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  강단 위에서 끊임없이 공부하고 가르침을 전하며, 은퇴 후에도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이화의 교수들이다. 이대학보는 이화를 떠나 삶의 제2막을 마주한 퇴임교수들의 이야기를 담은 ‘이화를 꽃피운 스승들’을 1680호부터 세 번에 걸쳐 연재한다. 이번 호는 평생을 교육사회학의 발전을 위해 힘쓰고 퇴임 후에도 활발히 학술 활동을 펼치고 있는 오욱환 명예교수(교육학과)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화에서 보낸 시간을 돌아보며,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 오욱환 명예교수. 그는 이화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순간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첫 출근날을 꼽았다. 채플이 끝난 뒤, 수많은 학생들이 내려오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고 답했다. <strong>안정연 사진기자
이화에서 보낸 시간을 돌아보며,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 오욱환 명예교수. 그는 이화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순간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첫 출근날을 꼽았다. 채플이 끝난 뒤, 수많은 학생들이 내려오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고 답했다. 안정연 사진기자

“젊은 학자들에게 학자로서의 삶이 행복하기를 기원하며 몇 가지 조언을 하고자 합니다.” 2009년 오 교수는 '학문을 직업으로 삼으려는 젊은 학자들을 위하여'라는 칼럼을 한국교육학회 뉴스레터에 썼다. 오 교수가 젊은 시절의 자신에게 말을 건네듯 날카롭지만 따뜻한 조언을 담아 쓴 칼럼은 큰 사랑을 받았다. 1984년 부임해 2013년까지 이화에서 29년의 세월을 보낸 그는 퇴임 후에도 젊은 학자 시절의 마음 그대로 학문에 전념하고 있다. 여전히 올곧은 마음가짐으로 학자로서의 소임을 밝히는 오 교수의 눈빛이 인상 깊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오 교수는 어린 시절의 자신을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성깔 있는 놈”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당시 부산의 명문 학교 경남고등학교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온갖 사교육을 받는 부잣집 아이들 사이에서 가난한 집 자식이 공부하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 공교육 외에는 어떤 지원도 받지 못했지만, 오 교수는 ‘노력형’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착실히 공부해 1967년 서울대학교 교육학과에 진학했다.

대학 졸업 후 중학교 도덕 교사로 일했지만, 미래가 그려지지 않았고 ‘교사를 평생하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에 학자의 길을 택했다. 인생의 전환점으로 선택한 학문의 길이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생계를 놓을 순 없었기에 교사 일을 계속하며 서울대학교 야간대학원에서 교육행정학으로 석사를 취득했다. 교육학과 다양한 학문을 연관 지어 연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교육사회학에 매력을 느낀 오 교수는 박사 과정을 밟고자 미국의 일리노이대학교(University of Illinois, UIUC)로 떠났다. 당시 1970년대 후반 한국에서는 교육사회학이 자리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영어 실력 없이 떠난 미국에서의 생활은 고단했다. 교수가 수업을 해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오 교수는 그때부터 ‘어떻게든 박사과정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가리라’라는 일념 하나로 도서관에 파묻혀 생활했다. 도서관에 살다시피 하며 수많은 도서를 독파한 그는일상 영어보다는 학술 용어에 능했다. 더듬더듬하는 영어였지만, 오 교수는 학문의 맥을 정확히 짚고 수업시간 중 정확한 학술 용어를 사용해 토론할 수 있었다. 비로소 교수들에게 기대받는 학생으로 거듭난 그는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를 계속했다.

미국 유학 중에 있었던 일화를 이야기하며 영어로 소통하기 위해 노력했던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오욱환 교수. <strong>안정연 사진기자
미국 유학 중에 있었던 일화를 이야기하며 영어로 소통하기 위해 노력했던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오욱환 교수. 안정연 사진기자

 

학자이자 스승으로서 빛을 냈던 이화의 시간

그는 학자로서 활약하는 동시에 ‘학생들에게 학문의 즐거움’을 선사하기 위해 강의에도 힘썼다. 매 학기 학생들에게 탄탄한 강의를 선보이고자 당시 재량이었던 수업계획서를 빠짐없이 작성해 학기 전 홈페이지에 올려뒀다. 학생들의 학문적 역량을 끌어올리고자 했던 오 교수의 수업은 정성스럽고 빠른 피드백으로 정평이 났었다. 오 교수는 “처음에 피드백을 자세히 주니, 시간이 지날수록 놀랍게 성장하는 학생들의 원고를 보며 감탄사를 보내기도 했다”고 말했다. 좋은 강의를 향한 열정은 학생들에게도 통해 오 교수는 2004년 강의우수교원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가 수업할 때면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옆 강의실에서도 들렸을 정도로 오 교수는 학생들에게 즐거운 학문의 시간을 선사한 열정적인 교수였다.

