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낙하

 

1.

“또 주제 고르기 유형을 틀리셨네요, 정민서 씨.”

펜을 비스듬하게 잡고 시험지를 탁탁 치자 회색 갱지 위로 볼펜 똥이 진득하고 선명하게 묻어났다. 오른편에 앉아 있는 민서가 처절한 신음소리를 내며 책상 위로 풀썩 엎어졌다. 애매한 수준으로 버릇이 없는 모습에 순간적으로 미간에 힘을 주자 나의 열일곱 과외생은 곧바로 허리를 펴고 앉았다. 교복 조끼 위에 보풀이 솜털처럼 잔뜩 올라와 있었다. 나의 엄마가 보았더라면 한숨을 푹 쉬며 돌돌이를 가지고 와 흔적도 없이 걷어냈을 것이다. 민서가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며 시험지를 내려다보았다. 나무늘보를 닮은 그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나도 열일곱 때는 저리 매사에 극적이고 다 지나면 종이 쪼가리가 되는 시험지 앞에서 덜덜거리는 어린아이였던가.

“저는 이 유형은 싹 버려야 되나 봐요, 쌤. 몇 번으로 찍을지 같이 골라 주세요.”

아니, 나는 아니었다. 스스로 던진 질문에 반발하듯 생각이 날카롭게 솟아올랐다. 제멋대로 튀어나온 답변에 대한 근거를 찾기 위해 머릿속의 창고를 뒤적거렸다. 말끔한 답변 대신 몇 가지 사례만이 떠올랐다. 우선 나는 결과가 어떻든 간에 시험지를 앞에 두고 후회하는 일이 없었고. 선지를 고르면 옳든 그르든 그 선택에 대한 이유를 설득력 있게 답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고등학생이 되었을 즈음에 엄마는 더 이상 내 교복을 자세히 살피지 못 했고. 사실 그런 애틋하고 진득한 부류의 애정을 원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나는 의미 없는 사례 분석을 중단하기로 했다.

민서의 눈이 반짝 빛났다. 수업 중 드물게 생긴 침묵에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민서가 차라리 내일이 수능이었으면 좋겠다느니 이제부터라도 다른 길을 찾아 떠나야겠다느니 하는 말들을 무시했다. 그리고 짤뚱한 지문과 다섯 개의 선지들을 빠르게 훑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갈피가 잡혔다. 나는 영어로 빼곡히 적힌 문장들 중 하나에 빨간 밑줄을 주욱 그었다.

“이 문장 보고 바로 고른 거지? 고래의 사체가 가라앉으면, 청소동물들, 즉 먹장어와 상어 같은 동물들이, 먼저 살점을 뜯어먹는다.”

민서가 내 눈치를 보며 고개를 살살 끄덕였다.

“이게 ‘옳은 것을 고르시오’였다면 민서가 고른 게 정답이었겠지. 하지만 우리는 지금 주제를 찾고 싶은 거잖아. 지나치게 세부적인 내용을 골랐어, 지금.”

명료하게 딱딱 끊기는 해석에 민서가 무언가 깨달은 듯 탄식했다. 나는 짜릿한 쾌감을 느끼며 오답 선지의 번호 위에 대각선을 내려 그었다. 과외를 하며 가장 즐기는 감각이었다. 갈팡질팡 흐릿한 눈동자에 또렷한 빛이 들어오는 순간. 보람이나 성취감 같은 거창한 감정은 아니었다. 이미 가지고 있는 정보를 타인이 올바른 결과값을 출력할 때까지 주입하는 일에 보람이랄 게 있겠는가. 다만 주변에 모호한 게 있는 상황을 즐기지 않을 뿐이었다. 0.9999라는 숫자를 볼 때 느끼는 불편함과 비슷한 감정이었다.

“그러면 주제는 뭐겠어.”

그러나 늘 확인 절차는 필요한 법. 질문을 던지자 민서는 힘도 자신감도 없는 손가락으로 2번 선지를 톡 짚었다.

