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에 태어나 20세기에 20대를 보낸 나는 늘 궁금했다. 21세기는 어떤 모습일까?

20세기가 끝나고 21세기가 시작되었을 때, 그리고 몇 년이 흘러갔을 때, 나는 실망했다.

“애걔, 겨우 이거야? 숫자만 바뀌었을 뿐인거야?”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면서 물리학은 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1900년 플랑크의 양자가설은 현대물리학 혁명의 서막을 열었고, 1905년 아인슈타인은 원자의 존재를 이론적으로 증명하고 광양자설로 양자역학의 발전을 본격화했다. 또한 특수상대성이론으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류의 통념을 근본부터 뒤흔들었다. 10년 뒤 발표한 일반상대성이론에서는 시공간이 역동적으로 출렁이며 중력을 만들고 우리 우주의 시작과 끝을 빚어냄을 밝혔다. 한편, 물리학계 전체는 기나긴 방황 끝에 누구도 진정으로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양자역학을 기어코 완성하며 현대물리학 혁명을 일단락지었다.

혁명의 바람은 물리학에만 불지 않았다. 20세기 초중반을 거치며 모든 학문 분야가 오늘날 우리가 아는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학문에 붙는 ‘현대’라는 수식어는 대부분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학문적 혁명은 때로 학자들의 정신을 뒤흔드는 고통을 안겼지만, 그 결과는 눈부셨다.

학문 밖의 20세기는 또 다른 의미에서 더 극적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삼아 자신의 배를 불리는 일이 개인에서 국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차원에서 공공연히 벌어졌다. 전쟁은 더 이상 확대될 수 없는 최대 규모로 확대되어 전 세계가 참혹한 고통을 겪었고, 그제야 인류는 또 다른 세계대전은 막아야 한다는 절박함 속에 위태로운 국제질서를 겨우 구축했다.

한반도에 살던 이들은 20세기를 불행으로 시작했다. 마치 지구상의 온갖 비극이 이 작은 땅에 응축된 듯했다. 수십 년의 식민 지배도 모자라 일본의 전쟁 책임을 우리가 뒤집어쓰듯이 나라가 분단되었고, 이어진 전쟁에서는 국민 열 명 중 한 명이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연이은 독재와 학살 아래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소련이 붕괴하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세계사적 전환 속에서도 한반도만은 냉전의 섬으로 남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총칼과 군홧발의 무법천지 속에서도 굴하지 않았다. 비록 ‘절차적’이라는 수식어가 떨어지진 않았지만,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나라를 힘겹게 세웠다. 국가 부도의 위기마저 기적적으로 극복하며, 마침내 새 천 년은 다를 것이라는 희망 속에 21세기를 맞이했다.

21세기의 시작은 밋밋했다. 21세기로 바뀌면 전 세계의 컴퓨터가 멈출지도 모른다고 외치던 호들갑은 기우로 끝났다. 부유한 곳은 여전히 부유했고, 분쟁지역의 고통은 계속되었다. 한때 희망을 품었던 남북 관계도 현실의 벽을 넘지 못했다. 물리학을 비롯한 학문도 큰 변화 없이 제자리를 지키는 듯했다. 1년이란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시간일 뿐 인간사와 무관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무료한 해들이 흘러갔다.

그때는 몰랐다. 미미해 보이던 변화, 둔감한 자는 느끼지 못했던 그 작은 차이들이 실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마중물이라는 것을. 맥스웰의 전자기이론과 현대물리학 혁명을 토대로 20세기에 꽃핀 전기전자 문명은 정보 혁명으로 이어졌다. 21세기의 4분의 1이 지난 지금, 우리는 손안의 스마트기기로 지구상 누구와도 실시간 소통이 가능한, 역사상 최초의 전 지구적 상시 연결 상태를 맞이했다.

물리학에는 ‘상관거리’라는 개념이 있다. 구성 요소 사이에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 거리를 뜻한다. 물질이 임계점에 도달해 상전이가 시작되면, 이 상관거리는 무한대가 된다. 이때 물질은 아주 작은 외부 충격에도 극도로 불안정해진다.

지구상 누구나 연결된 지금, 인류의 상관거리는 어쩌면 무한대에 도달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지구 반대편에 있는 누군가의 생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시대다. 연결된 사람들은 뜻이 맞는 이들을 찾아 집단을 이루고, 과거에는 묻혔을 목소리가 동조자를 만나 증폭되며 기존 질서와 상식에 도전한다. 이런 도전은 모든 방향과 규모로 일어나 문명의 발전을 가속할 수도, 파괴할 수도 있다. 기존 질서를 강화할 수도, 무너뜨릴 수도 있다. 인공지능을 필두로 한 과학기술의 발전은 전례 없는 속도로 세상을 바꾸고 있으며, 20세기에 위태롭게 유지되던 국제질서는 하루가 다르게 흔들려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로 치닫고 있다.

아, 이것이 진짜 21세기였구나!

바로 지금, 우리가 마주한 21세기의 불안 정성은 20세기 비극으로 점철된 이곳에서도 혹독한 현실이 되어 나타나고 있다. 2025년의 대한민국이 위태롭다. 온몸에 피를 묻혔던 그 독재자조차 광주를 겪은 후 감히 되풀이하지 못한 채 6.10 민주항쟁에 무릎 꿇고 폐기했던, 20세기의 유물인 줄 알았던 계엄이 21세기에 되살아났다.

학보사에서 이 칼럼을 요청받은 것은 1월 말이었다. 본래 마감은 4월 중순이었기에, 그때쯤이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았으리라 기대하며 수락했다. 그러나 사태는 최악을 거듭하며 악화일로에 있고, 공교롭게도 칼럼의 마감일은 앞당겨졌다. 하루하루를 버티기 힘든 시간이다.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의 21세기는 20세기보다 더 험난할지도 모른다.

부디 이 글이 학보에 실릴 때쯤에는, 어느 비관주의자의 넋두리로만 남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