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증은 이해하기 어려운 마음이다. 어떻게 미우면서 좋을 수가 있을까? 하지만 세상에는 논리만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가득하다. 이를테면, 귀신은 지평좌표계를 고정할 수 없어서 과학적으로 존재하기 어렵다는 논리를 머리로는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남몰래 간은 콩알만큼 귀여워진다. 애증도 글자 그대로는 모순이지만 무서운 귀신처럼 막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감정이다. 수많은 애증 중에서도 아빠에 대한 애증은 삶을 복잡하게 만든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아빠가 너무 싫다. 같이 밥 먹는 것도 힘들다. 하지만 아빠가 죽으면 분명히 울고 후회할 것이다. 피보다 진한 애증이다. 아빠를 닮은 나도 싫다. 아빠 얼굴이 보기 싫어 피해 봐도 거울 속 내 얼굴엔 아빠가 있다.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사람을 내가 세상에서 가장 많이 닮았다. 아빠를 닮은 나도, 결국 나라서 사랑할 수밖에 없다. 저주받은 애증이다. 아빠가 왜 싫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다. 역설적으로 할 말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도 몇 가지만 써보자면, 밥 먹고 수저만 띡 내려놓고 소파에 앉을 때, 오늘도 오줌 발사에 실패해서 엄마랑 내가 50 넘은 아저씨의 오줌을 닦아야 할 때, 목소리 높이고 ‘아니’로 시작해 자기 말만 하는 걸 대화라고 생각할 때다. (이제는 아빠를 혼낼 수 있는 어른도 없어서 절망적이다.) 샤이 트럼프마냥 아빠가 싫은 마음을 두근두근 숨기고 살고 있던 어느 날, 달고 찬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친구에게 파격 고백을 했다. ‘아빠를 좀 죽이고 싶을 때가 있어.’ 속으로 경솔한 발언을 했다고 내 안의 검열 레이더가 미친 듯이 작동했다. 묵묵히 아이스크림에 집중하는 척했지만 실은 후회하고 있었다. 친구가 말했다. ‘나도 그래 언니. 나도 아빠를 죽이고 싶어.’ 인정하기 어렵지만, 우리는 남몰래 속으로 아빠를 죽이고 싶어 했다. ‘집 속의 집 속의 집’(2017)은 솔직하게 아빠가 싫다고 세상에 선포해 버린 다큐다. (혹자는 부자가 될 수 있다고 해도 이렇게까진 못 찍는다고 혀를 내두른다. 개인적으로 서브스턴스보다 보는 게 어려웠다. 피 한 방울 등장하지 않는 다큐인데 말이다.) 주인공 찬영은 아빠가 싫어서 운다. 정확히는 자신이 혐오하는 아빠의 모습을 자기에게서 발견할 때마다 운다. ‘내가 싫어하는 아빠의 모습들이 나에게서 보일 때마다 스스로를 쓸모없다고 여겼다. 아빠를 싫어하게 되는 것도 모자라, 스스로를 싫어하게 만든 아빠를 증오했다. 나는 “왜 가장 쓸모없다고 여기는 아빠에게 이해받기 위해 발버둥 치는 걸까라고 관객에게 외친다. 아빠가 너무 싫지만, 아빠가 싫어서 스스로 미워진 찬영은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아빠라는 관문을 고통스럽지만 통과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찬영은 아빠와 자기 자신, 그리고 중재자인 듯 최대의 피해자인 듯한 엄마를 찍으며 자신이 아빠를 싫어했던 이유를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다큐 속 아빠는 자기 집인데 내가 왜 남의 눈치를 봐야 하냐며 런닝 바람으로 독선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리고 화가 나거나 답답할 때 드러나는 폭력성은 찬영을 늘 긴장하게 만든다. 집안의 경제적 가장이자 구성원의 정신적 버팀목이 되어야 할 ‘아빠의 역할'에 대한 인식조차 없다. 그저 아빠에게 가족은 가족이니까 편하게 무례를 범해도 되는 존재일 뿐이다. ‘집 속의 집 속의 집’(2017)이라는 제목은 물리적으로는 같은 공간에 있지만, 실상은 전혀 다른 세계에 있는 가족들을 은유한다. 동시에 아빠에게서 자신을 보고, 자신에게서 아빠를 보는 거울 관계를 상징한다. 마주 보는 거울이 서로를 끝없이 투사하는 것처럼, 샷 속에 샷이 겹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의 대표적인 이미지는 '거울'이다. 거울의 속성은 반영이자 분열이다. 주인공과 아빠 역시 거울처럼 닮았지만, 끝끝내 서로의 내면에 닿지 못한 채 분열된다. 주인공 찬영의 아빠는 단순히 한 가정의 문제가 아니다. 어쩌면 내 친구의 아빠, 그리고 우리 세대의 많은 아빠들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과거 할아버지 세대에는 맞벌이가 일반적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집 밖에서 홀로 가족을 부양했고, 경제력을 통해 자연스럽게 ‘가장’의 역할을 수행했다. 가장의 권위는 책임에서 비롯되었고, 가족 구성원들도 이를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엄마도 함께 돈을 벌고, 심지어 집안일까지 도맡는다. 가부장의 권위는 더 이상 ‘경제적 기여’만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데, 여전히 예전과 같은 대우를 요구한다면 자식 입장에서는 그 권위를 존중할 이유가 없다. 과거처럼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권위를 주장하는 모습은 결국 ‘존중’을 강요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아빠를 남몰래 미워하는 나에게 아빠는 취직해서 자신을 열심히 봉양하라고 말한다. 그럼 나는 아빠에게 봄에 소풍을 가자고 한다. 아빠를 지게에 싣고 봄 동산에 오르겠다고... 아빠와 나는 닮은 얼굴을 하고 킄킄킄 웃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