 엄마를 제도적 모성에 묶어두고 싶어 하면서도 고양이 돌봄의 경험을 통해 신숙자는 무엇인지 궁금해하며, 숙자 씨는 일하는 시니어가 되고 싶지 않아 하면서도 딸과 함께 살아가고자 양말 포장 일을 택한다.
이들의 마음을 어떻게 외면할 수 있을까. 함께하는 돌봄의 마음을 어떻게 외면할 수 있을까. 은폐되어 있던 취약성 이면에 언제나 돌봄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기억하는 일과 흔들리는 초상에 기꺼이 휩쓸리며 마음을 덧대는 일은 산 자의 몫이다. 이 땅에 태어난 것들은 모두 그 몫을 다하지 못해 죄를 지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