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소년도 청년도 아닌 회색지대, 청소년. 성인기로 진입하는 길목에 선 그들은 손쉽게 배제되고는 한다. 특히 지방 청소년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은 지 오래다. 서울에 관심이 집중된, 이른바 ‘서울공화국’ 한국에서 청소년들은 서울로 향해야 한다는 기대에 가로막혀 목적지를 잃고 표류하기 쉽다. 모든 청소년이 자신만의 미래를 향해 갈 수 있도록, 이대학보는 약 두 달간 인구감소지역인 강진, 양양, 영덕에 방문해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지방소년표류기는 1713호를 시작으로 3주간 연재된다.
# 학교가 끝나고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양양에 사는 아이돌 지망생 정수빈(17)양은 오늘도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목적지는 서울의 한 댄스 학원. 수업이 시작하는 6시에 맞춰 도착하려면 하교 후 친구들과 늑장을 부릴 여유도 없다. 수업이 끝난 밤 10시, 수빈 양은 양양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교통편에 겨우 탑승했다. 집에 돌아오니 시계는 자정을 훌쩍 넘은 새벽 2시.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그는 오늘 유난히 고단함을 느꼈다. 오디션 공고 속 한 문장 때문이다. ‘지원자 서울, 경기 지역 거주자 한정’.
입시 혹은 진로를 위한 전문 댄스 학원은 서울에 몰려 있다. “경주에서 수업 들으러 서울로 올라오는 친구도 있어요.” 수빈 양이 사는 양양에도 춤을 전문으로 배울 수 있는 학원은 없다. 학원 수업이 없는 날, 수빈 양은 청소년 수련관에서 거울을 보며 연습한다. 꿈을 위해 이토록 노력하고 있지만 서울 시민만 지원 가능하다는 오디션 공고를 볼 때면 맥이 탁 풀리곤 한다. “오디션에는 딱 그 포인트가 있어요. 무조건 ‘서울, 경기에 사는 지원자만’ 이런 식으로 공고가 올라와요. 그러면 저처럼 강원도에 사는 애들은 신청도 못 하는 거죠.” 만 16세, 그는 거주지가 기회를 가로막은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저는 메가스터디 1타가 전부인 줄 알았거든요”
본지 설문조사에 따르면, ‘우리 지역 내 교육만으로도 원하는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질문에 4점 척도 중 1·2점을 택한 청소년은 세 지역 모두 절반을 넘어섰다. 특히 영덕의 경우, 응답자의 71.6%가 부정적 응답을 내놓았다. 교육 기회에 대한 불만도 컸다. ‘우리 지역 교육이 예체능, 진로 탐색에는 다양하지 않다’는 질문에 영덕은 응답자의 82.4%가, 강진과 양양은 각각 63.8%와 64.5%가 동의(3·4점 응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청소년들이 지역 내 교육만으로는 대학 입시는 물론, 폭넓은 교육 기회를 쉽게 보장받지 못한다고 느낀다는 점을 보여준다.
모든 청소년에게 대학 입시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지방은 이를 희망하는 학생에게 기회 자체가 부족한 땅이다. 영덕여고 박정민 교사는 “생활기록부에 들어갈 비교과 활동이나 포트폴리오를 쌓을 수 있는 환경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학교 밖을 나가 청소년이 스스로 체험할 수 있는 환경도, 직업 관련 체험을 하고 포트폴리오를 쌓는 것도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서울권역 대학 입시에 대한 질 좋은 정보와 입시 전문 학원은 교육 자원이 풍부한 수도권에 쏠려 있다. 양양고 3학년 김주찬(19)군은 “양양에는 탐구 과목 학원이 아예 없다”며 “국·영·수 같은 주요 과목도 이곳 교육만으로는 수능을 준비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양양중 2학년 A(15)양은 방학이 되면 서울을 오가며 과학 수업을 듣는다. 항공우주연구원이라는 꿈을 이루려면 심층적인 과학 공부가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그는 “이곳에서는 과학자로 일하기 어렵기에, 어른이 되면 반드시 (양양을) 떠날 것”이라고 말했다.
