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년. 영화 감독 타셈 싱(Tarsem Singh)이 그의 영화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The Fall, 2006)을 세상에 선보이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그로부터 다시 오랜 시간이 지난 2024년 12월 25일, 전세계 수많은 영화인들의 관심과 사랑 끝에 영화는 〈더 폴: 디렉터스 컷〉으로 재개봉하여 무려 18년 만에,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관객의 품으로 돌아왔다.
일본의 의상 디자이너이자 아트 디렉터 이시오카 에이코(Eiko Ishioka, 1938-2012)의 정교하고 화려한 의상 디자인, 그리고 타셈이 고수한 1920년대 이전 촬영 기법이 선사하는 고전적인 아름다움은 영화에 진정한 시네마적 서사를 부여한다. 28년 동안 길러낸 타셈의 자식같은 영화 〈더 폴〉은 관객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아 이번 제3회 한국예술영화관협회 어워드에서 관객상을 수상하는 등 큰 사랑을 받고 있다.
판타지와 현실을 오가며 잔혹할 정도로 아름다운 장면을 담아낸 〈더 폴〉. 그런데 이 영화는 왜 아름다우면서도 잔혹한가? 혹시 우리는 영화의 화려한 미장센 아래 또 하나의 층위를 소외시키고 있지는 않은가?
The craftsmen and artists of taking the falls, crashing the planes, and enduring the flames suffer the ignominy of going unmentioned or, when they are credited in print, being misspelled.
“추락하고, 비행기가 폭파하고, 불길을 견디는 장인들과 예술가들은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거나, 간혹 어딘가에 이름이 실려도 철자가 틀리는 수모를 겪는다.”
— Scott McGee, «Danger on the Silver Screen: 50 Films Celebrating Cinema’s Greatest Stunts» (2022)
1920년대 할리우드는 무성영화의 황금기였지만, 그 뒤편의 촬영 현장에는 영화의 높은 완성도를 위해 육체를 내던진 노동자, 스턴트 배우가 존재했다. 근현대 스턴트 워크의 정교함은 1903년 프랭크 해너웨이(Frank Hanaway)가 에드윈 S. 포터(Edwin S. Porter)의 영화 〈대열차강도〉(The Great Train Robbery)에서 말에서 떨어지는 스턴트 장면으로부터 출발한다. 이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위험한 업무를 감수하는 것에 익숙하고, 비행 조종 기술을 보유한 전직 전투기 조종사들이 영화 산업에 뛰어들게 되며 스턴트 워크 산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그 당시 할리우드 산업에는 위험수당이라는 개념조차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스턴트 액션 중 당하는 부상이나 사망 이후에도 법적·사회적 보호를 받지 못했다. 노동조합 바깥에 놓인, 영화 산업의 숨은 하층 노동자로 그들은 소모되고 소외되었다. 어느 이름 없는 배우가 수행한 용감한 절벽 점프, 추락, 구타와 화염에 대한 기록은 말끔히 편집된 채, 무성 영화에 대한 우리의 감상이 오직 우악스러운 액션 코미디로 기억되는 것은 슬픈 사실이다.
1920년대 미국 전역에서는 자동차 산업, 철강업 등을 중심으로 대규모 노동조합이 형성되었지만, 영화 산업의 비정규·프리랜서 노동자인 스턴트맨들은 이 흐름 속에서도 소외되었다.
초기 영화배우조합(Screen Actors Guild)은 1933년 처음으로 결성되었고, 그 이전의 스턴트 배우들은 보호장치가 없는 상태에서 근무했다. 존 벡스터(John Baxter)의 저서 «The Stunt; the story of the great movie stunt men»에 따르면 1925년과 1930년 사이 할리우드에서 발생한 스턴트 사고는 총 10,794건이었고 그중 사망자는 50명이었다. 1920년 영화 ‹Way Down East›에서 스턴트 배우 릴리언 기시(Lillian Gish)는 얼어붙은 강물 위 둥둥 떠다니는 커다란 얼음조각에 맨몸으로 누워 얼음장같은 강물에 손을 담근 채 떠내려가는 장면을 촬영하였다. 촬영 후 그녀가 받은 보상은 담요 한 장, 차 한 잔, 그리고 손가락 동상으로 인한 영구적 신경 손상이었다.
