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대학 디자인학부를 23년 졸업하고 그해 ‘LG생활건강’ 디자이너로 입사했다. 현재 생활용품 패키지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전환형 인턴십을 갓 마치고 정신없이 회사에 적응하던 입사 6개월 차 막내 디자이너에게 신규 프로젝트가 주어졌다. 회사의 사업부는 크게 화장품, 생활용품, 음료 사업부로 세분화되는데, 그중에서도 생활용품은 가장 바쁜 스케줄로 운영된다. 생활용품 사업부의 디자이너로서 새로운 브랜드에 대한 콘셉트 이해, BI 로고 디자인을 포함한 패키지 시안 제안, 보고 및 컨벤션 제안을 위한 목업 제작까지, 주어진 기간은 채 한 달도 되지 않았다.
내가 맡은 제품은 소비자의 세분화된 바디 고민을 해결해 주는 기능성 바디케어 브랜드 ‘비클리닉스(B.clincx)’였다. 기존 브랜드와 연결되는 맥락이 없어서 신입 디자이너가 맡기에 적합하다는 판단으로 주어진 프로젝트였을 뿐, 내부적으로는 브랜드 자체에 대한 별다른 기대는 없었다. 종무식이 끝나고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3일 만에 10개가량의 디자인 시안을 잡았다. 내부적으로 몇 차례의 의사결정을 거치다 보면 초기 시안에서 N차 수정을 거쳐 완전히 다른 룩으로 출시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연말을 갈아넣으며 완성한 시안은 한 번에 확정됐다.
내가 원하는 디자인으로 제품이 바로 출시된다는 설렘도 잠시, 새해 시무와 동시에 목업 작업에 돌입했다. 새로운 용기에 라벨 면적을 잡고, 회사에서 한 번도 시도해 본 적 없는 쨍한 컬러감을 인쇄 실물로 담아내고자 수차례 컬러 타깃을 반복해서 뽑았다. 진행 과정에서 모든 것이 서툴렀다. 원하는 컬러는 형광기가 돌아서 양산 시 구현이 어려웠고, 동시에 컨벤션 제안용 보드 작업도 병행해야 했다.
목업까지 간신히 마무리한 신입 디자이너에게 다음 미션이 주어졌다. 올리브영 채널에 성공적으로 입점돼야 한다는 미션이었다. 거기서부터 야근이 다시 시작됐다. 하루이틀 만에 완성도 있는 연출 컷이 제작돼야 했다. 올리브영 입점 기한에 맞추기 위해서는 연출 컷의 완성도는 물론, 일정도 하루 이상 밀리면 안 됐다. 쫓기는 일정 속에서도 최상의 완성도를 내기 위해, 마치 졸업작품을 준비하듯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밤을 지새웠다.
좌충우돌 끝에 브랜드는 올리브영에 론칭되었고, 입점과 동시에 매장 최상단 매대로 올라갔다. 누구도 크게 주목하지 않았던 신규 브랜드였지만, 주요 채널에서의 성과로 내부적으로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내가 의도한 디자인으로 고객의 호평을 받고, 자주 가는 매장에 갈 때마다 나의 제품이 잘 보이는 곳에 진열돼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큰 성취감이었다.
입사할 때는 ‘순수한 열정’을 안고 들어왔다. 나만의 디자인으로 브랜딩을 하고, 실물을 양산해 고객의 반응을 얻는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다. 인턴십 과제를 할 때는 회사에서 나만의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펼치며 창의성을 발휘하는 디자이너로 성장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으로 임했고, 실무를 시작했을 때는 모든 프로젝트가 내 손에 달렸다는 책임감으로 하나하나 정성을 다해 임했다. 사무실을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점심도 거르며 매일 졸업 작품을 준비하듯 진심을 쏟았다.
고백하건대, 2년간의 연차가 쌓인 지금은 안다. 모든 프로젝트 하나하나가 내 졸업 작품처럼 소중할 수는 없고, 어느 정도는 타협해야 지치지 않고 오래 버틸 수 있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내가 이렇게 꿈꾸던 일을 주니어 시기에 해낼 수 있었던 건, 이화의 벗들과 경쟁하고 협동하며 길러진 끈기와 졸업전시를 준비하며 밤새워 다져진 정신력 덕분이었다.
주어진 업무를 받아들이고 차근차근 수행해 나가다 보니,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분명해진다. ‘좋아하는 일’이란 무조건 행복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 감당해야 할 책임과 예상치 못한 고비를 포함한 이름이라는 것을. 때로는 스스로를 의심하면서도, 결국에는 내 디자인을 통해 누군가의 일상에 가치를 더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격무를 버티고 꿈꾸던 일을 실현한 지금, 나를 만든 기반이 되는 경험과 환경의 무게를 체감한다. 그래도 여전히 새로운 고민은 생긴다. 입학 전에는 대학만 가면, 또 입사 전에는 회사만 들어가면 행복할 줄 알았지만, 내일은 또 내일의 고민이 생기는 법인가 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나를 단단하게 다져 온 경험과 기억으로 새로운 ‘퀘스트’를 깰 수 있다는 것을.
지금 이 순간에도 학교에서 밤새우며 열정을 불태우고 있을 후배분들,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자리에서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내고 계실 학우분들께 전하고 싶다. 우리가 열정으로 걸어온 길이, 수많은 고민 속에 보낸 시간들이 모두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언젠가 각자의 자리에서 또다시 마주할 그날까지, 모든 이화인의 꿈의 여정을 응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