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 스탠드업 코미디언 고은별 인터뷰
여자들 삶이 편하다는 남자들이 있는데, 그러면 지금부터 모든 일자리를 다 여자들이 차지하고 남자들은 그냥 편하게 집에 있으면 돼요. 원하던 거잖아요? 그중에 결혼하고 싶은 여자들은 무조건 하향 결혼을 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남자들은 원하던 상향 결혼을 할 수 있겠죠. 그런데 결혼할 여자 수가 부족해요. 왜냐하면 남자만 많이 태어나고 여자가 못 태어나서요. 아, 그러면 어떡해. 남자가 안 태어나면 되겠네요!”
페미니스트이자 스탠드업 코미디언 고은별(경영·13년졸)씨는 얌전히 굴어야만 했던 결핍을 원동력 삼아, 억눌렸던 말들을 쏟아내기 위해 무대에 오른다. 스탠드업 코미디는 코미디언 한 명이 무대에 올라 마이크 하나만으로 관객을 웃기는 공연 장르다. 좌중을 자신에게 주목시키고 웃음을 만들어내야 하는 스탠드업 코미디 무대는 여성 코미디언들에게는 해방의 장소이다. ‘여자는 항상 웃어야 한다’며 웃음을 강요당하고, ‘여자들은 안 웃기다’는 편견에 조용해야만 했던 여성들이 당당히 남을 웃기고 자신 있게 망가질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여성에게 허용되지 않았던 무대 위에서 여성의 관점으로 마이크를 쥐고 세상에 대항하는 사람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 농담은 웃기지 않습니다
고씨는 여성으로 살아가며 느낀 많은 의문이 그를 페미니스트의 길로 이끌었다고 말한다. 2006년, 우리대학에 입학한 고씨는 대학 내외에서 ‘된장녀’, ‘김치녀’ 등의 원색적인 여성혐오 표현을 마주했다. 당시 그는 젊은 여성에게 쏟아진 편견과 멸시에 자신이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질감을 느꼈다. 그러나 ‘이화여대에 다니고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는 나’와 ‘된장녀’ 사이의 간격을 설명할 적절한 말을 찾지 못했고, 터무니없는 여성혐오에 대응할 방법에 대한 궁금증은 쌓여가기만 했다. 2015년 온라인을 중심으로 페미니즘 담론이 활성화된 ‘페미니즘 리부트’를 겪으며 여성혐오와 페미니즘 이슈를 접한 고씨는 풀리지 않던 답답함의 실마리를 찾았다. 그는 ‘김치녀’를 ‘한남충’으로 바꿔, 혐오를 그대로 반사해 남성 권력을 조롱하고 희화화해 여성혐오를 되갚아주는 ‘미러링’을 알게 됐다. 이를 통해 유쾌한척하며 유머라는 가면을 쓰고 숨어있던 여성혐오를 발견했다. 고씨는 여성혐오 단어가 미러링을 거쳐 남성을 향하자마자 반향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단어 하나만 바꿨는데 직관적으로 여성혐오적인 상황이 이해됐다”고 말했다. 유머 속 숨겨진 권력과 위계를 목격한순간이었다.
고씨는 개그에 여성혐오가 허다하게 사용되는 상황을 보며 ‘다른 개그’의 가능성을 고민했다. 그가 자주 시청하던 미국의 스탠드업 코미디쇼에서도 여성혐오는 개그 소재였다. 인종차별을 비판하는 흑인 남성 코미디언들조차 여성혐오를 일삼는 것을 보며, 고씨는‘내가 그렇게 웃긴 사람은 아닌데, 저 조크보다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오기가 생겼다. 새로운 유머의 가능성을 꿈꾸던 그는 남성 중심 코미디계에서 최초로 생긴 여성 스탠드업코미디 크루 ‘블러디퍼니’의 공연을 보고 그들의 팬이 됐다. 이후 블러디퍼니에서 주최한 여성만이 설 수 있는 ‘오픈 마이크’의 지원자로 무대에 올랐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블러디퍼니’의 일원이 됐다.
