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근처 뒷산 초입에서 바라본 밤하늘. <strong>하영은 선임기자
집 근처 뒷산 초입에서 바라본 밤하늘. 하영은 선임기자

도무지 잠들기 어려운 일요일 밤이었다. 꽤 마음 쓰고 있는 칼럼 마감도 다가온다. 지정 시간표가 있어 매일 수업에 가야 하고, 칼럼 소재를 찾으러 훌쩍 떠날 수도 없다. 이번 주는 무엇을 쓸까, 생각에 꼬리를 물다 보니 근원적인 물음까지 다가간다. 나는 왜 누구나 매일 하는 잠조차 들기 어려운 걸까. 중학생 때부터 이어져 온 불안정한 수면 습관 덕에 야간 사건사고 제보받는 일을 1년간 할 수 있었지만, 모처럼 안정적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싶은 일본에서까지 밤새우고 싶지 않았다. 새벽 5시, 겨우 눈을 감았다.

월요일. 여느 날과 다름없이 아침에는 도시락을 싸서 자전거를 끌고 학교로 향한다. 왠지 ‘일본’과 어울리는 생활이다. 일본에 온 걸 계기로 매일 실천하려 노력 중인 습관이다. 처음 뵙는 선생님께 내 이름 ‘하영은’을 여러 방법으로 알려드린다. 발음상 ‘용운’에 가깝고, 한자 ‘英恩’(영은)을 일본어로 ‘えいおん’(에ː온)이라고 불러도 된다고 일주일간 매 수업에서 열심히 설명한다. 결국 선생님께서는 ‘ハさん’(하 씨)라고 부르기로 하셨지만. 수업이 끝나고는 부실(동아리방)에 찾아가 동아리 가입을 요청했다. 긴장한 것치고 원하는 동아리에 들어갈 수 있었다.

빠짐없이 완수한 날이다. 아니, 뭔가 부족하다. 이유 모를 공허함을 채우려 학교에서 도보로 13분 거리에 있는 노래방에 갔다. 돌아가는 길, 평소 하굣길보다 먼 곳에서 출발하는 터라 구글 지도 앱을 켜서 길을 찾으려 했다. 웬걸 아무리 기다려도 작동하지 않는다. 가끔 있는 오류다. 그래, 오늘은 길을 잃을 날이구나. 교토는 생각보다 일찍 어두워지는 곳이다. 대학교 근처임에도 오후6시 이후면 대체로 건물이 비슷한 주거지 가로등에 의존해야 한다. 방향감각을 믿었지만 알 수 없는 길이 나오던 차, 큰길 쪽에서 란덴 열차 접근 경보음이 들렸다. 학교 근처부터 집 근처까지 지상으로 철로가 이어져 있어 좋은 길잡이가 됐다.

사실 길 잃는 상황을 반기는 편이다. 정확히는 헤매는 게 좋다. 이렇게 말했더니 종종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릴 적부터 유구했다. 5살쯤 스키장의 미아보호소에 간 적도, 9살에는 밤중 이모네 아파트 단지에서 멀뚱하게 있던 적도, 중학생 때 모르는 번호의 버스를 타고 처음 가는 마을을 한 바퀴 돌아 종점 터미널까지 간 적도 있다. 물론 전부 의도했던 건 아니다. 운 좋게도, 그럴 때마다 늘 제자리를 찾았다. 덕분에 모든 길은 이어져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새로운 곳에 머물게 되거나 여행을 가면 그 주변을 정처 없이 걷는 게 어느새 루틴이 됐다.

적어도 나는, 길을 잃으면 예민한 생각을 잠재울 수 있다. 그래서 길을 잃고자 할 때면 스마트폰에 의존하고 싶지 않다. 감각을 민감하게 사용해야 하고, 내면의 고민 따위 할 겨를이 없다. 그러다 결국 아는 길이나 건물이 나오면 그때의 안도감은 또 한 번 마음을 가라앉힌다. 다음에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의 용기는 덤이다. 모르는 곳과 아는 곳이 연결된다. 마치 머릿속에서 지도 퍼즐을 맞추는 것만 같다.

길을 잃는 것은 곧 새로운 길을 만나는 것이다. 목적지를 설정하고 최단 거리를 찾는 건 누구나 경험하는 일이다. 경로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불안해지는 사람도 있을 거다. 사람마다 문제 해결 방법은 다르니 길 잃는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으려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틀린 길’은 없다. 어느 정도여야 길을 잃었다고 표현할 수 있을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갑자기 모르는 길을 마주하면 일단 어떻게 여기에 도달했는지 추측해 보라. 길 ‘찾기’는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더듬더듬 걷다 보면 지도 앱이 추천해 주는 길만으로는 알 수 없는, 새로운 장소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바로 옆에 있어도 가보지 않고서 모르고 지나치는 곳이 얼마나 많은가. 이렇게 내 길을 넓혀 두면 마음 둘 곳이 늘어난다.

인생도 줄곧 ‘길’(路)로 비유된다. 인생은 한 번뿐, 하나뿐인 길을 방황하지 않으려고 줄곧 노력한다. 방향을 잘 찾아 진로(進路)를 정하고, 삶의 경로(徑路)를 따라 목적지에 도달하려 한다. 앞선 사람들이 잘 닦아 둔, 보장된 길을 걷는 게 마음 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던가. 가장 빠른 길을 머리로 알고 있어도 결국 끌리는 길을 택하게 된다. 무사히 길을 찾은 그날 밤, 하늘을 올려다봤다. 별을 만나려면 더 어두운 길을 찾아 들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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