이러한 초기 할리우드 영화 산업 내 안전 규정 부재와 노동자 권익 보호 미비 문제는 영화 속 로이의 신체와도 겹쳐진다. 스턴트 배우로 일하는 로이는 강을 가로지르는 기찻길에서 떨어지는 장면을 촬영하던 도중 부상을 입고 로스엔젤레스의 한 병원에 입원한다. 다시 눈을 뜬 그는 추락 장면을 찍던 그 순간이, 자신의 하반신을 감각할 수 있었던 마지막 순간임을 깨닫는다. 로이가 부상을 입은 사실은 영화 속에서는 물론 영화 밖에서도 알려지지 않는다. 로이의 신체는 할리우드 산업 구조 속에서 쉽게 대체 가능한 자원으로서 충분히 소비되었다. 그래서 영구적으로 지워졌다. 삶의 애착 없이 병상에 누운 로이는 오렌지 농장에서 일하다가 떨어져 팔을 다친 6살 아이 알렉산드리아를 만나고 아이와 함께 자신이 끝내지 못한 대서사시를 지어낸다. 로이의 비극은 알렉산드리아의 순수한 상상력을 만나 환상문학이 되고, 여기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망가진 신체와 정신을 반복적으로 묘사한다.
그의 서사시 속 캐릭터들은 모두 로이 자신을 투영한 파편들이다. 로이는 환상 속 캐릭터들을 하나씩 떨어뜨려 죽인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죽어야만 하는 이유를 하나씩 만들어내며 하나씩 추락시킨다. 그가 지어내는 이야기에서조차도 로이의 분신들은 끝내 보호받지 못한다. 이 추락은 서서히 알렉산드리아에게 다가간다. 로이가 의도하였든 하지 않았든 말이다. 로이는 다량의 모르핀을 손에 넣기 위해 거동이 자유롭고 몸집이 작아 어른들의 눈을 피해다니기 좋은 알렉산드리아를 꾀어낸다. 꾀어냄의 수단은 바로 그가 지어낸 대서사시였다. 처음부터 이것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로이 또한 처음부터 삶의 애착이 없었던 것이 아니였다. 병원의 의사, 촬영 관계자들 모두 로이에게 스스로 살아내려는 의지를 가지라는 말만 주술처럼 불어 넣을 뿐 그 누구도 로이가 처한 현실을 주목하지 않는다.
결국 알렉산드리아도 로이처럼 아래로 떨어진다. 그는 추락함으로써 로이의 이야기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여지를 얻게 되고, 알렉산드리아의 전폭적인 개입으로 이야기 속 로이는 가까스로 살아남는다. 그는 더 이상 강물에 가라앉지 않는다. 여기서 알렉산드리아는 로이를 구원하지 않았다. 로이와는 다르게 아이에겐 살아가야 할 이유가 많았다. 얼음장수가 병원으로 배달하는 얼음 조각의 맛, 외국어를 거짓말로 통역하는 재미, 미사 중인 신부에게 몰래 던지는 오렌지, 그리고 소중한 것들을 모아둔 나무 상자처럼 말이다. 로이는 알렉산드리아의 때묻지 않은 세상을 부러워했을지도 모른다. 오렌지처럼 시고 단 아이의 생기를 동경하고 또 지켜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로이는 알렉산드리아의 이야기를 지켜주기로 마음 먹었고 이 마음이 그를 두 번째 추락으로부터 구원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호기심과 이타심이 로이의 비극에 스며들며 비로소 그의 환상 문학이 완성되었고, 그렇게 환상인 채로 종결되었다.
로이와 알렉산드리아의 대서사시는 단순한 영웅물이 아니다. 그들의 즉흥적인 이야기는 산업 구조 속에서 탈락된 노동자의 초상을 비춘다. 로이의 사건은 한 개인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넘어서서 1920년대 할리우드 산업의 착취 구조 속에서 소외된 스턴트 배우의 존재를 소환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로이와 같은 수많은 스턴트 배우들은 조명되는 이름 없이 떨어지고, 다치고, 사라졌다. 로이의 추락 또한 이러한 구조를 반영하며, 영화는 이 구조를 살짝 비틀어 완벽에 가까운 완성도와 시각적인 아름다움으로 감쪽같이 포장한다. 그 누구도 스턴트맨의 정면 생김새를 모르듯이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