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즌 모든 경기가 끝났다. 12번의 경기 중 10번의 패배. 8월의 첫 경기에선 22:3, 8월의 마지막 경기에서는 15:0으로 한 점도 내지 못한 채 패했다. 11월의 리그 마지막 경기에서도 12:9, 3점 차로 패배했다. 그러나 ‘이화플레이걸스’는 환호하며 서로를 끌어안고 기쁨을 나눴다. 계속되는 패배에도 이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야구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모든 순간을 함께 하는 부원들이 있기 때문이다.
승리보다 오래 남는 것
“순간을 즐기자, 이플 이플 파이팅!” 경기 전 외치는 구호 그대로 이화플레이걸스(이플)는 지금 ‘우리 팀’이 함께 하는 순간에 진심을 다한다. ‘순간을 즐기자’라는 구호는 방학 중 연구실 인턴과 이플을 병행하던 감독 오윤효(생명·23)씨가 만들었다.
“(모든 활동이) 끝나고 돌아보니 순간순간이 정말 소중하더라고요. 다 지나고 난 다음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소중함을 느꼈으면 좋겠어요.”
야구는 안타 하나, 볼넷 하나, 실책 하나가 ‘스노볼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에 순간적 판단이 중요한 스포츠다. 구호에는 승패와 관계없이 이 시간을 온전히 만끽하길 바라는 마음이 담겼다. 그 바람대로 부감독 김주윤(휴기바·25년졸)씨에게 구호는 어느새 경기 전 마음을 안정시키는 루틴이 됐다.
선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동아리 특성상, 경기 중 수비 ◆이닝에는 대부분의 부원이 그라운드에 나선다. ◆더그아웃에는 두세 명의 부원만 남는다. “공 온다, 집중!”, “수비 파이팅!” 적은 인원에도 더그아웃에서 터져 나오는 열정적인 응원은 그라운드 위까지 울려퍼진다.
◆야수들에게 닿은 이 목소리는, 마운드 위 홀로 서 있는 투수에게로 이른다. “피처, 캐처 파이팅!”, “괜찮아, 편하게 던져!” 주로 투수로 출전하는 회장 김상은(뇌인지·21)씨는 부원들의 응원 덕에 씩씩하게 공을 던진다. “마운드에 혼자 서 있으면 불안하기도 해요. ‘내가 잘하고 있나?’ 싶고, 제구가 흔들릴 때도 있어요. 그럴 때마다 들리는 부원들의 한마디가 큰 힘이 돼요.” 이닝이 끝나고 더그아웃으로 돌아오는 김상은씨의 발걸음이 가볍다.
박한슬(특교·24)씨는 경기의 승패가 전부는 아니라고 말한다. 출루하고, 홈런 치고, 삼진 잡고, 실책을 반복하지 않고. 그렇게 경기 속에서 각자 저만의 목표를 달성하며 매번 새로운 점을 배우고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작은 목표를 채울 때마다 사소한 것에서 오는 기쁨이 커요. 저희끼리는 대수롭지 않은 거 하나에도 칭찬을 많이 해 주거든요.” 야구를 하는 게, 함께 뛰는 경기가 즐거우면 된다. 이 기쁨을 맛본 그들은 매 순간 열심히 할 수밖에 없다.
함께 땀 흘리는 이들에게는 오래 기억에 남을 즐거운 일들도 생긴다. 이 또한 ‘언니’와 ‘동생’이 허물없이 지내는 동아리의 묘미다. 이주영(사회·22)씨는 울진에서 전국 대회를 끝내고, 특산품으로 받은 대게를 품에 안은 채 4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온 일을 회상하며 밝게 웃었다. 더운 여름에 금방 상하는 대게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도 많았다. 결국 부원들은 늦은 오후 동아리방에 모여 앉아 등딱지에 밥까지 비벼 먹었다. 이렇게 웃고 떠든 기억들은 쌓여 지금까지 함께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다이아몬드를 넓혀가는 여자들
아직까지 ‘야구를 하는 것’은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진다. 한국 프로야구의 천만 관중 달성에는 2030 여성 팬의 지대한 기여가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지만, 아직도 사회는 여자들이 ‘하는 야구’를 어색하게 여긴다. 하지만 이플에선 여자들이 야구를 하는 것, 함께 할 여자 동료들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 이씨는 사회인 야구단에서 활동하던 아버지를 따라 자연스레 공을 잡았다. 그러나 함께 던질 수 있는 친구가 없었다. 어릴 적 캐치볼 상대는 언제나 아버지뿐이었던 이씨에게 ‘팀으로 같이 야구를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오랜 바람이었다. 이플은 그런 이씨에게 꿈과 같은 팀이었다.
중학교 시절까지 야구를 했던 김주윤씨 또한 이플에서 다시 배트를 쥐었다. 어릴 적 야구를 함께 하던 동료는 모두 남자였고, 그 사이에서 배트를 휘두른다는 것은 두렵고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이플을 만나고 야구를 바라보는 자신의 시야가 달라졌음을 느꼈다.
