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걸음만 빨라지는 여성안심귀갓길
제도 취지 반영 못해

여성안심귀갓길은 여성 대상 범죄 예방과 안전한 귀가를 위해 조성됐지만, ‘안심귀갓길’이라는 이름에도 불구하고 밤길은 여전히 두려움의 공간이다.

 

여성안심귀갓길, 불안은 그대로

현실은 제도의 취지를 적절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대학 후문에서 도보 10분 거리인 봉원사길은 큰길에서 벗어나면 조도가 급격히 낮아진다. 봉원사길 원룸에서 살고 있는 앵두(가명)씨는 “골목 안쪽은 가로등이 촘촘하지 않다”고 했다. 앵두씨의 거주지 주변은 어두운 골목이 많고 불법 주차 차량이 많아 시야 확보가 어렵다. 그는 주변이 어두워 사람이 서 있어도 못 보고 지나갈 때가 많아서 무섭다며 “자취 초반에는 일부러 해가 뜰 때까지 기다렸다가 간 적도 있다”고 회상했다.

신촌에 거주하는 이서연(가명·커 미·22)씨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2024년 이씨의 집 근처에서 발생한 묻지마 폭행 사건 이후 부모님의 불안은 더 커졌다. 이씨는 “작년엔 부모님이 호신용 스프레이를 집으로 보내주시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거주지 주변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솔라라이트가 설치돼 있어 밤에도 비교적 밝지만, 안심이 되지는 않는다. 그는 어둡진 않아도 사람 때문에 무서운 것 같다며 “위협감을 주는 사람이 있으면 주변을 한 바퀴 더 돌거나 딴청을 피우면서 늦게 들어가기도 한다” 고 했다.

이서연(가명)씨는 밤길을 걸을 때면 부모님이 보낸 호신용품을 들고 다닌다.
이서연(가명)씨는 밤길을 걸을 때면 부모님이 보낸 호신용품을 들고 다닌다.

우리대학 앞 럭키아파트 근처에 거주하는 장정윤(커미·23)씨는 귀갓길에 인적이 드물고 상점이 없어, 위험한 경우 도움을 청할 곳이 없다고 느낀다.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혼자) 걸어 올라오는 경우가 잦은데, 그럴 때 많이 무섭다”고 덧붙였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남동생은 장씨와 달리 늦은 시간에도 거리낌 없이 길거리를 오간다. 그는 젠더에 따라 체감하는 환경이 다르다는 걸 느낀 이후 오히려 체념하게 된 것 같다며 무력감을 토로했다.

행정안전부에서 제공하는 지역안전 등급에 따르면 서대문구의 범죄 지수는 1~5등급 중 2등급에 해당하지만, 서대문구에 거주하는 여성들은 불안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대학 학생들은 ‘안심귀갓길’ 명목으로 설치된 CCTV 등 치안 시설물이 보행자를 실질적으로 안심시키지 못한다고 입을 모았다. 강미선 교수(건축학과)는 CCTV는 범인 추적과 검거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본질적인 ‘안전감’을 주지는 못한다고 비판하며 “‘안전’과 ‘안심’이라는 용어를 구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현재 도시의 범죄 예방 전략이 기술적 감시 중심의 ‘안전’에 초점을 두고 있다고 했다. 객관적인 범죄 통계가 낮아도 심리적 불안도가 높다면 여성이 안심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고려대 이경훈 명예교수(건축학과)는 CCTV는 사후 조치에 가깝다고 분석했다. 그는 “수상한 장면이 포착되더라도 인력이 부족한 관제 센터 여건상 즉각적인 대응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기기 설치는 객관적 기준 없이 추진되는 경우가 많아, 중복 설치되거나 엉뚱한 곳을 비추는 사례가 많다”며 정책의 허점을 짚었다. 서강대 류지현 박사(미디어문화연구 전공) 역시 “여성이 여전히 특정 경로를 회피한다면 실질적 안전이 아니라 통계적 안전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단순 범죄율 하락에 목표를 두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 도시 공간을 더 자유롭고 평등하게 사용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여성안심귀갓길의 성공 여부를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성 권리 없는 도시의 구조적 모순

주거지 밀집 지역에 설치된 스마트 보안등 안내문.
주거지 밀집 지역에 설치된 스마트 보안등 안내문.

여성안심귀갓길은 실제 여성들의 동선을 반영하지 못한다. 신촌역 뒤 연세로2길은 여성안심귀갓길로 지정돼 있다. 서대문경찰서에 따르면 보통 주거지 근처 여성 유동 인구가 많은 곳을 여성안심귀갓길로 지정하지만, 해당 길에는 주거지보다 숙박업소가 다수 분포한다. 이 교수는 연세로2길은 실질적으로 주거 밀집지와 교통수단을 연결하는 길로 볼 수 없다고 분석했다. “여기가 안심귀갓길이라고 해 도 누가 여기로 귀가 하겠어요?”

