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소년도 청년도 아닌 회색지대, 청소년. 성인기로 진입하는 길목에 선 그들은 손쉽게 배제되고는 한다. 특히 지방 청소년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은 지 오래다. 서울에 관심이 집중된, 이른바 ‘서울공화국’ 한국에서 청소년들은 서울로 향해야 한다는 기대에 가로막혀 목적지를 잃고 표류하기 쉽다. 모든 청소년이 자신만의 미래를 향해 갈 수 있도록, 이대학보는 약 두 달간 인구감소지역인 강진, 양양, 영덕에 방문해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지방소년표류기는 1713호를 시작으로 3주간 연재된다.

책상에 앉아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고 있는 김규리 양.
책상에 앉아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고 있는 김규리 양.

매미 소리가 가득한 영덕 강구정보고 공무원 준비반 교실. 한 줄로 늘어선 책상들 사이 유난히 노란 포스트잇으로 가득한 책상이 있다. 포스트잇에는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다’는 글귀가 적혀 있다. 공무원 준비반의 유일한 학생 김규리(19) 양은 방학이 한창인 오늘도 책상에 앉았다.

‘영탈’, 규리 양의 친구들 사이에서 이 단어는 ‘영덕 탈출’의 준말이다. 국가직 공무원을 꿈꾸는 규리 양이 그리는 가까운 미래 속 자신은 영덕이 아닌 세종에 있다. 그는 공무원이 돼 신도시에서 멋지게 살고 있는 자기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아이들은 다시 돌아올 만큼의 애정은 있지만 지금 당장은 더 큰 도시로 가고 싶다고 말한다.

 

불편한 교통, 고립감의 원인 되기도 

수업이 끝난 후 김규리 양은 동생과 함께 영덕 시내를 구경한다.
수업이 끝난 후 김규리 양은 동생과 함께 영덕 시내를 구경한다.

학교가 끝난 오후5시, 규리 양은 서둘러 짐을 쌌다. 오늘 공부를 마치고 영덕읍에서 동생과 놀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규리 양은 퇴근하는 선생님의 차를 타고 강구면에서 영덕읍으로 향했다. 강구정보고 교사를 비롯해 청소년과 자주 접하는 어른들은 종종 학생들을 태워 준다. 영덕읍으로 향하는 버스는 7대가 하루 1회씩 운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족한 교통편은 청소년들이 지역을 떠나고 싶은 이유 중 하나다. 청소년은 다양한 이동 수단을 가진 성인과 달리 제약이 있다. 하루에 몇 번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거나 어른들의 호의에 기대는 것이 이들이 이동하는 방법이다. 수도권에서 자주 쓰이는 카카오택시, 우버 등의 택시 호출 앱을 사용할 수 없어, 이들은 시외버스 터미널 근처 콜택시를 이용한다. 당연하게도 지하철은 다니지 않는다. 기차역이 없는 지역도 많다. 인구감소지역 89개 시군구 중 고속철도 정차역이 위치한 지역은 18개다.

교통의 불편함은 교류할 수 있는 집단을 제약하고, 이는 답답함과 고립감으로 이어진다. 청소년 시설로 가는 길 또한 험하기만 하다. “오늘 기획 참여하는 아이들도 저희가 다 태우러 가야 돼요.” 영덕 예주문화예술회관은 청소년 간 교류를 확충하고자 영덕 학내 밴드 모두 참여 가능한 ‘오락가락 페스티벌’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이용 인원이 적다는 이유로 셔틀버스도 운행하기 어려운 상황에 김명주 주임과 직원들은 자차를 이용해서라도 아이들을 태운다. 아이들의 이동권이 어른들의 선의에 달린 셈이다.

하교 후 친구들과 수박 화채를 만들어 먹는 영덕여중 학생들.
하교 후 친구들과 수박 화채를 만들어 먹는 영덕여중 학생들.