“그렇지. 이게 전체적인 내용을 포괄할 수 있는 선지야. 고래낙하 현상은 고래의 죽음을 통해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는 자연의 순환을 보여준다.”

“다시 보면 바로 이해되는 건 저 혼자가 아니겠죠?”

울상을 지으며 묻는 민서에게 적당히 진심을 담아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나 뒤에 한마디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도 나라면 혼자가 아니라는 위안보다는 혼자 맞혔다는 우월감을 택하겠어.”

아까 낸 신음소리보다 두 배는 더 처절한 괴성이 방에 울려 퍼졌다. 안방에 있는 학부모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어 문이 꽉 닫혔는지 재차 확인했다. 집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고요했다.

“쌤은 저 같은 애들 마음 절대로 이해 못 해요.”

민서가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나는 시험지를 깔끔하게 절반으로 접으며 일어섰다.

“세상에 이해 못 할 게 어디 있어.”

 

2.

간혹 딸기맛 감기약 같은 지문이 나오는 경우가 있었다. 단맛을 내려고 애를 쓴 건 알겠고 참 고마운데 어쨌든 결론은 쓴 감기약 같은 그런 지문. 시험지 위가 아니라 인스타그램 감성 문구나 드라마 대사로 만났더라면 오래오래 기억에 남고 인생에도 도움이 되었을 지문. 아까 민서와의 수업 때 마지막으로 읽었던 지문이 그랬다. 그 고래낙하 지문 말이다. 치열하게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고등학생들에게 꿈과 희망을 전하고자 하는 의도일까. 하지만 고래의 유익한 죽음이 인간의 자아 성찰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겠는가. 주머니 속의 휴대폰을 꺼내드는 순간 순탄하게 가던 버스가 덜컹거렸다. 여기저기서 ‘어어’ 하며 사람들이 비틀거렸다. 나는 급한 대로 눈앞에 있는 의자를 붙잡고 중심을 잡았다.

고래낙하 현상. 고래가 죽고 그 사체가 낙하하는 현상. 고래가 낙하한다. 고래, 낙하. ......그런데 정말로? 고래의 신비에 대해서는 익히 들은 바가 있었지만 고래의 죽음에 대해서는 상상해 본 적조차 없었다. 인간은 영원히 발도 들일 수 없는 거대한 공간을 고요하게 유영하는 존재. 거대한 몸을 펼친 채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곳으로 느릿하게 향하는 그 존재가 밑으로 떨어진다고. 나는 한 손으로 자판을 쳐서 ‘고래낙하’를 검색했다. 주르륵 쏟아져 내려오는 기사들 중 두 번째 게시글을 엄지로 눌렀다. 실망스러우면 첫 번째를 시도할 생각이었다. 기다렸다는 듯 잘 정리된 그림 자료와 여러 문단의 글이 화면에 떠올랐다. 어린이를 겨냥했는지 친근한 어투로 쓰인 글이 왜인지 마음에 들어 페이지에 머무르기로 했다.

‘고래가 죽으면 그 사체는 천천히 밑으로 가라앉으며 바다 생태계에 영양분을 나누어 줘. 우선 고래의 부드러운 사체를 바닷새와 물고기가 수십일 동안 뜯어먹어. 낙하가 시작되면 먹장어와 잠꾸러기상어와 같은 청소동물들이 살을 먹어치우지.’

버스가 다시 급정거를 했다. 요란하게 통화를 하던 아저씨가 나를 향해 위태롭게 몸을 기울이며 비틀거렸다. 나는 몸을 뒤로 슬쩍 빼며 글을 마저 읽어 내려갔다.

‘그 다음에는 거대한 고래의 뼈 위에 다른 생물들이 터전을 잡고 살아가. 그렇게 고래의 뼈는 수개월에서 몇 년을 거쳐 바다 밑바닥에 가라앉아. 우리는 볼 수 없는 심해의 맨 밑바닥에서도 ‘오세닥스’ 같은 좀비벌레들이 고래의 뼈를 녹여 먹어.’