류 박사는 여성안심귀갓길의 구조적 모순을 지적했다. 그는 이런 조치가 안전을 보장한다는 취지에서 비롯됐지만, 도리어 여성의 이동권을 제약할 위험이 있다고 설명했다. 여성의 이동을 특정한 공간으로 제한해, 그 외의 길은 적합하지 않다는 젠더 차별적 인식을 강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남성을 공적 공간의 보편적인 존재로 상정하고 여성을 특수한 장소에 밀어 넣는 분리주의적 접근”이라며, 남성과 물리적으로 구별된 여성은 늘 피해자의 위치에 머무르게 된다고 비판했다.

영국의 여성 이동권 운동가도 여성의 이동 경로를 획일화하는 현 정책에 의문을 제기했다. ‘밤을 되찾자(Reclaim the Night)’ 시위의 공동 주최자 알 가스웨이트(Al Garthwaite)씨는 한국의 여성안심귀갓길에 대해 “제한을 가하는 일이고, 그런 식이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여성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특정 경로만이 아니라, 모든 경로를 안전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안심귀갓길은 여성이 다니는 길임을 알리는 것과 같기 때문에, 혼자 다니는 여성을 노리는 범죄도 발생할 수 있다고 봤다. ‘밤을 되찾자’ 시위는 1970년대에 시작된 영국 여성해방운동의 일환이다.

류 박사는 현재 도시 구조가 제도 및 물리적인 차원에서 여성의 권리를 충분히 보장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근대 도시 공간은 오랜 기간 남성을 기준으로 설계돼 왔기 때문이다. 그는 안전한 귀가는 인간의 기본권이지만, 여성은 일상에서 많은 제약을 경험하며 이동 자체에 대한 불안을 학습한다고 설명했다. 장씨는 밤길을 걸을 때 사람이 있으면 어떤 일이 생겼을 때 어디로 뛰어야 하고, 어떻게 신고해야 하는지 늘 시뮬레이션을 돌린다. 귀갓길 내내 경계 태세를 갖추는 건 “답답하고 체력 소모가 큰 일”이다. 그는 “계속 주변을 경계하는 내가 미어캣 같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강 교수는 여성이 배제된 도시 정책에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는 서울시에서 실시하고 있는 도심 내 녹지 조성 사업이 여성에게 위험할 수 있다고 말했다. 녹지는 야간에 외부 시선 노출을 차단해 위험에 대처하기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는 정책 결정 과정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사라지고 있다며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남성이기 때문에 여성의 불안에 대한 경험이 없다”고 지적했다.

장정윤씨는 거주지 근처 여성안심귀갓길이 어디인지 아냐는 질문에 “아예 모른다”고 답했다.
장정윤씨는 거주지 근처 여성안심귀갓길이 어디인지 아냐는 질문에 “아예 모른다”고 답했다.

밤길은 물리적 장벽 없이도 여성의 접근을 제한한다. 장씨는 귀갓길 불안감 때문에 늦은 밤에 끝나는 일정은 되도록 만들지 않는다. 이 교수는 “특정 장소나 시간에 활동을 기피하는 것은 여성의 이동을 제약할 뿐 아니라 교육과 취업의 기회 박탈로 이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동권이 보장돼야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느슨한 공동체가 주관적 안전감 높여

전문가들은  신뢰할 수 있는 공동체가 밤길의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전문가들은 신뢰할 수 있는 공동체가 밤길의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다고 말한다.

CPTED(범죄예방환경설계) 전문가들은 밤길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신뢰할 수 있는 공동체를 구축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서대문구에는 대학이 다수 위치해 있어 많은 외부 지역 학생이 유입된다. 서대문구의회 김규진 구의원은 느슨한 동네 네트워크가 위험 상황에서 서로를 돕는 신뢰 관계가 된다고 말했다. 가구로서는 1인이지만, 모이면 공동체가 된다는 것이다. 이 교수도 지역 사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동네 사람들이 나를 구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으면 불안감이 훨씬 덜하고, 그런 믿음이 없으면 불안감은 증폭된다”고 했다. 강 교수 역시 느슨한 공동체가 사회적 시선에 노출되는 공간을 만들어 안전감을 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밤늦게까지 불을 밝히는 건물 저층부의 편의점 등은 점원과 손님들이 지속적으로 왕래하기 때문에 거리의 세이프티 스테이션(Safety Station)으로 작용해 주관적 안전감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여성에게 안전한 도시란 결국 ‘어디에서나 환대받을 수 있는 공동체’ 라고 역설했다. 류 박사는 여성의 안전을 특수 집단의 요구로 환원하지 않고 도시 시민권의 기본 조건으로 재정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성의 자유로운 이동이 도시의 기본 조건으로 인식될 때 비로소 도시가 안심할 수 있는 공간이 된다는 것이다. 가스웨이트씨는 정부 차원에서 여성의 안전을 항상 보장하기 위한 정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전했다. ‘밤을 되찾자’ 시위의 경험처럼, 여성들이 함께 두려움에 맞서고 행동하면 혼자 집에 앉아 있을 때보다 더 큰 힘을 느끼게 된다고도 강조했다. “그리고 우리는 정말로 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마음껏 외출할 수 있을 거예요.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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