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왜 퀴어를 혐오하는가. 취재는 하나의 물음에서 시작됐다.

올해 우리대학은 ‘퀴어 논쟁’의 장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대학보도 일련의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 꾸준히 현장에 나가 기사를 발행했다. 아트하우스 모모의 한국퀴어영화제 대관 거절부터 총학생회의 퀴어퍼레이드 참여, 학생들의 이화퀴어영화제 개최까지. 여러 사건을 기록했다. 사건의 발생을 다루는 기사를 보통 스트레이트라 부른다. 스트레이트는 주로 현장에서 작성되는 기사로, 사건의 이면에 존재하는 이야기를 다루기에 적절하지는 않다. 그러다 보니 마음 한켠에는 늘 찝찝함이 존재했다. 핵심을 빼먹는 기분이었다.

일련의 사건들은 결코 개별적으로 발생하지 않았다. 우리대학에서 퀴어를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레퍼토리는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퀴어가 기독교정신에 반하는 존재이기에, 우리대학에 설 자리는 없다는 것이다. 특정 기독교 세력의 퀴어혐오라는 명확한 사회적 맥락이 우리대학에도 침투했다. 이러한 맥락을 해부하지 않은 상태에서 단편적인 사건만 보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현시점 이대학보에서 꼭 다루어야 할 물음이라 생각했다. 물음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우리는 누구보다 열심히 취재에 임했다.

답을 얻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한평생 기독교에 관심 가져본 적 없으니,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기 어려웠다. 우리는 무작정 이동환 목사를 찾아갔다. 퀴어를 축복했다가 출교 처분을 당한 목사라면, 답을 내려줄 순 없어도 약간의 풀이는 해줄 수 있겠지. 그에게 머릿속에 가득했던 물음표를 쏟아냈고, 2시간 가까이 인터뷰를 진행했다. 살다 살다 이렇게 긴 인터뷰는 처음이었다. 막상 대화를 나눠보니 나 자신의 무지를 깨달았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했던가. 그들의 논리가 엉성하고 헐거웠음을 이해하자, 공익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를 기사로 작성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본격적으로 취재를 시작하면서 좌절의 순간은 여러 번 찾아왔다. 우리의 질문에 답해 줄 인터뷰이를 찾는 것이 참으로 어려웠다. 삼고초려의 마음가짐으로 메일을 몇 번씩 보내봐도 답은 없었다. 겨우 답을 들었을 때도 민감한 사안이라 대답해 주기 어렵겠다는 내용이었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섭섭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진정 약자의 편에 서길 원한다면, 이럴 때 용기를 내셔야 하는 것 아닌가. 한낱 20대 초반 대학생인 우리도 이름을 내걸고 기사를 발행하는데, 뭐랄까 아쉬웠다. 그럼에도 용기 내어 도움 주신 분들이 많았다. 기사에 등장하지 않더라도, 취재가 순조롭게 흘러가도록 만들어준 분들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를 전하고 싶다.

우리는 기독교학과에서 ‘퀴어 논쟁’을 경험했던 많은 이를 만나 의견을 물었고, 나름의 답을 찾았다. 그 답은 우스웠고 찌질했다. 퀴어를 외부의 적으로 삼아 함께 혐오하며 공동체의 결속을 다진다니. 약자를 사랑하는 종교가 어찌 이런 행보를 보이는가. 뒷담화로 다진 우정은 쉽게 무너진다는 것을 학창 시절에 배우지 못한 것일까. 기사를 작성하던 중, 감리회가 퀴어를 축복한 목사에게 중징계를 내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동환 목사와 같은 사례가 또다시 발생한 것이다. 여전히 갈 길이 멀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취재가 막바지로 접어든 시점 우리는 기독교학과 교수님의 사무실 문까지 열었다. 인문관에서의 인터뷰를 마치고 학보실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기자로서 이 정도로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 적은 없었다. 동성애가 뭐길래 한 사람의 생계까지 위협할까. 퀴어들의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훔치셨던 교수님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기독교정신을 진정으로 실천하는 이의 모습은 이런 것이 아닐까. 사회적 약자인 퀴어가 경험하는 고통과 아픔, 차별에 깊이 공감하는 태도. 인터뷰이들은 공통적으로 이런 태도를 갖췄다. 나아가 현시대 기독교가 변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들처럼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이 존재하고 한국 교회의 주류가 된다면, 세상은 언젠가 변하지 않을지 소원한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퀴어를 혐오하는 이들이 인용하는 레위기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 동성애를 하는 네 이웃도 사랑해 주시면 안 될지. 혐오의 렌즈를 벗고 대화를 시도해 보자. 세상이 뒤바뀌는 경험이 그대들에게도 일어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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