사천교에 도착했다는 안내음이 흘러나왔다. 나는 해파리와 지렁이를 섞어 닮은 오세닥스라는 생명체의 사진에서 눈을 떼고 동그란 정차 버튼을 세게 눌렀다. 머지않아 푸쉬익 소리를 내며 버스의 문이 활짝 열렸다. 나는 쫓겨나듯 난생 처음 와 보는 거리 위에 급히 발을 내딛었다. 눈앞에 있는 횡단보도의 불이 반짝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나는 휴대폰에 둥둥 떠 있는 오세닥스의 사진을 지우고 지도를 켰다. 파란 안내선은 횡단보도의 건너편을 향하고 있었다. 초록불은 이제 깜박거리고 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꽉 쥔 채 검고 하얀 줄무늬 바닥 위를 내달렸다. 3초 남짓 뛰었다고 숨이 차올랐다. 교복을 벗은 뒤로 마음먹고 달릴 일이 없어서 체력이 잔뜩 깎인 걸까. 초여름 특유의 습한 공기가 몸속에 그득 차올랐다.

건너편에 있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터널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터널로 향하는 내리막길의 꼭대기에 서서 주황색으로 빛나는 그 구멍을 쳐다보았다. 다른 길은 안 보이는데, 저 안으로 들어가야 하나. 돌아서려던 찰나 휴대폰이 하얗게 빛나며 진동했다. 짧은 메시지가 잠금화면에 떠올랐다.

‘윤하야 잘 들어가고 있어?’

나는 터널 앞에 서서 메시지 위에 박힌 ‘김진하’ 세 글자를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새로운 메시지가 그 위로 떠올랐다.

‘사천교에서 내린 다음에 터널 안으로 들어가’

‘터널 안에서 쭉 직진하면 커다란 벽화가 나올 거야’

나는 답장하지는 않은 채 차곡차곡 쌓이는 메시지들을 쳐다보았다. 조금 뜸을 들이다 이윽고 새로운 메시지가 왔다.

‘예뻐 ㅎㅎ’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 이게 언니였지. 나는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고 터널을 향해 내려갔다. 어쨌든 제대로 가고 있다는 건 알겠다. 터널 안은 습하고 서늘했다. 나는 탁탁 울리는 내 발소리를 들으며 저 멀리 보이는 끝을 향해 내려갔다. 시야에 파란색 덩어리가 서서히 들어오기 시작했다. 터널을 벗어날 때가 되어서야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발걸음이 빨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괜히 더운 기분에 옷을 펄럭거리며 몸을 식혔다.

짙푸른 고래가 하늘을 헤엄치고 있었다. 고래의 위에는 한 여자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래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언니의 말대로 보기 좋고 예쁜 벽화였다. 나는 뒤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잠시 그 평화로운 광경 앞에 멈추어 섰다. 그래, 이게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전형적인 고래의 모습 아닌가. 인간과 교감하는 신비하고 장엄한 생물. 동물보다는 존재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그러나 나는 그 그림 앞에서 낙하하는 고래를 생각하고 있었다. 서서히 바닥에 가라앉아 오세닥스에게 갉아먹히는 고래의 죽은 몸뚱이를.

 

3.

