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이 되어주는 활동으로
다시 고향을 돌아보게 하다
편집자주|소년도 청년도 아닌 회색지대, 청소년. 성인기로 진입하는 길목에 선 그들은 손쉽게 배제되고는 한다. 특히 지방 청소년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은 지 오래다. 서울에 관심이 집중된, 이른바 ‘서울공화국’ 한국에서 청소년들은 서울로 향해야 한다는 기대에 가로막혀 목적지를 잃고 표류하기 쉽다. 모든 청소년이 자신만의 미래를 향해 갈 수 있도록, 이대학보는 약 두 달간 인구감소지역인 강진, 양양, 영덕에 방문해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지방소년표류기는 1713호를 시작으로 3주간 연재된다.
청소년은 꿈과 학업을 위해 서울로 향한다. 연고도 없는 낯선 도시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불안을 안고도 이들은 도시로 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구의 유출과 유입은 모두 개인의 의지만으로는 막기 어렵다. 자꾸만 도시로 이끄는 거센 물결 속에서 청소년들이 지역에서 스스로의 미래를 설계할 수 있도록 돕는 이들이 있다. 2014년 일본 사바에시는 여고생들의 마을 만들기 사업, ‘JK(여고생)과’를 최초로 출범해 청소년의 긍정적인 지역 인식을 이끌었다. 강진군의 청년협동조합 ‘편들’ 또한 청년 예술인 대상 사업을 운영하고 지역 청년과 청소년을 주제로 다양한 협업을 진행하고 있다.
여고생 지역 살리기 프로젝트로 고향에 애정을, 사바에시 ‘JK과’
사바에시 JK과는 2014년 일본 후쿠이현 사바에시에서 발족한 시민 협동 프로젝트로, 여고생들이 연간 20~22회의 지역 살리기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직접 지역 사회에 참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들은 안경이 유명한 사바에시의 특징을 살려 디자인한 안경을 국제 전시회에 출품하고, 지역 전통 양념인 ‘야마우니(매운 유자 양념)’를 활용한 상품을 개발해 로손 편의점과의 협업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25명의 JK과 청소년들은 학교가 끝나면 사바에시청 회의실로 향하고, 이곳에서 지역을 살릴 방안을 함께 논의하곤 한다. 청소년이 자체적으로 지역 살리기 활동을 꾸리고 시행한 지 10년, JK과 졸업생 61명 중 79%인 48명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사바에시에서 시민단체를 설립하거나 마을 만들기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JK과를 담당하는 타케우치씨는 “JK과 활동을 통해 본인 지역에 매력을 느낀 것이 아닐까”라고 답했다. 지역을 살리기 위해서는 지역의 특징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파악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점차 지역에 애정을 느끼게 됐다는 해석이다.
이들의 활동이 처음부터 응원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여고생과’라는 이름에 대한 반발과 곱지 않은 눈길 또한 적지 않았다. 하지만 타케우치씨는 “여고생이 아니었다면 이 프로젝트는 지금까지 이어지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여성, 그리고 학생은 정책에서 가장 거리가 먼 존재로, 유권자 중심 정책에서 소외되기 십상이다. 당시 여성 고등학생들의 졸업 후 지역 이탈도 남성에 비해 높았다. 사바에시는 이 점에 주목해, 가장 소외받고 먼 존재인 여성 청소년에게 집중한 것이다. 여고생을 중심으로 한 JK과 활동이 성공을 거두자 보다 다양한 세대가 참여하는 다세대 교류형 행사, 남학생을 포함한 고등학교 졸업생 중심 지역 살리기 모임 ‘SAN’ 등 지역 살리기 활동이 다양한 세대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JK과 활동의 핵심은 ‘청소년이 직접 기획하고 실천한다’는 데 있다. 어른들은 기획자가 아닌 조력자로, 청소년들의 활동을 전적으로 지원한다. 타케우치씨는 “(재정 지원 외에) 특별한 지원은 딱히 하지 않고 있다”며 “하교 후 시청 회의실에서 과자를 함께 먹으며 자유롭게 ‘뭔가 하고 싶은 게 없을까나?’하고 얘기한다”고 답했다. 아이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내면 담당 직원들은 마을 만들기와 연관될 수 있는 방향으로 이끄는 방식이다. 청소년이 본인의 거주 지역에 흥미를 붙이는 것이 주 목적이기에, 게임이나 오락이 포함되기도 한다.