군청 소재지를 중심으로 같은 지역 내에서도 인프라 차이가 생기기도 한다. 강진청소년수련관 김지현 관장은 “청소년들의 거리 이동권을 생각하면 면 단위 학생들은 현실적으로 (청소년수련관을) 이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수련관 이용자 또한 강진읍 내 학교에 다니는 청소년이 80%를 차지한다. 김 관장은 “청소년이 이용할 수 있는 교통수단의 종류와 배차 자체가 부족해, 살 만하다고 느끼려면 이동권이 먼저 확보돼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양양청소년수련관 백은주 관장 또한 “(수련관이 위치한) 양양읍 청소년 이외에 강현중, 현북중 학생 등 다른 면에 사는 청소년은 잘 오지 않는다”고 답했다. 인구감소지역에 거주한다면 같은 기회에 접근하는 것에 더욱 많은 시간적, 경제적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셈이다.

강진군에서는 청소년 교통 불편을 해소하고자 ‘청소년 100원 이음버스’를 운영하고 있다. 이는 만 6세~18세 청소년들이 강진군 농어촌 버스 노선 모두를 100원에 이용할 수 있는 제도다. 하지만 청소년 이동권 확보 효과는 적다는 의견이다. 강진 성전고 박효진(19) 군은 버스 노선 자체가 하루 5회 미만으로 애초에 적어 실질적인 도움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했다. 강진여중 정은아(15) 양은 “늦잠을 자면 탈 수 있는 버스가 없어 무조건 택시를 타는데, 용돈이 많이 깨진다”고 하소연했다.

 

“문화적 인프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절망이 그 사이에 있어요” 

영덕읍에 도착한 규리 양은 동생과 저녁을 먹고 노래방으로 향했다. 영덕에는 코인 노래방 건물이 없다. 오락실에 있는 노래방 부스가 전부다. 이 부스는 지폐만 이용할 수 있는데 주변에 은행이 없어 미리 현금을 준비해야 한다. 오후9시, 자매는 황급히 오락실을 나섰다. 집으로 가는 마지막 버스가 9시 13분에 오기 때문이다. 버스를 놓치면 자전거를 1시간은 타야 하기에 두 사람은 힘껏 뛰었다.

“이렇게 인사하고 싶지 않았는데, 잘 가요!”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전, 취재진에게 인사하는 김규리 양과 동생.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전, 취재진에게 인사하는 김규리 양과 동생.

본지가 강진, 영덕, 양양 세 지역 청소년 15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청소년들이 지역을 떠나고 싶은 가장 큰 이유는 ‘오락 시설 부족’이었다. 세 지역 청소년 10명 중 9명은 영화를 보기 위해 타지역으로 간 경험이 있다. 세 지역에는 CGV, 메가박스, 롯데시네마 등의 영화관, 올리브영이 없다. 학생들이 이용할 수 있는 쇼핑 시설이나 오락 시설은 전무하다. 시골의 하루는 일찍 마무리되기도 한다. 강진여중 김부경(15) 양은 오후8시만 돼도 거리가 캄캄해진다고 말했다. “우리는 아직 코로나 때 같아요.” 

아이들은 새로운 경험을 하기 위해 더 큰 지역으로 향한다. 강진여중 정은아(15) 양은 영화를 보거나 유행하는 음식 등을 먹어보고자 종종 광주나 목포에 간다. 도시에는 연예인 생일 카페도 있고, 네컷사진 브랜드인 포토이즘도 있고, 탕후루도 있다. 다만 이런 경험은 비싸다. “한 번 나가서 놀려면 10만 원은 깨져요.” 광주에 도착하면 아이들은 제일 먼저 중심지로 가는 택시를 잡는다. 이때 드는 돈은 약 1만 원, 아끼고 아끼며 논다고 하더라도 왕복 2만 원은 기본 교통비로 소비된다.