취직 준비를 하는 동안 언니와 함께 살겠다고 말한 것은 충동적인 선택이었다. 당시 졸업한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나는 빈손으로 허허벌판에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행선지는 명확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꿈과 현실을 적당히 섞은 직업을 찾고, 그 직업 뒤에 ‘준비’를 붙여 인터넷에 검색하면 나오는 해야 할 일 목록들을 해치우면 된다. 그 단순하고 기계적인 일조차 두려운 것은 아마 이제부터 벌어질 모든 일들이 부모님이 아닌 나의 책임이며, 나를 묶어 두던 학업으로서의 의무도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나를 가두고 옥죄던 벽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조금 억울하기는 했다. 나는 벽을 허물어 달라고 요구한 적 없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허허벌판에 혼자 남겨지는 건 상당히 무서운 일이다. 당시 나는 계약이 만료된 나의 방을 정리하고 있었다. 정리를 하면 할수록 한없이 좁게만 느껴지던 방은 점점 넓어졌다. 매트도 서랍장도 모두 사라진 바닥 위에 서 있자니 마지막 하나 남은 짐이 된 기분이었다. 어쩌면 내가 몰려오는 생각을 고이 접고 눕는 걸 택했더라면, 정든 방에서 최후의 샤워를 하기로 결정했더라면 금방 사라질 기분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그렇지 않았기에 덜컥 무서운 기분이 들던 참이었다. 그렇기에 때마침 걸려오던 엄마의 전화를 덜컥 받아버렸고 거기에서 모든 문제가 시작되었다. 나는 불안정한 상태에서 통화를 하다가 엄마가 자식의 불안을 감지하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 버렸다.

방 정리는 잘하고 있어? 나오기 전에 방 사진 꼼꼼하게 잘 찍어 두고.

그럭저럭 괜찮아요.

이 여덟 글자가 더 큰 문제였다. 그건 언니가 고등학생 때 멍든 마음을 감출 때마다 등장하던 단골 대사였으니까. 엄마는 내 마음이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그리고 그 즉시 조치를 내리고 싶어했다. 그래서 나온 결론이 혼자 두기 불안한 두 사람을 한 지붕 아래 살게 하는 것이었다. 마침 언니는 원룸 치고 넓은 탓에 월세가 부담스러웠던 방을 옮겨야 할지 고민 중이었다. 엄마는 특유의 현란한 말솜씨로 서울에 있는 게 취업 준비에도 좋지 않겠냐며 번듯한 직장에 들어갈 때까지만 언니와 함께 사는 것을 권유했다. 허허벌판에 서 있었던 나는 단호히 거절하지 못했고 언니는 흔쾌히 승낙했다. 이후로는 모든 일이 빠르게 지나갔다. 언니와 이사 날짜를 잡고 방의 주소, 비밀번호, 거주 시 주의사항을 들었다. 엄마는 걱정을 덜어 기분이 좋았는지 언니의 방에, 그러니까 이제는 우리의 방에 가격이 꽤 나가는 공간 분리용 파티션을 보내 주었다. 한 공간 안에 두 딸을 집어넣어 안심해 놓고 준다는 선물이 분리용 파티션이라니. 아이러니도 그런 아이러니가 없었다.

언니가 알려 준 비밀번호를 누르자 경쾌한 소리와 함께 잠금이 풀렸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부드러운 섬유유연제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그다지 튀지 않는 은은한 향이 마음에 들어 숨을 깊게 들이키며 들어섰다. 처음 보는 언니의 방은 예상보다 큰 크기에 비해 물건은 많지 않아 허전해 보였다. 나는 무거운 가방을 벽에 기대어 놓고 덩그러니 서서 방을 휘이 둘러보았다. 언니의 방은 싼값을 주고 그린 삽화 속 방 같았다. 스치듯 보면 갖출 건 다 갖추었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무언가 부족하고 투박해 보이는 그런 방.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는 방.

‘잘 도착했어’

나는 언니의 책상 앞에 서서 메시지를 보냈다. 말풍선 옆의 작은 1이 곧바로 사라졌다. 답장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괜히 미안한 마음에 조금 더 길게 덧붙였다.

‘벽화 예쁘긴 하더라 ㅋㅋㅋㅋ’

답장을 기다리며 책상 위를 훑었다. 자고로 현대인의 책상이란 그 사람의 생활 루틴부터 취향까지 담고 있는 법 아니겠는가. 시야 끝에 작은 탁상 달력 하나가 걸렸다. 7월 달력이 빈칸이 없을 정도로 새카만 글씨로 빼곡하게 차 있었다. 나는 현관문을 슬쩍 쳐다보며 팔을 뻗어 달력을 끌어왔다. 깨알 같은 글씨들을 스르륵 훑던 시선은 저절로 오늘 날짜를 가리키는 칸을 향했다. 안 그래도 빼곡한 날들 중에서도 특히 더 글씨가 적힌 칸이었다.