JK과의 쓰레기 줍기 프로젝트인 ‘피카피카 플랜’은 쓰레기를 주운 양에 따라 경품을 지급하는 프로젝트다.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마을을 청소하고 꾸릴 수 있을까’ 고민한 끝에 나온 결과물이다.
타케우치씨는 “(청소년들이) 지역을 떠나기 전에, 본인 지역의 매력을 알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어떤 추억이 고향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지, 그들의 마음을 울리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더 많은 경험을 위해 고향을 떠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의미 있는 추억을 쌓아왔다면 오히려 지역 밖에 나가서도 고향의 좋은 점을 깨닫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너의 편이 되어줄게’, 청년의 편이 되는 ‘편들’
강진군 청년협동조합 ‘편들’은 지역 청년들과 외부 청년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공동체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너의 편이 되어줄게’라는 의미를 가진 편들은 지역의 청년들이 느낄 수 있는 고립감과 외로움을 해소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운영하고 있다. 편들에서 문화 기획자로 활동하고 있는 양혜선 이사는 청년으로서 강진에서 살아가던 기억에 대해 “지역 안에서 교류할 청년도 없고,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해결해 나가야 하는 과정이 평탄하지 않고 외로웠다”고 회상했다. 그는 편들을 통해 지역에도 같이 의지하고 나아갈 수 있는 청년들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편들은 2025년 기준 20명의 조합원으로 구성돼 있으며, ‘전남형 청년마을 만들기 사업’ 등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전남형 청년마을 만들기 사업은 청년들이 지역 특화 산업과 연계해 지역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공간과 프로그램을 구상하는 시도다. 마을 만들기 사업 중 일부인 ‘돌멩이 마을’은 타지역 청년들이 강진에서 단기간 거주하며 지역과의 교류를 이끄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들은 함께 살아가며 지역과 돌멩이 마을의 특색을 담은 상품을 개발하기도 하고, 다른 청년들과 감정적인 교류를 맺어간다.
양 이사는 전남문화재단의 사회적 가치 지향 사업을 통해 ‘꿈향 만들기(강진에 뜨는 일곱빛깔 무지개)’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꿈향 만들기'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강진에서 어떤 형태로 살아갈 수 있을지 생각할 기회를 주는 프로그램이다.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자신의 기억을 담은 향을 만드는 경험을 통해 지역에서 살아갈 수 있는 방향을 알려주는 것이다.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청소년들은 “어떤 형태로 살아가야 할지 오래 고민한 덕에 강진에서 살아가고자 마음을 먹을 수 있었다”는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양 이사는 “청년들이 이 지역에서 살아가야 하는 이유와 역할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면 지역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된다”고 말한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아이들이 더 큰 지역으로 갈 수는 있겠지만, 다시 돌아와야 한다면 그곳이 강진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편들은 아이들이 지역에서 추억을 쌓게 도와줌으로써, 서울이 아닌 곳에서 어떤 형태로 살아갈 수 있을지 생각해 보도록 돕는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편들의 활동은 서울이 아닌 곳에서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상상력을 심어주며, 지역에 뿌리내리고 싶어 하는 청년들에게 이곳에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 준다. 청년 공동체가 지역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정착을 희망하는 청년과 청소년에게는 큰 의미가 된다. 함께 의지할 수 있는 공간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나와 비슷한 청년들의 존재가 힘이 되기 때문이다.
고향에서의 기억, 청소년 발걸음을 돌리다
지역 프로젝트는 지역에서 태어난 청소년들을 ‘고향에 묶어두는 것’을 지향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청소년 시기 지역에서 느낄 수 있는 행복한 기억을 만들도록 돕고, 지역 청년 혹은 타지 청년들이 지역에서 효능감을 느낄 수 있는 경험을 쌓게 함으로써 지역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전략이다. JK과 타케우치씨는 “JK과에게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실패는 청소년들이 자기 마을이 재밌지 않다고 느끼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고향이나 거주하는 지역에 대한 애정은 지역에서 쌓았던 추억으로 형성되며, 이 기억은 이들이 고향을 떠나더라도 다시 살았던 지역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 지방소년표류기팀(김지수, 박소영, 변하영, 이선영, 정보현, 정재윤) 공동 취재
※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