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대학 기독교학과에서 학사, 석사 학위를 받고,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개신교 신학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기독시민교양을 위한 나눔윤리학』과 『죽을 때까지 유쾌하게 - 약해진 자들과 동행하는 삶의 해석학』, 『레비나스 철학의 맥락들』(공저), 『한국의 에큐메니컬 신학 - 부산에서 칼스루에까지』(공저), 『연대하는 여성신학』(공저) 등을 집필하였고, 기독교 윤리과 인성교육 관련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칼럼 꼭지 이름이 <읽어야 산다>라고 했다. 처음에는 이름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대학 생활이 지식 축적의 황금기임을 부인할 수 없다면, 독서를 독려하는 칼럼이 학보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만큼 당연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새 꼭 책을 읽어야 사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책을 읽지 않아도 살아가는 데에는 문제가 없는 사람들이 많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조사한 ‘2023년 국민 독서 실태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성인 가운데 일 년에 단 한 권의 책(교과서, 수험서, 잡지, 만화 제외)도 읽지 않거나 듣지 않은 이들이 57%에 이른다고 한다.
혹자는 책을 읽지 않고 사는 이들의 삶의 질을 의심할 수도 있다. 단순히 생존에만 매달릴 것이라 치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혜는 꼭 활자의 세상에서만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족 부양을 위해 이를 악물고 버텨 내는, 거칠고 지루한 노동 현장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을 지키고 타인과 연대하는 지혜를 배우기도 한다. 반대로, 엄청난 독서량 덕택에 높은 곳에 이른 지식인 중에도 사람답게 사는 것에 서툴거나, 타인을 사람답게 대우하는 것에 야박한 이가 존재한다. 읽는 행위 자체가 인간다움을 고양시킨다고 성급히 결론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수정해서 말하고 싶다. ‘읽어야 산다’라는 선언적 진술은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반성적 질문 없이는 타인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해로울 수 있다.
어떻게 읽을 것인가? 프랑스 현대철학자 폴 리쾨르(Paul Ricoeur)에 의하면, 텍스트 읽기란 책을 읽는 내가 책에 담긴 타인들의 이야기들을 통해 ‘내 자신’(moi-même)이라는 닫힌 정체성을 깨고 ‘자기 자신’(soi-même)이라는 열린 정체성으로 끊임없이 자기 이해를 새롭게 형성해 나가는 해석학적 행위이다. 이러한 방식의 읽기는 새로운 지식을 축적해 나가는 대용량 저장장치로서 나를 대우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것은 독서의 주체인 나의 삶을 텍스트에 담긴 타인들의 이야기에 적극적으로 견주고 연관시키는 상상의 작업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텍스트에 담긴 타인들의 이야기가 단순히 행복하고 숭고하며 존경스럽거나 쉽게 동의 가능한 상태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좋은 텍스트일수록 내게 매우 낯설고 이질적이며, 심지어 조금도 수용하고 싶지 않은 타인들의 이야기가 넘쳐난다. 그러니 이러한 텍스트를 읽으려면 속독을 할 수 없다. 아름다운 명언에 밑줄긋는 데에 만족할 수도 없다.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고 싶지 않은 말들에 느낌표와 물음표, 별표 등을 치며, 텍스트 읽기를 멈추고 직접 생각해야만 한다. 왜 나는 그의 말이 불쾌한지, 왜 나는 그녀의 행동에 화가 나는지, 왜 나는 그들의 분노에 공감이 일어나지 않는지, 왜 나는 그들의 아픔에 함께 눈물을 흘리는지, 읽던 책을 덮고 지하철 의자에 앉아서, 공원을 걸으며 생각에 생각을 더해야 한다.
리쾨르는 이렇게 타인들의 낯선 이야기를 애써 거쳐서 내 생각의 폭을 넓혀가는 독서의 과정을 ‘자기 정체성’을 키워가는 ‘해석의 에움길’(멀리 돌아서 가는 굽은 길)이라고 불렀다. 쉽게 말해서 타인의 이야기에 내 자신을 직면시키면서 이전과는 다른 자기 자신으로, 자기 존재의 지평을 확장해 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리쾨르는 여기서 설명을 멈추지 않는다. 그는 텍스트 읽기를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를 확장하는 해석학 차원에 머물지 않고 윤리학의 차원으로 더 밀고 나간다. 책 속에 담긴 타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내 자신을 개방하게 됐으니, 현실에서 마주하는 타인들의 어렵거나 고통스러운 삶, 원통한 삶에 내가 책임을 나눠질 수 있는 실천적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한마디로, 잘 읽기와 잘 살기, 그 둘이 분리될 수 없다는 최후의 진리에 이른다.
꼭 읽어야 잘 사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읽지 않아도 태생적으로 타인과 더불어, 타인을 위해 잘 사는 선한 지혜자들을 세상에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이제까지 내가 믿고 살아오던 방식 그 자체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 사람들은 책을 읽어도 내 생각과 내 삶의 방식을 정당화하는 확증 편향적인 독서를 할 뿐이다. 많이 읽지 않아도 좋다. 다만 텍스트 읽기를 통해 나와 전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자신을 노출하고 대면하는 불편함을 견뎌보자. 그런 독서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사회는 분명히 더 나아질 것이다. 잘 읽어서 잘 사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테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