‘10:00 해푸름 보육원’

‘16:30 멘토링’

‘초록우산(자동)’

지금은 저녁 일곱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달력에 적힌 대로라면 언니는 아침에 일어나서 꼬박 아홉 시간 동안 봉사활동만 한 셈이다. 나는 아예 의자를 빼고 눌러앉아 달력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바둑판처럼 생긴 칸들을 살피니 언니의 일주일 루틴이 보이기 시작했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라브리’라는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첫째 주와 셋째 주 금요일마다 ‘희망의 집’으로 교육 봉사를 간다. ‘해푸름 보육원 봉사’는 둘째 주와 넷째 주 금요일 아침마다 간다. 멘토링은 일주일에 두 번이나 토요일만 고정되어 있고 다른 하루는 들쭉날쭉이었다. 그러니까 언니의 한 달을 정리하자면 일요일을 제외한 모든 날을 일과 알 수 없는 봉사에만 쏟는 것이었다. 그게 전부도 아니었다. 나는 6월, 4월, 그리고 1월까지 달력을 넘기며 언니의 행적을 읽어 내려갔다. 어떤 장을 펼치든 10일의 칸에는 반듯한 글씨로 ‘초록우산(자동)’이라고 적혀 있었다. 언니는 봉사를 나가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정기 후원까지 하고 있었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종일 아르바이트만 하는 사람이.

잘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엄마가 이 사실을 알면 뭐라고 말할까. 묘하게 기분이 들떴다. 밖을 돌아다니며 봉사 활동을 한다니 정말이지 웃음이 나왔다.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방에 틀어박혀 일주일을 나오지 않던 언니가. 늘 얼굴에 새카만 그늘이 드리워 있던 언니가. 엄마가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좋아할까! 갑자기 용기가 솟아올랐다. 이번에는 파일꽂이에 꽂혀 있는 수첩을 덥석 꺼냈다. 떳떳하지 못한 일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는데도 웃음이 나왔다. 다른 사람의 비밀을 들쑤시는 건 생각보다 재미있고 뒤틀린 일이었다.

이 수첩은 뭘까. 속마음을 잔뜩 풀어낸 일기일까. 두툼한 두께를 보아하니 무언가 수집하는 스크랩북일 수도 있겠다. 나는 수첩을 잡고 대강 중간쯤 되는 장을 펼쳤다. 무엇이 적혀 있는지 글자를 눈에 담기도 전에 두툼한 종이 뭉치가 스르륵 수첩에서 빠져나왔다. 나는 작게 숨을 들이키며 황급히 바닥에 주저앉아 흩어진 종이들을 싹싹 모았다. 영수증이었다. 나는 얇고 쇠 냄새가 나는 영수증을 읽어 내려갔다. 길지도 않은 목록은 햇반과 다이소로 가득 차 있었고 간간히 샴푸나 값싼 프랜차이즈 커피가 끼어 있었다. 마음이 부글부글 끓었다. 내역 속의 언니는 최소한으로 살아가는 사람 같았다. 방금까지 들떴던 기분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힘없이 쪼그라들었다. 당장 차오르는 불쾌함의 근원을 알 수 없었다. 머릿속에는 아주 단순한 질문만이 맴돌았다. 왜?

