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홍콩 배우 장국영은 예외적인 문화적 지위를 점한다.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훌쩍 넘은 외국 배우임에도 매년 4월이면 그의 기일을 기리는 추모전이 열리고, 대표작들이 재개봉돼 스크린에 오른다. 올해 22주기를 맞아 국내에서는 최초로 재개봉한 ‘열화청춘’(1982)은 장국영이 자신의 실질적인 데뷔작으로 손꼽은 작품이자, 장국영 특유의 우수 어린 이미지가 처음으로 구축된 작품이기도 하다. 동시에, 이 영화는 홍콩 뉴웨이브를 대표하는 담가명 감독의 대표작으로, 개봉 당시 ‘동성애적 묘사’와 자극적인 소재로 인해 상영 금지를 받았던 문제작이기도 하다.

전개는 다소 불친절하지만, 영화의 플롯 자체는 매우 단순하다. 대가족과 함께 살아가는 퐁은 도발적인 캐시와 사랑에 빠지고, 캐시의 사촌 루이스와도 가까워진다. 루이스는 유약한 몽상가로, 돌아가신 어머니의 음성이 담긴 라디오 녹화본을 돌려 들으며 방 안에서 늘어져 지낸다. 루이스는 실연을 당하고 바에서 울고 있던 토마토(사람 이름이다)를 위로해 주다 연인이 되고, 캐시와 루이스, 퐁, 토마토는 철없는 불장난을 일삼으며 한데 몰려다닌다. 그러던 어느 날 캐시의 전 남자친구이자 일본 적군파로부터 도망친 신스케가 그들을 찾아오고, 언제나 자신의 배 ‘노마드호’를 타고 아라비아에 가고 싶었던 루이스는 신스케와 친구들을 데리고 섬으로 떠난다. 섬에서 짧고 행복한 한때를 보내던 청춘들은 신스케를 처단하러 온 적군파 요원에 의해 어이없는 죽임을 당한다. 오직 루이스와, 루이스의 아이를 밴 듯한 토마토만이 살아남아 망연자실하게 서로를 껴안으며 영화는 끝이 난다.

열화청춘은 전반적으로 붉은 이미지로 가득하다. 토마토의 첫 등장 장면, 캐시의 붉은 원피스, 퐁의 바지, 결말의 피로 물든 난투극, 그리고 이름부터 ‘적(赤)군파’인 일본의 무장 단체까지—불타오르는 붉음은 청춘의 열정과 충동, 그리고 그 파국을 상징한다. 그러나 루이스는 이들과 뚜렷하게 대비되는 어딘가 차갑게 가라앉은 존재다. 생의 온기를 넘어 번잡함마저 느껴지는 퐁의 가정과 달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루이스의 새파란 방은 고립되고 정지된 공간이다. 그는 방 한켠의 모형선 ‘노마드호’를 바라보며 마초적인 베토벤 교향곡을 듣고 아라비아를 꿈꾸지만 실제로는 침대 위에 웅크린 채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한다. 영화는 루이스와 다른 세 명의 인물을 정반대처럼 그리지만, 이 대비는 서로 배제하는 양극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청춘이 겪는 불안의 양면—외부로 분출되는 충동과, 내부로 침잠하는 무기력—을 보여주는 이중 구조다. 퐁, 캐시, 토마토의 충동적 사랑과 불장난이 격렬한 자기 소진이라면, 루이스의 정지는 무기력과 회피 속의 자기 소멸이다. 이처럼 열화청춘은 청춘을 필요 이상으로 이상화하지 않고 거대한 시대의 흐름 속에 흔들리는 존재로 그려낸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이 영화는 낡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단순히 도피와 비관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열화청춘은 불안정하고 미완의 형태로나마 새로운 세대가 구축해 나갈 사회를 상상하며 그 가능성을 제시한다. 루이스–캐시와 퐁, 토마토의 가족적 배경은 명확한 계급적 차이를 반영하지만, 네 인물은 젊음이라는 핑계 아래 서로를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며 공동체를 형성한다. 이들이 함께 음식을 준비하고 서로의 몸을 기댄 채 잠드는 섬에서의 장면들은 가장 아름다운 시퀀스로 꼽을 수 있다. “우리는 사회에 쓸모없는 것 같아”라는 토마토의 말에 루이스는 “사회가 뭔데? 우리가 사회야”라고 답한다. 이 유명한 대사는 단순히 철없는 반항이라기보다는, 정체성과 소속의 공백 속에서 주체적으로 공동체를 모색하려는 선언으로 읽힌다. 그런 점에서 가장 유약한 루이스와 가족도 재산도 없는 철저한 약자 토마토만이 뱃속의 아이와 함께 살아남는 결말은, 새로운 세대는 핏물을 딛고 일어나 어떻게든 생존하고 나아갈 것이라는 희망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영화는 “노마드호는 아라비아를 향해 나아갔다”는 자막과 함께 막을 내린다. 과연 그작은 배가 정말 아라비아에 닿을 수 있을까? 아라비아는 실체 없는 도피의 공간, 끝없이 미끄러지는 이상에 가깝다. 엔딩 크레딧과 함께 유유히 흐르는 주제곡 ‘유랑’(1982)은 그 허상의 여정을 완성한다. 40년이 흐른 오늘,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여전히 루이스이고, 퐁이고, 캐시이고, 토마토이다. 저마다의 ‘노마드호’를 타고 저마다의 아라비아를 찾아 흔들린다. 그 유랑이 어디에 닿든, 혹은 닿지 못하더라도, 청춘 이후의 루이스와 토마토가 그랬듯 우리는 결국 살아갈 것이다. 아름답지 않더라도 청춘은 그렇게 내일을 맞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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