지방 청소년들은 입시 정보의 부족 또한 경험하고 있었다. 영덕 영해고 3학년 전채연(17)양은 포항 스피치 학원에 다니며 ‘시골에 사니 뒤처지는 것 같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됐다. 학원 선생님이 “포항 학생들은 2년 정도 미리 배워놓는다”며 예습을 권유했기 때문이다. 영덕 노틀담 입시학원 박희숙 원장은 지방은 생활기록부를 채우기 위한 컨설팅을 받을 수 있는 환경도, 구조도 아니라고 말한다. 탐구 과목은 인터넷 강의 외에 접할 수 있는 경로가 없고, 입시 박람회나 컨설팅은 수도권에서 열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거주하는 지역에 교육지원청이 위치하지 않아 진학 정보를 얻기 어렵기도 하다. 양양고 졸업생 김민경(강원대 간호학과·25)씨는 “교육지원청이 학생 인구가 더 많은 속초에 위치하다 보니 양양에는 사실상 찾아오지 않는다”며 “고등학생 때 교육 정보 측면에서도 소외감을 많이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지역만의 교육지원청이 필요하다는 아쉬움을 드러냈다. 박정민 교사는 “학생들이 출발선이 다르다는 점에서 패배주의에 젖어 있는 모습을 보일 때도 있다”며 청소년들을 교육할 때도 이러한 상대적 박탈감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지 고민한다고 밝혔다.
진로 탐색 위한 배움터 턱없이 적어
학교가 끝난 늦은 오후, 강진청소년수련관은 컴퓨터 게임 속 총소리와 왁자지껄 떠드는 학생들의 목소리로 가득하다. 수련관은 강진 청소년들에게 있어 만남의 장이다. 수련관에서 만난 청소년들은 “학교 앞에 이런 공간이 있어 좋다”고 말하지만, 취미 생활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없는 것이 아쉽다고 한목소리로 말한다. 강진중 2학년 김준범(15)군은 “이렇게 매일 (수련관에서) 게임만 하니까, 뛰어놀 수 있는 곳이 필요할 것 같다”며 “피아노 학원 빼고는 공부 이외 학원이 없어서 생기면 좋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도현(15)군은 “마술사가 되고 싶었는데, 강진에는 마술을 배울 수 있는 곳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강진에 어떤 것이 생기면 더 행복하게 살아갈 것 같냐’는 기자의 질문에 마술을 배울 수 있는 곳이 생기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양양중 2학년 함호준(15)군은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꿈이다. 육군을 꿈꾸는 그는 “다양한 운동을 하고 싶지만, 양양은 스포츠 인프라가 부족하다”고 말한다. 복싱을 배우고 싶었지만, 복싱 학원이 근처에 없는 것이 가장 큰 아쉬움이다. 영덕중 2학년 임재원(15)군은 축구선수가 되고 싶지만, 영덕에는 스포츠 인프라가 부족한 것이 흠이라고 말했다. 영덕의 체육관은 동호회 중심으로 운영돼 중학생인 재원 군이 이용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이 진로를 위한 활동이나 취미를 배울 수 있는 공간도 턱없이 부족하다. 박희숙 원장은 “영덕의 경우, 체육 입시나 미술 입시를 위해서는 1시간 거리 포항까지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박 원장은 이러한 인프라 부족 문제가 수도권과 지방 학생들의 격차를 벌리는 데 주요한 요소 중 하나라고 역설했다.
교육에서 소외된 지방의 현실을 반영해, 대학 입시나 공무원 임용 등에서는 지역 인재 전형을 시행하고 있다. 기회의 불균형을 보정하기 위한 이 제도에 최근 한 한의대 진학준비생은 ‘균등하게 교육받을 권리를 침해당했다’며 헌법 소원을 냈다. 헌법재판소는 이에 대해 “지역 출신 인재를 양성함으로써 지역 간 균형 있는 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라며 “청구인의 직업선택 자유와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다”고 7월20일 해당 제도가 합헌이라고 판단했다.
※ 지방소년표류기팀(김지수, 박소영, 변하영, 이선영, 정보현, 정재윤) 공동 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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