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가 뉴스가 되는 시대에서 '여성 리더'가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는 시대로
서울대 권오남 수학교육과 교수(수교·83년졸)가 아시아 여성 최초로 세계수학교육심리학회 회장직에 올랐다. 세계수학교육심리학회(PME)는 세계 수학교육 분야에서 가장 권위 높은 학회로, 인정받는 수학교육 이론과 실천을 아우르며 전 세계 학자들이 활발히 교류하는 학술 공동체다. 지난 9일 서울대 수학교육과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권 교수는 정해진 답만을 쫓던 중고등학생 시절을 지나, 우리대학에서 수학을 배우며 참을 증명하는 과정에서 수학의 본질을 배웠다. 권 교수는 “‘◆대각선 논법’이라는 걸 처음 접했을 때, (증명이) 너무 아름다워서 뿅 갔어요”라며 “대각선 논법을 통해 무한에도 크기가 다르다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납득하게 됐고, 단순한 아이디어를 통해 깊이 있는 정리를 이끌어내는 과정에 전율이 일었다”고 말했다. 이때 그는 수학을 업으로 삼아야겠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는 대각선 논법을 설명하는 순간에도 수학을 향한 특유의 열정과 애정을 드러내며, 진정한 수학 애호가 같은 면모를 보여줬다.
권 교수는 학생이 중심이 되는 ‘플립드 러닝(Flipped Learning)’ 교육 방식을 대학 수학 과목인 미분방정식에 도입했다. 이 학습법의 핵심은 학생의 역할 변화이다. 기존에는 교실에서 교사가 개념을 설명하고 집에서 학생이 문제를 푸는 구조로 수업이 진행됐다면, 플립드 러닝은 그 순서를 뒤집는다. 학생의 역할이 기존의 수동적인 지식 수용자에서 벗어나, 능동적으로 사고하고 질문하는 탐구자로 전환되는 것이다. 권 교수는 “수학의 목적은 정답을 빠르게 찾는 것이 아니라, 좋은 질문을 던질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라며, 한국 수학 입시 역시 이를 목표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권 교수의 소신은 PME에서도 빛을 발했다.
권 교수는 PME 회장으로 선출된 과정을 회고하며, 처음 PME에 참여한 2001년도 당시를 떠올렸다. 그는 “다음 회의에서 내 논문이 승인돼 발표됐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목표로 PME를 참여했다. 권 교수는 PME 이사로 활동하며 국제 학회의 운영 방향과 정책을 결정하는 논의에 참여했으며, 학술대회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논문 심사 과정을 관리했다. 그 발자취들은 PME 회장이라는 자리까지 이어졌다.이사진에게 ‘O.N Kwon이 PME의 회장에 출마해 보는 것이 어때요?’라는 문자를 받은 권 교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선거를 앞두고 자신을 각인시키기 위해 선거 홍보 영상에서 입었던 옷을 6일 동안 반복해서 입고 뉴질랜드에서 열린 PME 학회에 참석했다.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학회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60개국의 사람들과 논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적극적으로 질문을 던지며 존재감을 드러냈어요” 권 교수의 성실하고 열정적인 태도는 회장 당선이라는 결실로 이어졌다.
PME 회장으로서 권 교수는 서양의 교육 방식이 지배적인 학회 분위기를 적극적으로 개선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강조돼 온 체계적 반복 학습, 라틴 아메리카에서 발전한 비판적 수학교육, 아프리카의 공동체 기반 학습 등 각 국가가 지닌 교육 방법과 지혜를 글로벌 담론으로 끌어올리는 데 힘쓰겠다고 말했다. 이를 통해 학문적 다양성과 포용성을 확대하겠다고 덧붙였다. 권 교수는 “앞으로 아프리카에서도, 라틴 아메리카에서도 ‘권오남’처럼 소수자가 회장으로 선출되는 사례가 이어지길 바란다”고 전했다.
여전히 사회적 장벽은 여성 리더의 성장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2025 한국의 여성과학기술인 현황진단’에서 최근 이공계 여성 졸업생 비율은 남성과 거의 동일한 수준에 도달했지만, 박사 과정에 진학하는 여성의 비율은 오히려 감소하고 있다. 권 교수는 경력 단절과 유리천장이 박사 과정 진학률 저하에 영향을 미친다고 분석했다. 또한 여성을 차별하는 구조는 한국에만 국한되지 않고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문제임을 강조했다. 그는 여전히 이공계 분야에서 여성에게 기대하는 수준이 남성에 비해 낮고, 육아나 결혼은 학문적 지속성을 저해하는 요인임을 지적했다.
권 교수는 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도 역임하며 ‘최초가 최후에서 끝나지 않도록’ 과학기술계의 구조적 변화를 꾀하고 있다. “지금도 여학생이 공대에 가는 것에 편견이 있지만, 내가 학생이던 70, 80년대에는 더 극심했었다”며, “‘여자가 무슨 과학을 하냐, 여자가 무슨 수학을 하냐’ 이런 말들을 밥 먹듯이 들었었다”고 답했다. 그러나 우리대학에 다니며 ‘여성’이라서 불가능하다는 제약은 탈피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과학기술계 여성 후배들의 존재 자체가 변화의 증거라며 따뜻한 격려를 전했다. 이어 “어려움은 개인의 한계가 아닌 시스템의 문제”라며, 자책보다는 건설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고 어디에서든 목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이어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되, 다른 사람들도 함께 갈 수 있는 문을 열어두는 리더십을 발휘하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대각선 이론 : 실수 집합의 크기가 자연수 집합의 크기와 같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 칸투어 이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