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한인 이민사를 영화로 기록해 온 영화감독. 우리대학 언론정보학과/방송영상학과 졸업 후 미국 하와이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영화사 ‘나우 프로덕션’ 대표 감독으로 ‘하와이 연가’(2024), ‘무지개 나라의 유산’(2021) 등을 만들었다.
나는 영화감독이다. 우리나라 역사 속 숨겨진 귀한 가치를 찾아내고 이를 영화로 기록하는 일을 하고 있다. 직원 두 명과 함께 작은 영화사를 운영하며 작년 CGV 개봉작 ‘하와이 연가’, 대한민국 국가기록원의 국가기록물로 지정된 ‘무지개 나라의 유산’을 만들었다. 일은 고되지만, 잊혀서는 안 될 역사 속 이야기를 기록하고 다음 세대에 전한다는 점에서 보람과 행복을 느낀다.
영화감독이라니, 이화에 재학하던 시절엔 상상하지 못했던 길이다. 20여 년 전, 대학 졸업 후 태평양 한가운데의 외딴섬, 하와이로 삶의 무대를 옮기면서 나는 사춘기 때 끝난 줄 알았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다시 시작했다.
‘나는 누구인가,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처음 하와이에 도착했을 때는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매일이 선물 같았고, 모든 순간이 꿈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여행과 이민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미국에 사는 사람’, 미국에서는 ‘한국에서 온 사람’으로 살아가는 경계인의 삶. 매일 방송국에서 뉴스를 진행하고, 방송 프로그램을 만들며 누구보다 바쁘게 살았지만, 마음 속에는 계속 같은 질문이 맴돌았다. “나는 지금 잘 살고 있는 걸까?”
그 무렵, 우연히 접한 한국인의 해외 이민 역사는 내 삶에 조용하지만 깊은 균열을 일으켰다. 1902년, 조선인이 처음 하와이에 집단 이주한 후, 을사늑약으로 공식 이민이 중단되기 전까지 약 7천 명이 바다를 건너 하와이로 갔고,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가 오늘날 750만 재외동포의 역사가 되었다. 낯선 땅, 낯선 언어, 낯선 일상 속에서도 삶을 개척해낸 그들의 기개와 용기는 놀라웠다. 그들의 이야기는 무기력했던 내 일상을 깨웠고, 내가 가진 작은 재능으로 이 소중한 이야기를 정성껏 기록해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었다. 특히 미래 세대들에게 우리가 과거 선조들로부터 이렇게 큰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을 나누고 싶었다.
나는 영화 전공자가 아니다. 이화에서 영상학을 전공했고 오랫동안 방송 기자로 일해왔지만, 정통 영화 교육을 받은 적은 없다. 그럼에도 어느 순간 마음 속에 간절한 바람이 하나 피어올랐다. 아무도 몰랐고 아무도 알려하지 않았던 120년 전 우리네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기록하고 싶다는 꿈. 그 꿈이 영화가 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래도 마침내 꿈을 이룰 수 있었던 데에는, 돌아보면 이화에서의 시간이 있었다.
나는 사실 ‘실패한 첼리스트’다. 아홉 살부터 대학 입시 직전까지 줄곧 첼로를 했다. 나도 부모님도 선생님도, 내가 첼리스트가 되리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학 진학 바로 전 그 길을 포기했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때서야 비로소 나는 첼로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시작했다. 이화의 중앙동아리 ‘ESAOS’에서 첼로 파트 단원으로, 그리고 동아리 회장으로, 음악과 함께 행복한 대학 시절을 보냈다. 연 2회 정기 연주회를 무대에 올리기 위해 동아리 친구들과 더불어 학교 앞 소상공인 가게를 돌며 협찬을 구했고 악보를 찾아 복사해 단원들에게 나누었으며, 우리 연주의 공백을 채워줄 객원 연주자를 섭외했다. 그때 우리는 연주자이자 제작자였고, 기획자이자 동료였다. 그리고 그때 나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음악의 큰 힘에 대해 배웠다.
그때의 배움과 깨달음이 20년 후 영화 ‘하와이 연가’로 이어졌다. 수십 년 전, 이름 없이 떠난 이민자들의 낡은 사진 한 장, 사탕수수밭에서 일하며 적은 독립운동기금의 장부 속 이름, 정성스레 남겨진 손글씨 편지들을 읽을 때면 코끝이 짠해졌다. 리처드 용재 오닐, 김지연 등 세계적인 연주자가 합류하며 그들에게 음악으로 바치는 헌사, ‘하와이 연가’가 태어났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후배 이화인 중 졸업 후의 길이 막막하게 느껴지는 친구가 있다면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처음부터 자신의 길을 알고 가는 사람은 드물다. 중요한 건 당신의 마음을 울리는 이야기, 당신을 멈추게 하는 이야기가 찾아왔을 때 무심결에 흘려버리지 않도록 예민한 감수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게 음악이든, 글이든, 누군가의 목소리든, 언젠가 만날 그 울림이 결국 당신만의 이야기를 만들 것이기에, 당장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쉽게 좌절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나는 우리 이민 선조들의 이야기를 통해 보았기 때문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시련 속에서도 믿는 바를 향해 꿋꿋이 정진하는 삶의 찬란함을, 사랑과 슬픔이, 충만함과 결핍이, 희망과 절망이 교차되는 어느 지점에서 맺어지는 값진 열매를, 그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지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