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살랑이는 초여름 오후, 커다란 나무에 기대앉은 한 소녀를 보았다.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생각에 잠겨있는 뒷모습이 초록빛 공원과 너무나도 잘 어우러져, 나는 카메라를 들어 조심스레 셔터를 눌렀다. 그리고 나도 나무에 기대앉아 다리에 닿는 촉촉한 풀잎의 감촉과 아이들의 웃음소리, 잊고 싶지 않은 장면을 오롯이 담았다. 사진을 찍을 때면 늘 하는 나만의 의식이다. 순간의 감각들을 온전히 느낀다. 그러면 사진을 다시 보는 순간 그 감각들이 놀라울 만큼 생생히 되살아난다. 이 사진을 볼 때마다 나는 코끝을 스치는 풀잎의 향, 볼에 닿는 바람의 선선함, 그리고 그 순간을 살았던 스물세 살 초여름의 나를 다시 만난다.
그 해는 나에게 격변의 해였다. 전공도, 가장 친한 친구도, 삶의 방식도 완전히 뒤바뀌고, 새로운 일들이 쉼 없이 펼쳐졌다. 여름에는 한 달 동안 낯선 도시에서 살 기회가 주어져 그곳에서 본디의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사진에 대한 사랑을 뚜렷이 자각했다. 나는 어디든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마음이 동하는 순간을 담았다. 그러면서 내가 왜 세상을 사랑하는지를 느꼈다. 사진 속 세상들은 아름다웠고, 살아있길 잘했다고 느끼게 해줬다. 드넓은 바다를 망설임 없이 헤엄치던 아이들, 손을 꼭 잡고 개를 산책시키던 노부부, 해 질 무렵 거리에서 춤을 추던 사람들. 스물세 살 초여름의 나는 바삐 세상을 찍으러 다니며 세상에 대한 사랑을 키워 나갔다.
그리고 어느덧, 스물네 살 초여름이 됐다. 나는 우연히 학보에 들어오게 돼 또 다른 세상을 찍고 있다. 하지만 지금껏 사진으로 마주한 세상만큼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사실을 기록해야 하는 사진은 때로 추악한 현실의 민낯을 드러내기도 했다. 더 큰 세상을 마주하게 된 스물네 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세상에 대한 사랑이 커지고 있다. 이런 세상을 함께 살아가고 기록해 주는 사람들과, 그렇기에 바뀌어 가는 것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희망들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을 다시 보게 되는 먼 훗날,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스물넷의 시간들과 감각들이 되살아날 것이다. 그때의 내가 찍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우리가 꿈꾸는 세상에 조금은 가까워져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