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최초 국제철학연맹 회장 김혜숙 전(前) 총장 인터뷰

김혜숙 회장은 “여성, 그중에서도 동아시아 여성들의 삶이 반영된 새로운 여성주의 철학을 구축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진유경 사진기자
김혜숙 회장은 “여성, 그중에서도 동아시아 여성들의 삶이 반영된 새로운 여성주의 철학을 구축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진유경 사진기자

서양 철학 전공자로서 음양론이라는 지극히 동양적인 철학을 연구하던 동양인 여성이 세계적인 철학 기구의 대표가 됐다. 우리대학 16대 총장을 역임한 김혜숙 명예교수(철학과)가 아시아 최초로 국제철학연맹 26대 회장으로 선출됐다. 1948년 국제철학연맹 설립 이후 77년 만이며 여성으로서는 1998년 튀르키예 출신 이오아나 쿠추라디 회장 이후 두 번째다. 철학 분야 세계 최소 비정부 국제기 구인 국제철학연맹은 5년마다 세계철학자대회를 주최하며 철학자들의 관계 증진과 사회 기여를 지원한다. 1월15일, 인터뷰를 위해 찾아간 철학 서적이 가득했던 그의 연구실은 철학적 담론이 오가는 공간이었다.

 

아시아 최초로 국제철학연맹 회장으로 선출된 의의는

이사로 속해있던 국제여성철학회의 추천을 받아 후보로 출마했다. 회장 선출을 위한 1차 투표에서 과반의 지지 를 받아 2차 투표 없이 선출됐다. 전통적으로 철학은 여성 친화적이지 않은 학문으로 여겨졌지만, 최근 젠더 문제가 세계적인 이슈로 떠오르면서 공감대가 많이 형성된 상황이었던 점도 작용했던 것 같다. 더 이상 여성주의 철학과 젠더 문제가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논의의 영역으로 자리 잡았다고 생각한다.

 

여성 철학자로서 ‘철학’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철학은 텍스트 자체가 ‘자유인’, 즉 남성들의 삶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여성 철학자로서 철학을 공부하다 보면 소외감을 느낄 때가 많다. 서적 속 문자 중심의 역사도 중요하지만 여성의 삶은 그 흐름에서 배제됐기에 많은 여성 철학자는 철학 역사를 새롭게 써야 한다고 주장해 왔고, 그 결과 여성 철학이 탄생했다.

과거에는 여성의 삶을 지배했던 헌신이나 윤리적 결단과 같은 요소들이 열등한 소질로 여겨지곤 했다. 이러한 기존 철학에 대한 비판을 바탕으로 새로운 이론과 실천을 구축하려는 시도가 여성 철학이다. 나의 경우, 특히 동아시아 여성들의 경험을 반영하고 음양론을 기반으로 한 여성주의 철학을 구축하려 노력하고 있다.

 

여성주의 철학이 제기할 수 있는 의제는

여성주의 철학은 지금껏 배제됐던 여성의 삶을 포괄한다. 예를 들어, 전통적으로 남성 철학자들이 정의론, 즉 ‘무엇이 정의로운 것인가’를 논할 때 가정은 배제됐다. 가정은 사랑을 기반으로 한 사적 공간이기에 정의 개념을 적용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성 철학자들은 가정 내 폭력, 법제와 관행, 문화도 정의의 관점에서 조명되어야 한다고 반박한다.

성(性) 또한 철학에서 논의되지 않은 의제 중 하나다. 남성은 성적 욕구가 억압됐다는 인식을 크게 가지지 않았던 반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성들은 성적 억압을 가장 먼저 경험해야 했다. 비가시화됐던 가정과 성, 욕망, 감정, 억압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의제화하는 것이 여성주의 철학의 주요한 역할이 될 수 있다.

 

아시아 여성 회장의 선출을 동양 철학의 위상 변화로도 볼 수 있는가

그렇다. 동양 철학은 서양 철학과 달리 자신에 대한 성찰과 인간 삶 안의 실천에 대한 이론적 탐구에 집중해 왔 다. 서양 철학은 본래 사유 방법론에 집중하면서 ‘모든 것에 대한 이론(Theory of Everything)’을 제시했지만, 근 대로 넘어오며 자연과학 신학, 정치학, 심리학 등이 철학에서 분리되며 철학의 이론 영역이 줄어들었다. 그 결과, 현대 철학은 동양 철학이 계속해 오던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과 인간 삶에 대한 근원적 질문에 집중하게 됐다. 인간에 대한 탐구를 계속해 온 동양 철학은 서구 철학이 지닌 한계를 보완할 수 있게 됐고, 비슷한 시기에 동양 철학서가 번역되며 서양에서도 많이 읽히기 시작한 점 또한 동아시아 철학의 확장에 영향을 미쳤다.

 

철학을 일상과 동떨어진, 어렵고 추상적인 학문이라 생각하 는 사람들에게

철학은 ‘나란 무엇인가’ , ‘객관적 지식이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와 같은 문제를 다루는 개념적 작업이다. 서양 철학에서 중요한 것은 논리이며 이에 대한 사유는 뼈대가 된다. 추상적 사고를 통해 우리는 주체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다. 현대 사회는 과거에 비해 더 복잡하며, 다양한 문제를 마주하고 있다. 넘쳐나는 정보 속에서 질문하는 능력이 중요해졌기에, 더욱 철학이 중요해진 때다.

 

저서 ‘여성 관점, 사유의 새로운 시작’에서 혐오가 깊어지는 사회를 우려했다. 혐오가 깊어지는 현대 사회에서 철학의 역할은

고정관념이 강할수록 이에 부합하지 않은 사람에 대한 혐오는 커진다. 도덕적 자기 확신이 강할수록 혐오는 강하게 표출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혐오는 역으로 이용할 수 있다. 즉 혐오의 이면에 놓인 도덕적 의식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다. ‘더러운 것을 만지지 말라’는 식으로 우리는 혐오를 가르치기도 한다. 혐오 감정에 대한 성찰을 통해 도덕적 성장을 이룰 수도 있는 것이다.

더불어 우리는 인간 존재와 삶의 우연성에 주목해야 한다. 여자로 태어났거나 가난하게 태어난 것, 이러한 것들은 모두 우연적인 것들이다. 음양론에서는 반대되는 요소가 없으면 나머지 하나도 성립할 수 없다고 본다. 양에는 음이, 음에는 양이 있어야 하듯이, 대립을 포함하는 것이 자연의 진리임을 받아들이고, 역설 안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 바로 ‘포용의 인식론’이다.

 

국제철학연맹 회장으로서 앞으로의 계획은

인공지능 시대 철학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의제를 만들고 싶다. 특히 인공지능 로봇의 성별 고정관념에 대해 집중하고 있다. 남성 기술자가 현직에 많기에 AI 여성 로봇은 종종 립스틱을 바르고 이상적인 몸매를 가진 여성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여성 기술자가 개발했다면 그 모습은 달랐을 것이다. 디지털 시대, 양자과학기술 시대의 철학은 아날로그 시대의 철학과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현대사회에 대두되는 문제들을 새로운 철학적 의제로 제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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