“그때 제 친구가 감독이었는데 한 번 휘둘러 보라고, 그냥 세게만 하라고 했거든요. 나한테 (충분히 야구를 할 수 있다는) 자격이 주어진 느낌이었어요.”
그러나 세상의 속도는 이플보다 느리다. 야구하는 여자에 대한 세간의 편견은 여전히 존재한다. 야구 동아리를 한다고 하면 ‘매니저냐’, ‘야구를 보는 동아리냐’는 물음이 따라온다. 정식 유니폼을 갖추고 경기에 임하는 팀임에도 불구하고, ‘대학교 여자야구팀’에 대한 보편적 인식이 부족해 여전히 동아리의 존재를 알리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다. 이씨는 매번 이플을 소개할 때마다 ‘직접 야구를 하는 동아리’라는 설명을 덧붙인다. “진짜 경기도 하느냐는 물음도 종종 있어요. 그럴 때마다 ‘당연히 경기를 하죠’라고 답해요.”
실수를 안아준 오늘, 두려움 없이 달릴 내일
부원들에게 이플은 그저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야구를 하는 동아리가 아니다. 이플을 통해 배운 마음가짐은 일상으로 스며들어 삶을 대하는 태도가 됐다. 박씨는 외야로 날아가는 공을 향해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달려나가며, 주저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그는 신중하고 차분한 성격 탓에 일의 진행이 더뎌 스스로가 답답할 때도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야구는 판단을 빨리 해야 하는 스포츠”이기에, 망설일 시간이 없다.
그라운드 위에서 배운 용기는 실수를 통해 성장하는 법을 배우게 했다. 8월30일 경기, 박씨는 1루에서 상대를 아웃시킬 기회를 놓쳤고 이닝을 끝내지 못했다. 자신의 실책으로 점수를 내줬다는 생각에 박씨는 괴로움 섞인 눈물을 흘렸다. 울고 있는 박씨에게 언니들은 밝은 얼굴로 다가왔다. 따뜻한 격려를 건네준 동료들은 연습과 마인드 트레이닝까지 함께하며 다시 일어설 힘을 북돋아줬다. “그 이후로도 연습할 때는 잘 되는데, 경기만 나가면 실책이 떠올라서 힘들었어요. 그래도 언니들 덕분에 마음을 잘 추스르고 이후의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할 수 있었어요.” 사회로 나가기 전, 크고 작은 실수를 마음껏 해볼 수 있었던 경험과 함께 하는 동료 언니들 덕분에 그 실수를 받아들이고 헤쳐 나가는 법을 익혔다.
부감독 김주윤씨는 부원들을 떠올리며 무언가를 향한 열정과 애정을 가진 사람들은 서로에게 “반짝이는 빛”이 된다고 말했다. “이플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치고 고집 약한 사람 없어요.” 야구를, 그것도 여대에서 한다는 건 그만큼 자신만의 확고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사회가 정한 틀에서 조금 비켜선 이들은 그래서 더 단단히 연결돼 있었다.
끈끈한 유대를 나누는 것은 그라운드 위의 이들만이 아니었다. 졸업 후에도 여전히 ‘이플’이라는 팀과 함께 하며 시간을 잇고 있는 선배들이 있다. “오히려 별 감상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10년, 20년 뒤에도 이플을 하고 있을 테니까.” 이씨는 그때쯤이면 여자들이 야구를 하는 일이 더이상 특별하지 않은 일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는 이플에서 10년째 공을 던지는 김혜원(과교·13년졸)씨를 떠올렸다. 좋아하는 일을 오래도록 지켜내는 그 모습이 자신에게도 가능한 일이라 믿는다.
야구는 이들에게 즐거운 취미이자 하루를 견디게 하는 힘이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진정 스스로 선택한 일이라는 ‘자유로움’ 속에서 삶을 배운다. 여자들은 마음껏 던지고, 달리고, 웃으며 그라운드를 한껏 달군다. 언젠가 여자가 야구를 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지면, 이 선택이 ‘특별한 도전’으로 불리지 않는 날이 온다고 굳게 믿는다. “이플 이플 파이팅!” 그래서 이플은 오늘도 구호를 외친다.
“야구를 사랑하는 여성들이 정말 많아요. 아이가 있는 어머니도 지방까지 차를 끌고 와 경기를 하시더라고요. 여성들이 마음껏 야구에 도전해 볼 수 있는 문화와 인프라가 갖춰진 사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주영)
◆이닝: 야구에서 한 회(回)를 이르는 말. 양 팀이 공격과 수비를 한 번씩 끝내는 동안을 이른다.
◆더그아웃: 야구장의 선수 대기석. 평지를 파서 만든 것으로 1루 쪽과 3루 쪽의 두 군데에 있다.
◆야수: 야구에서 필드 안에서 수비하는 내야수와 필드 밖에서 수비하는 외야수를 통틀어 이르는 말.
| · 이대학보 취재미디어부 (박소영, 임서연, 임채리, 장희영) 공동취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