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보면 에덴동산에 살던 최초의 남녀, 아담과 하와에게 허락되지 않은 두 나무 실과가 있었다. 그들이 그중 선악과를 먹었다. 하나님은 인간의 손이 닿지 못하도록 나머지 한 나무를 지켜냈는데, 그 나무는 생명나무였다. 참 역설적으로 우리나라 사이비 종교사를 보면, 생명나무를 손에 쥐겠다는 구호로 가득 차 있다. 영생교는 이름 그대로 영생을, 신천지는 ‘신인합일 육체영생’을 교리로 내세워 사람들을 현혹한다. 하지만 영생불사가 사이비 교주의 혹세무민하는 구호가 아니라 이제 첨단 과학의 구호가 되고 있다. 인간은 저속노화를 넘어 신체 기능 향상은 물론, 죽음마저 극복하려는 포스트휴먼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생전에 남긴 디지털 흔적을 데이터로 가공하여, 사후에도 마치 살아있는 듯 소통할 수 있는 ‘디지털 영생 서비스’가 이미 상용화되고 있다. 우리 시대의 화두인 ‘생명 연장’과 ‘기술 진보’의 결합 현상에 대해 생각해 보자.

성경에는 기술 문명의 시작을 알려 주는 바벨탑 서사가 나온다. 바벨탑 서사는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던 시절에 시날 평지에서 건설하던 ‘성읍과 탑’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탑의 꼭대기가 하늘에 닿을 듯한 대공사를 통하여 그들은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고자” 하였다. 하나님은 건축공사를 보시려고 내려오셨고, 결국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여 건설을 좌초시켰다. 이 서사가 전달하는 메시지의 핵심에는 바벨론인들의 도시화 프로젝트가 있다. 바벨론인들은 도시화를 가능하게 할 혁신적인 벽돌 기술을 갖고 있었다. 바벨탑 서사에는 기술 문명에 대한 거부가 나타나지 않는다. 기술 자체를 문제 삼지 않는다. 기술이 지배와 권력의 도구가 될 때, 그때 신의 징벌의 대상이 된다. 성경은 일찌감치 바벨탑 서사를 통해 기술이 종교인, 권력자, 그리고 자본가의 손에 들어가서 집중화, 중앙화, 권력화되는 위험을 보여 주었다. 세월이 흘러 헬레니즘 시대의 문헌인 에녹서에서는 당대의 기술 문명이 인류를 파괴하는 상황을 암시적으로 전한다. 천상에서 200명의 천사가 땅에 내려와 인간에게 금속 가공 기술과 화장술, 그리고 마술과 점술 및 징조 해석 기술을 전했다. 그 결과 인간은 전쟁 도구를 만들어 서로 죽이고, 음란으로 타락해 갔다. 즉, 기술 문명의 발달은 인류에게 유익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살상과 타락을 초래하였음을 그리고 있다. 에녹서도 역시 문제의 본질이 기술이나 지식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인간이 ‘부적절하게’ 사용한 데 있다고 지적한다.

모든 종교는 단순히 윤리를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궁극적 실재와 의미에 관심을 두며, 궁극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다. 불교와 기독교는 인간의 죽음을 당연한 사실로 전제하고, 어떻게 죽음을 극복할지 방법을 제시한다. 불교는 열반을 말하고, 기독교는 부활을 말한다. 인간은 죽음이라는 불가피한 운명 앞에서 종말을 회피할 수 없고, 결국 인간은 살아가는 내내 개인의 종말뿐만 아니라 세상의 종말에 관해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제 죽기를 거부하는 세대에게 전통적인 종교는 무용지물일 뿐이다. 죽음을 거부하는 세대에게 죽음 이후의 세상을 말하는 것은 논리적 모순일 뿐이다. 죽음 자체를 거부하는 세대에게 죽음 이후의 세상은 없고, 천국도 없고, 지옥도 없고, 사후 심판도 없고, 부활도 없다. 결국 신이 필요 없다. 니체가 ‘즐거운 학문’에서 “신은 죽었다. 우리가 신을 죽였다”라고 선언했을 때, 그것은 당대의 기독교적 세계관의 붕괴를 뜻하였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인간을 초월하는 ‘특이점’(singularity)에 도달할 근미래에는 이 말이 문자 그대로의 현실이 될지 모른다.

현세대는 마침내 에덴동산의 생명나무로 향하는 길을 헤치고 나아가, 그 열매를 삼키며 죽기를 거부하려 한다. 영생불사의 여정에서, 지금 우리는 ‘디지털 불멸’이라는 작은 성취를 이룬 듯 보인다. 인류는 육체적 불멸을 기대하며 신체 기능을 향상하면서, 트랜스휴먼과 포스트휴먼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영생불사 욕망과 기술이 결합한 ‘디지털 불멸’에 불편함을 느끼는 것일까? 디지털 유품을 바탕으로 사이버 인물로 재현된 부모나 형제, 혹은 친구와의 소통을 통해 그리움을 달래는 일은 정말 아무 문제가 없는 걸까? 더구나 디지털 불멸 기술이 수익 창출을 위한 비즈니스 모델과 결합한다면 윤리적 문제가 과연 없을까?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쉬 서사시’에 보면 우트나피쉬팀과 그의 아내는 영생하였다. 오늘날 인류는 인공지능과 생명공학의 결합으로 영생불사라는 현대판 신화를 현실이 되게 하려 애쓰고 있다. 이 지점에서 잠시 멈추고, 묻고 싶다. 신은 왜 인간에게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허락하지 않았을까? 인간에게서 인생의 일부인 죽음을 빼버린다면, 인간이 얻는 유익은 무엇일까? 디지털에라도 한 올 흔적 남기지 않고, 신이 우리에게 허락한,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는, 출생에서 죽음까지 완결구조에 마침표를 찍는 인생, 이것이 신이 인간에게 선사한 ‘영원한 안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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