영수증을 반듯하게 모으고 언니의 수첩 안에 다시 끼워 넣었다. 잠시 바닥에 앉아 허공을 바라보았다. 내가 언니의 방 안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누군가 나에게 ‘지금 무슨 생각하고 있어요?’ 라고 물어본다면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럴 때는 생각을 끊어내고 몸을 움직이는 편이 현명했다. 나는 비척비척 일어나서 벽에 기대 놓았던 커다란 가방을 열었다. 당장 내일 입어야 하는 옷가지들과 노트북, 그리고 세면도구가 전부였다. 나머지 짐은 오늘 택배로 부쳤으니 월요일 전까지 도착할 것이다. 옷장 자리가 충분하려나. 때 아닌 걱정을 하며 하루치 옷들을 반듯하게 개어서 품에 안은 채 침대 옆의 옷장으로 향했다.

옷장은 향기롭고 비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완벽히 텅 빈 것은 아니었고, 그 안에 들어 있는 몇 안 되는 옷가지들이 향기로웠다. 의외로 섬유유연제를 열심히 쓰는 걸까. 언니가 향기에 신경을 쓰는 편이었던가.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옷을 품에 한가득 안고 서서 절반쯤 찬 옷장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부족해 보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가득 찬 것도 아닌 일인분의 옷장. 채도가 낮고 때와 상황을 가리지 않고 아무렇게나 꺼내 입어도 어색해 보이지 않을 옷들. 좋게 말하면 검소하고 나쁘게 말하면 단촐했다. 나는 서랍의 맨 아래 칸을 열어 내 하루치 옷가지들을 욱여넣었다. 한 칸의 절반이 금세 찼다.

옷을 모두 정리한 뒤 벽에 기대어 앉아 언니의 방을 눈에 담았다. 누군가에게 대여를 해 주기 위해 만들어진 방 같았다. 취향을 타지 않는 기본적인 가구와 부담이 되지 않는 가격의 생필품들, 마지막으로 보편적인 향을 담은 단촐한 옷장까지. 하지만 언니는 절대 ‘기본적’이라는 표현 뒤에 놓일 수 없는 사람 아니었나. 좋아하는 게 참 많았는데. 언니가 만든 거대한 거짓말 안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다른 사람의 방이었더라면 이런저런 생각도 들지 않았을 텐데, 하필이면. 가슴이 답답해지려던 참에 휴대폰의 진동이 울렸다.

‘윤하야 나 곧 들어가’

‘치킨 사서 갈게 ㅎㅎ’

반복되는 형식의 문자를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기분이 왜 안 좋은지 조금 알 것 같았다. 나는 기본적으로 연민이라는 감정을 좋아하지 않았다. 기부 방송에서 흔히 내보내는 바싹 마르고 아파 보이는 아이들의 모습이나, 어려움을 견뎌내고 있는 작은 단칸방의 가족을 지켜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혹시 그런 장면이 보일 때면 불편한 마음에 채널을 돌리거나 전원을 꺼 버렸다. 나의 그런 행동이 성숙하지 못한 데다 일종의 선민의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내 마음을 볼 수 없을 테니 상관없었다. 그러나 그 감정을 나의 언니에게 느낀다면? 그리고 내가 홧김에 살기로 선택한 곳이 언니의 방이라면. 타인에게는 한없이 퍼 주면서 자신에게는 무엇 하나도 선물하지 않는 언니에 대한 연민. 마음이 다시 부글부글 끓었다.

대화창을 나와서 평소에 잘 사용하지도 않는 메모장을 켰다. 왜 썼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자잘한 메모들을 휙휙 넘겼다. 과외 학생에게 보내는 안내 문자들, 사야 하는 물건들, 언젠가 가 보고 싶은 가게들 목록이 검은 덩어리로 뭉쳐 폭포처럼 흘러갔다. 가장 오래된 메모에 닿을 때쯤 화면을 멈추었다. 나는 [17283 21428]이라고 명시된 메모의 제목을 눌렀다. 알 수 없는 숫자들이 화면에 주르륵 펼쳐졌다. 아마 기억이 안 나는 화장실이나 와이파이 비밀번호일 것이다. 이제 그 숫자들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나에게는 이 숫자들 밑에 나열된 글자들이 더 중요했다.