오 교수가 만난 이화의 학생들은 ‘순종적인 전통 여성상’에서 벗어나 주체적으로 일하는 학생들이었다. 누가 도와주기를 기대하지 않고 무거운 물건도 척척 옮기고, 하나의 프로젝트를 할 때도 추진력을 발휘해 일사천리로 해결하는 모습이었다. 그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사회진출에 불리함을 겪을 학생들을 격려하고 때로는 야단도 쳤다. “학생들이 어디 가서도 기죽지 않고 한 사람의 몫을 할 수 있도록 했죠.” 오 교수는 훗날 찾아온 한 학생의 일화를 전했다. “직장에서 아주 자신 있게 자기 역할을 하고 있는데 누가와서 ‘지도 교수가 누구였냐’고 묻더래요. 오욱환 교수라고 말하니 ‘그래서 그렇구나’라고 납득했다고 합니다.”

오욱환 교수는 이화에서 만난 학생들을 떠올리며 “학생들이 어디가서도 기죽지 않고 한 사람의 몫을 할 수 있도록 했다”고 답했다. <strong>안정연 사진기자
오욱환 교수는 이화에서 만난 학생들을 떠올리며 “학생들이 어디가서도 기죽지 않고 한 사람의 몫을 할 수 있도록 했다”고 답했다. 안정연 사진기자

 

학문의 선배가 새로운 젊은 학자들에게

“산고가 없으면 아이가 태어나지 못하듯, 책을 쓰는 것도 굉장히 고통스러운 일이에요.” 수많은 학술서와 논문을 남긴 그에게도 책을 쓰는 과정은 머리를 쥐어뜯을 만큼 고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책이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읽힌다’는 믿음으로 집필을 계속해 왔다. 오 교수는 “많은 이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게 중요하다”며 학자로서의 사명감을 강조했다.

“학자로서 살 때는 최소한 출세, 돈 이런 걱정하지 말고 학문에 대한 자존심만 지켜라.” 그가 젊은 학자들에게 전하는 말이자 반평생을 넘게 학자로 살아오며 지녀온 마음가짐이다. 1984년부터 2013년까지 29년간 오 교수는 학과장 이상의 보직을 맡은 적이 없다. 그 시간을 아껴 더 많은 연구와 저술에 쏟아부었다. 그는 자동차와 스마트폰을 멀리한다. 자가용 대신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돈을 아끼고, 스마트폰 사용으로 버려지는 시간을 아낀다. 대신 그 시간에 글을 쓰고 책을 읽는 습관을 들였다. 그 습관은 퇴임 후에도 계속됐다. 오 교수는 “정년퇴직하며 교수라는 직업을 잃은 대신 학자로서의 시간을 벌었다”고 말할 정도로 여전히 학문에 열중하고 있다. 2022년 쓴 책 ‘교육 현상의 사회과학적 해석’(2022)은 2023년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됐으며, 오 교수는 2024년 1월에도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산문집 ’책 좀 사서 읽어요’(2024)를 출간했다.

오욱환 명예교수가 자신이 집필한 ‘책 좀 사서 읽어요’(2024)의 내용 중 일부를 설명하고 있다. <strong>안정연 사진기자
오욱환 명예교수가 자신이 집필한 ‘책 좀 사서 읽어요’(2024)의 내용 중 일부를 설명하고 있다. 안정연 사진기자

오 교수는 학문의 적으로 ‘게으름’을 꼽았다. ‘안일한 공부는 안일함을 익히는 것보다 조금도 낫지 않다’와 같은 문구를 수업계획안에 늘 써둔 이유다. 그는 글쓰기와 독서를 멀리하고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학생들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는 그런 학생들에게 “쉬운 책, 재밌는 책부터 시작해 점차 영역을 넓혀가기”를 추천한다. 글을 쓸 때도 완벽히 쓰려할 필요 없다. “서론, 본론, 결론을 차례대로 쓰기보다는 가장 잘 쓸 수 있는 부분을 쓰고 앞뒤로 메꿔 나간 다음 처음부터 다시 정리하듯 쓰면 돼요.”

그는 학문을 직업으로 삼고자 하는 젊은 학자들에게 “인생에는 여러 가지 길이 있다”는 사실을 당부한다. 학자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오 교수는 “그럼에도 학문을 계속하고 싶다면 자기만의 색깔을 가지고 끊임없이 열정적으로 몰입하라”며 현실적인 조언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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