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제103회 어린이날이다. 그런데 소파 방정환 선생님께서 ‘어린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시고 ‘어린이의 날’을 제정하시기 훨씬 전부터 이 땅에 어린아이, 특히 여자아이들을 품어 교육하는 기관이 있었으니 그곳이 “이화”였다.
필자는 이화유치원, 이대부초, 그리고 이화여대를 다녔으니 이 역사를 모를 리 없지만, 작년부터 인문관 승강기를 이용할 때마다 사학과 교수님 연구실 문에 붙은 <이화와 어린이>라는 전시 포스터가 유난히 내 마음을 건드리면서 이상한 부채감으로 쌓여있었다. 해를 넘기고 지난 4월 초순의 어느 화창한 금요일 낮, 이화역사관에 올라가 그 사진 전시회를 혼자 감상하였다. 우리 이화의 교육이념, 특히 어린이들을 향한 유치원, 초등학교 설립을 위해 일찍이 앞선 교육철학으로 여러 난관을 이겨내신 사범대학 선생님들의 혜안과 헌신이 놀라웠다. 사진과 영상, 그리고 글들을 찬찬히 읽어가노라니 백여년 전으로, 혹은 수십년 전으로 돌아가 그분들의 마음에 닿아있는 기분이 들었다. 마지막 패널에는 사범대 가족들의 추억이 담긴 편지와 글들이 있었는데 격세지감이었다. 외국 친구들에게 학용품 및 교육 기자재들을 간절히 요청하는 교장 선생님의 편지가 불과 몇십년 전인데, 바로 그 옆에 이대부초 학생들이 돕고 있는 캄보디아의 이화스렁 학교를 최근 방문하여 봉사 활동한 글이 함께 있는 것이다.
“이화는 어린이를 닮아있다.” 이 전시회를 통해 필자 안에 얽혀진 타래에서 실마리를 찾은 느낌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왜 내게는 이화와 어린이가 특별하게 다가오는가?’에 대한 잠정적인 해답을 얻게 된 계기이다. 철학상담적으로 말하면, 불편한 정서를 가져다주는 상황을 분석하고 자신의 세계관과 연결하여 그 이해를 넓히고 전체적으로 설명이 가능한 단계로 이끌어가서 그 불편한 감정이 사라지게 되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우선, 이화와 같은 고등 교육 기관, 최고의 여성 인재들을 키워내는 대학 공동체를 ‘어린이’와 관련시킨다는 것이 불편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어린이는 ‘어리석고 유치한 (childish)’의 의미가 아닌,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고 순진함(childlike)’이라는 긍정적인 뜻으로, 낭만주의적 시각으로 해석해도 어딘가 부족하다. 필자는 아동학자는 아니지만, 철학교육을 통해 어린이들과 함께 철학하기를 여러 해 동안 해오면서 어린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는데, 이를 동료 철학교육자들과 <어린이 인문학의 날> 선언문으로 표현해 본 것을 소개하면 이와 같다. 1) 어린이들은 스스로 묻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2) 어린이들은 세계, 인간, 삶에 대해 깊이 있게 묻고 근원적인 질문도 던질 수 있습니다. 3) 어린이들은 정해진 방향 외의 다양한 방향에서 색다르게 바라보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4) 어린이들은 주어진 지식의 차원을 넘어 새로운 방법으로 느끼고 상상하고 다르게 체험할 수 있습니다. 5) 어린이들은 함께 살아가는 여러 다른 존재들과 즐겁고 의미 있는 소통을 할 수 있습니다. 6) 어린이들은 함께 살아가는 다른 존재들의 입장도 헤아리며 공감하려고 애쓰고 서로 배려할 수 있습니다. 7) 어린이들은 자신이 생각하고 느끼고 경험한 것을 자유롭고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오월은 어린이의 마음과 이화의 마음을 떠오르게 하는 계절이다. 이 둘은 실체가 있지만, 그 완전한 모습을 눈앞에 제시할 수는 없는 존재, 그러나 그것의 이데아를 계속해서 추구하게 만드는 존재라는 점에서 공통의 매력을 가진다.
어린아이의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과 엉뚱한 것 같지만 패러다임을 넘나드는 질문들은 그들의 성장 동력이다. 학문 공동체로서 이화의 생명은 학문 주체자들의 진솔하면서도 살아있는 탐구의 정신일 것이다. 소위, 시대의 흐름과 자금의 흐름만 쫓아가다가, 진정 생명력 있는 물줄기는 놓칠 수도 있다. 이화의 성장 잠재력은 아직 무궁무진한데 그 뿌리가 맑고 깨끗한 생수에 닿아있는지, 오염수에 닿아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언어가 달라도 함께 놀고,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어서 오히려 더 신나게 토론하고, 서로 다른 면을 발견하기에 더 어울려 활동하는 것을 즐거워한다. 139년 전 이 땅에 꽃님이(10살), 별단이(4살) 같은 아이들을 품을 수 있었던 이화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가장 무시당하는 약자에게로 향하는 마음이 고통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의 기쁨일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나눔과 섬김의 이화 정신은 결코 가진 자의 시혜적인 베풂이 아니다. 함께 살아가는 존재 양식이고 타자 속에서 건강하게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화를 탄생시킨 그 마음을 잊어버린 이화는, 코로나 시절 텅 빈 대강당만큼이나 공허하다.
이화의 오늘은 이화의 놀라운 상상력에서 비롯되었다. 이화는 그 누구도 꿈꾸지 않았던 것을 함께 소망하고, 그 바라는 것을 묵묵히 구현해 온 사람들의 역사이다. 올 오월에도 이화는 어린아이처럼 꿈을 꿀 것이다. 이화 캠퍼스 곳곳 나무들의 푸르름과 웃음 속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