망가지기, 실패하기, 그리고 웃기
한국 사회에서 ‘웃어 주는 여자’가 아닌 ‘웃기는 여자’로 살아가는 것은 녹록지 않은 일이었다. 남성 중심의 스탠드업 코미디계에서 그는 후발주자일 수밖에 없었다. 여성의 수가 절대적으로 적었고, 남성 문화가 지배적이었던 공간에서 자신의 무대를 마음껏 펼치기도 어려웠다. 평범한 남성이 남성들의 카르텔을 통해 쉽게 좋은 기회를 얻는 것을 보며 위축되기도 했고, ‘우스꽝스러운 여자’가 됐을 때 함부로 대하는 주변의 태도가 두렵기도 했다. 스탠드업 코미디의 남성 중심 크루에 속한 후 인정을 받았지만, 엇나가지 않으려 눈치를 봤다. 그는 ‘(이곳이) 더 메이저 씬이지만, 나에게 필요한 환경과 무대가 없으니 내가 그런 무대를 더 많이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했고, 이는여성 스탠드업 코미디언의 무대를 넓히기 위한 시도로 이어졌다.
그는 ‘블러디퍼니’의 일원으로 여성 관객들이 대다수인 공간과 여성들만 서는 무대에서 비로소 편안함을 느낀다. 페미니즘에 대한 공감대가 있는 사람끼리는 서로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어 관련 코미디를 시도해 볼 수 있고 실패해도 괜찮다는 안정감이 있다. 남의 시선에 얽매여 옴짝달싹 못 하다가 무대 위에서 하고 싶은 대로 펼치고 나면 그 뒤에 엄청난 해방감이 있다. 그 즐거움은 계속해서 무대를 오르는 원동력이다. 그는 “(여성 코미디언들이) 공격받지 않으면서 성장할 기회가 필요하다”며, “이들이 시도할 수 있는 환경과 무대를 만드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세상을 유쾌하고 날카롭게 읽어내는 유머의 힘
유머는 어떤 대상을 어떤 방식으로 말하느냐가 핵심인 만큼, 유머 발화자의 관점이 중요하다. 청자의 관점에 따라 웃는 사람이 달라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여성혐오적 유머에 여성들이 웃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고씨는 유머라는 새로운 도구로 그동안 여성이 배제됐던 유머의 힘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한다. 유머는 직관적이고 파급력이 강해 빠르게 교집합을 형성할 수 있는 효과적인 도구다. 그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신념을 가질 수 없고 조용히 매력적인 존재로만 있어야 했던 여성들에게 유머가 허락되지 않았다고 본다. 그는 “여자는 잘 웃어주면 돼”, “남자는 웃기는게 매력이야”라는 웃음에 대한 흔한 관용구를 언급하며, ‘웃기지 못했던’ 여성들에 대해 말했다. 고씨는 여성의 관점에서 나온 유머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을 넓히고 싶다는 마음으로 다양한 무대에 오르고 있다. 기후 위기를 주제로한 국제 앰네스티 주최의 행사에서 공연을 펼쳤고, ‘블러디퍼니’의 정기 공연 외에도 여성의 유머를 들고 사람들 앞에 서고 있다.
고씨는 “삶은 분노로만 지속할 수 없다”며, 우리에게 유머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분노 대신 웃음으로 연대하는 그는 지난 2월9일 동덕여대 재학생연합이 주최한 ‘민주동덕에 봄은 오는가’ 시위에서 스탠드업 코미디로 연대 공연에 서기도 했다. 투쟁의 현장에서 사람들에게 힘이 되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웃음으로 연대하는 것에 대해 “분노는 큰 힘이지만, 오래갈 수 없다”며, “싸움 후에 장작은 재가 되지만, 우리는 장작이 아니라 인간”이기에 분노로 소진되지 않도록 다른 방식의 투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인터뷰 중에도 농담을 던지며 유쾌한 분위기를 만들었던 그는 “싸우고 투쟁도 해야 하지만, 동시에 즐겁게 살아갔으면 좋겠다”며 일상 속 웃음과 농담의 힘을 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