‘심해인 윤예원 주정원 김서영’

나는 네 개의 이름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아주 오래도록 잊고 살았던 이름들이었다. 지금 이렇게 찬찬히 읽고 있어도 메모장을 끄면 기억에서 금방 사라질 이름들이었다. 나는 이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누구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했다.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인생에서 스친 적도 없고, 어쩌면 내가 앞으로 살아가며 만날 수만 명에조차 속하지 않을 사람들일지도 몰랐다. 설사 바늘 구멍만한 확률을 뚫고 마주친다고 하더라도 알아보지 못 할 수도 있었다. 아주 개성 있는 이름들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2025년 대한민국 이름 순위권을 차지할 정도로 흔해빠진 이름도 아니니까.

하지만 그 이름들은 우리가 잊을 무렵이면 어둠 속에서 불현듯 튀어 오르는 세 글자였다. 고요한 바다의 물결을 가르며 다가오는 상어의 지느러미처럼, 이제 되었다 싶은 순간 마음을 내려앉게 만들었다. 그래, 그러니까 평생을 노력해도 완벽히 잊을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떻게 그 이름들을 설명해야 아무런 감정 없이 다 지나간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을까. 엄마가 안방에서 울음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하면 꼭 한 번씩 들리던 이름이야. 우리 가족에게서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딱 5년을 빼앗아간 사람들이야. 아니, 어쩌면 더 건조하고 단순하게 말할 수 있다. 나의 언니 김진하를 괴롭힌 사람들이야.

 

4.

언니는 여덟 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들어왔다. 느릿하게 비밀번호 다섯 자리를 누르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두 손에 커다란 봉지를 들고 있는 언니가 내 얼굴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나는 실없이 웃으며 콜라가 들어 무거운 봉지를 받아들고 언니가 들어올 수 있도록 현관에서 비켜섰다.

짭짤하고 고소한 냄새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언니는 냉장고 옆에 세워진 접이식 책상을 끌고 와서 펼쳤다. 나는 마주앉은 언니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조금이라도 괜찮지 않은 흔적이 묻어난다면 그걸 빌미 삼아 물어보고 어떻게 지냈는지 물어볼 심산이었다. 남들보다는 조금 하얀 얼굴에, 어떻게 보면 차분하지만 은은하게 장난기가 묻어나는 눈동자. 말이 없을 것 같은 작은 입술. 하지만 언니는 사실 누구보다 말이 많다.

“야, 오랜만이다. 내 동생.”

언니가 닭다리를 내밀며 웬 아저씨 같은 말투로 털털하게 말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닭다리를 덥석 받아들었다.

“오늘 어디 다녀온 거야? 알바 가는 날은 아니잖아.”

“너 언니에게 정말 관심이 많구나. 내가 오랫동안 다니는 보육원이 있거든. 거기에서 아가들 공부도 가르쳐 주고, 이것저것 하다가 왔어.”

“차라리 과외를 하면 돈을 벌 텐데. 뭐, 언니가 돈 벌려고 봉사하는 건 아니겠지만.”

“너도 애들 얼굴 보면 이 시간에 돈을 더 벌 수 있겠다느니 그런 생각 안 들걸.”

언니가 무를 아삭아삭 씹으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나는 나쁜 사람이 된 기분에 괜히 방을 훑는 시늉을 했다. 콜라를 한 모금 마시는 언니를 보며 어쩌면 지금이 언니의 마음을 꺼내 볼 수 있는 최적의 기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나는 직접적으로 질문을 하지 않고도 원하는 답을 끌어낼 다양한 방법을 알고 있었다.

“언니는 방을 안 꾸미나 보네.”

가볍게 툭 내뱉자 언니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신의 방을 둘러보았다.

“꾸밀 시간도 없고, 내 취향처럼 꾸미려면 돈도 꽤 들 거고.......”

언니는 문장을 끝맺지 않은 채 조금 고민하다가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오래 살 집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동생이 왔네.”

“뭐래.”