청소년들이 말하는 ‘놀 곳이 없다’는 단순히 놀고 싶은 마음이 아니다. 지방과 수도권이 가진 자원의 격차가 개개인의 경험과 기회의 차이로 이어지고, 마음속 결핍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 나이 때 할 수 있는 경험들이 서울에는 너무 많고 서울 애들은 그걸 당연한 듯이 하고 있는데 여기는 그만큼 못 누리는 것 같아요.” 서울 댄스 학원에 다니는 양양중 A(16) 양은 서울에 갈 때마다 경험의 차이를 실감한다. 강진군 청소년 B(17) 양도 서울에 올라갈 때마다 오묘한 기분을 느낀다. “나는 지하철을 어떻게 타는지 몰라 헤매고 있는데 나보다 어린 초등학생이 척척 잘해 나가고 있는 거예요”라며 “나는 몇 시간 올라와서 잠깐 누리는 건데 여기 애들은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 당연하게 누리는 거네. 약간, 부럽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버팀목이 되는 고향

“그래도 영덕이기에 사춘기를 무탈하게 보낼 수 있던 것 같아요. 방황할 때 산도 가고 바다도 가고 그랬거든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곳에서 방향을 다시 잡은 것 같기도 해요.”

규리 양은 “나중에는 영덕에 다시 오고 싶다”고 말했다. 청소년들에게 고향이 떠나야만 하는 곳으로 남는 것은 아니다. 친구들과의 추억이 가득 담겨 있는 곳이자, 사춘기를 온전히 보낸 소중한 공간이기도 하다. 그에게 영덕은 꿈을 위해 떠나야 하는 지역이기도 하지만, 청소년기의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워준 든든한 버팀목이다.

시험이 끝난 후 영덕여중 앞 분수대에서 친구들과 함께 물놀이를 하는 학생들.
시험이 끝난 후 영덕여중 앞 분수대에서 친구들과 함께 물놀이를 하는 학생들.

부족한 인프라 탓에 학업이나 진로를 위해 다른 지역으로 떠난 사람들에게도 고향은 삶의 기반이 된다. 영덕에서 음악 학원을 운영하는 안지영 원장은 “처음 대구에 공부하러 갔을 때 물부터 찾았다”고 말한다. 그는 답답한 일이 있으면 고향과 가장 비슷한 모습을 먼저 찾는다. 대학을 진학해 서울로 상경한 고려대 노형진(생명과학부∙25)씨는 양양에서 쌓았던 돈독한 인간관계가 가장 그립다고 말했다. 그는 대학에 진학한 후에도 고향에 자주 들리며 의지하고는 한다.

청소년이 성인이 된 후 고향에서 생활하는 본인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운 것은 지역의 부족한 청년 인구 및 일자리 문제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간호사를 꿈꾸고 있는 강진 성전고 강태윤(19)군에게 강진은 큰 병원이 없어 꿈을 펼치기 어려운 환경이다. 그는 “강진은 의료원 빼고는 병원이 전무한 상황이라, 꿈을 위해서는 다른 곳으로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의료 인프라가 부족하다 보니 전문적인 경험을 쌓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규리 양 또한 지방에는 청년들이 뿌리내릴 만한 일자리가 없다는 것을 고향을 떠나는 이유로 꼽았다. 

지역 불균형이 확대됨에 따라 더 나은 교육과 일자리를 찾아 떠나는 것은 막을 수는 없으나, 유년기 시절 고향에 대한 긍정적 경험은 고향으로 돌아올 가능성을 높인다. 2023년 경제협력개발기구-유럽연합(OECD-EU)에서논의된 ‘미래를 위한 장소 기반 정책(Place-based Policies for the future)’에 따르면, 성장 과정에서 자라난 지역에 대한 감각은 지역 활력의 요건이 되는 것은 물론 개개인에게 있어 하나의 사회적 자본이 된다. 지역에 대한 인식이 나쁘지 않으면 다시 돌아올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유년기의 성장환경은 앞으로의 일생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지만, 청소년 정책은 미비한 수준이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김지경 연구원은 “현재 지방소멸대응기금은 청소년 인구에 대해서는 거의 쓰이지 않고 있다”고 역설했다. 지자체에서는 가시적인 성과물이 필요해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를 위해 투자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청소년 성장 환경을 근본적으로 개선하기 위해서는 청소년 인구에 대한 세밀한 조사와 욕구 조사가 필수적이다. 그는 양질의 성장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시설 건설과 같이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뿐 아니라 근본적인 곳으로부터 점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 지방소년표류기팀(김지수, 박소영, 변하영, 이선영, 정보현, 정재윤) 공동 취재

※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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