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독자 여러분. 이대학보입니다.

개강을 맞이한 지도 어느덧 한 달이 지났습니다. 새로운 학기와 시간표에 적응하느라 유난히 피로한 시기입니다. 여기에 변덕스러운 날씨까지 더해지니 몸도 마음도 쉽게 지치는 것 같습니다. 유독 힘든 날 커피 한 잔으로 버텨보려 하지만, 때로는 웃음이 더 큰 에너지를 줄 때가 있습니다. 반복되는 일상이 따분한 날이면 저는 휴대전화를 열어 웃긴 영상들을 찾아 헤매곤 합니다. 마침내 코드를 저격하는 영상을 발견하고, 무감했던 표정에 웃음이 감돌 때 피로가 해소되는 기분이 듭니다. 오랜 침묵을 깨고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가 귀에 닿는 순간, 비로소 살아있다는 감각이 되살아납니다. 이렇듯 웃음에는 때로 진한 아메리카노보다도 강력한 숨통을 틔우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특유의 해학적 정서가 있습니다. 힘든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태도, 비극을 유머로 승화하는 문화는 한국 사회를 지탱해 온 정신적 자산입니다. 해(諧)는 화합을, 학(謔)은 희롱을 뜻하는데, 이 두 글자가 합쳐진 ‘해학’이라는 단어에는 공동체 사회를 위한 화합과 부조리한 권력에 대한 희롱이 함께 담겨있습니다. 희롱하면서도 화합을 추구하기에 해학은 적대적인 감정보다는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웃픈(웃기지만 슬픈) 상황을 공유하며 서로 위로하는 것 역시 우리 사회의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웃음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 고난을 견디고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 돼 왔습니다. 과거 민속극에서부터 현대의 대중문화까지, 우리는 웃음으로 눈물을 닦으며 연대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 힘은 여전히 유효한 듯합니다.

이렇듯 해학은 단순한 유머가 아니라 생존의 방식이었습니다. 특히 오늘날 그 정신을 계승하는 현대적 사례가 바로 스탠드업 코미디입니다. 이번 호에는 해학적 정서를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스탠드업 코미디언 고은별씨의 인터뷰를 담았습니다. 고씨는 여성의 관점에서 유머를 풀어내며 ‘여자는 웃어주는 존재’라는 편견에 맞서 ‘웃기는 여자’가 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지난 2월 동덕여대 재학생 연합이 주최한 시위에서 스탠드업 코미디 공연을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유머가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사회적 연대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그의 활동은 웃음의 역할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합니다. 마이크를 쥔 여성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세상을 비틀어 볼 수 있는 힘을 가지는 순간, 유머는 단순한 즐거움을 넘어 저항의 언어가 됩니다.

개인의 유머 감각은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그 사람의 세계를 비추는 창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소비하는 유머에 너무 깊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저 가볍게 웃고 넘기는 영상 속에서 철학을 찾으려는 시도는 과한 해석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웃는 장면 속에는 각자의 경험과 가치관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같은 장면에서 웃고, 또 어떤 사람은 전혀 웃지 않습니다. 개인이 ‘웃기다’고 느끼는 것들을 모으면, 하나의 사회가 공유하는 정서와 가치를 엿볼 수도 있습니다. 유머는 사람을 웃게 만들지만, 때로는 불편함을 주기도 합니다. 같은 농담이라도 누군가에게는 즐거움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차별과 배제의 경험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웃음이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떤 유머가 바람직한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에 웃고 무엇에 불편함을 느끼는지 돌아보는 것은 결국 더 나은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일지도 모릅니다. 함께 웃는 순간이 많을수록 관계가 돈독해지기도 하지만, 불편한 유머는 오히려 사이를 멀어지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 차이를 마주할 때 우리는 관계를 다시 바라보게 됩니다.

유머는 그 자체로 관계를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말 한마디에 울고 웃는 우리의 인생 속에서 오늘 하루 무엇에 웃으셨나요? 오늘 나의 말들로 몇 사람을 웃겼는가요, 또는 울렸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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