나는 이상한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귀를 문지르며 웃었다. 내가 원하는 답이 아니었다.

“엄마가 걱정 많이 했어.”

방금까지 풀려 있던 언니의 입꼬리가 조금 굳었다. 나는 속으로 흠칫 놀라고 미안한 마음을 느끼면서도 입을 열었다.

“내가 취준 시작했잖아. 원래 학교 졸업하면 사회에 툭 나가떨어지는 기분이고, 그래서 마음도 급해지는 건데. 엄청 자연스러운 거잖아. 그런데 하필이면 그 상태에서 엄마랑 전화를 했지 뭐야. 엄마 알지? 딸이 힘든 건 귀신같이 알아채는 거.”

“그럼, 알지.”

언니가 작게 웃으며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나는 그 미묘하게 불편한 기색을 놓치지 않고 한 술 더 떠서 덧붙였다.

“내가 혼자 있으면 많이 힘들어할까 봐 언니랑 같이 지내라고 한 것 같아. 그래도 언제 취직할 거냐고 들들 볶는 것보다는 이게 훨씬 낫지 않나 싶어.”

언니는 참기 어려워 터져나온 듯한 웃음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네 말이 맞다. 우리는 운 좋은 줄 알아야 해. 언니는 이런 알맹이 없는 말들을 하면서 다른 주제로 대화가 넘어가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어림도 없지. 새카만 오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이 정도쯤 해 두라는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했다. 대신 새카만 마음을 숨기고 다정하고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언니, 이제 괜찮아?”

내가 말해 놓고도 속으로 깜짝 놀랐다. 내가 이렇게 부드럽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던가. 하지만 그와 동시에 스스로에게 옅은 실망감을 느꼈다. 내가 지금 베푸는 친절은 진정으로 언니를 위해서가 아닌 언니의 속을 뒤집고 열어 보고 싶다는 단순한 욕심 때문이었으니까. 나쁜 짓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나만은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 아닌가. 언니의 방황이 시작된 동시에 나는 혼자서 잘 정착할 방법을 찾아야만 했으니까. 그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언니는 괴로워했지만 나 또한 발버둥쳤다. 그리고 이렇게, 평범의 범주 안에 가뿐히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로 자랐다.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우리 가족이 지나와야 했던 시간들에 언니의 책임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책임은 내가 이를 갈며 메모장에 기록한 그 이름들에 있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당장 나의 눈앞에 있는 언니의 속을 궁금해하는 것이었다. 상대를 잘못 찾은 보상 심리였다.

“뭐가?”

언니가 해맑은 얼굴로 되물었다. 나는 말문이 막혀 치킨이 가득 담긴 입을 우물거렸다.

“아, 고등학교 때 말하는 거지. 그때는 정말 힘들었는데, 이제는 괜찮아.”

그래, 그리고 내일은 토요일이야. 꼭 뒤에 이런 말이 붙어야 할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언니는 가볍게 말했다. 나는 이상하게도 실망감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쉽게 지나갈 수 있는 일이었던 건가. 그러면 언니는 왜 분수에 맞지 않는 금액을 기부하고, 다른 사람을 돕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을 쏟는 걸까. 나는 겨우 적절한 말을 골라 대답했다.

“다행이다. 언니가 괜찮아 보여서. 그 사람들이 나쁜 새끼들이었어.”

갑자기 튀어나온 과장된 표현에 언니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이제는 걔들 이름도 기억 안 나.”

그 5년에 대한 대화는 그 한마디로 정리되었다. 물론 나는 믿지 않았지만 그 이상 언니를 추궁하는 것은 정말 못할 짓이었기에 잠자코 치킨만 뜯어먹었다. 언니에 대해 알고 싶어 꺼내 놓은 대화였는데 오히려 나의 치졸한 면만 들킨 꼴이 되었다. 식탁을 정리하고 내가 누울 푹신한 매트리스를 꺼내 놓으며 언니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의 근황과 집의 상태에 대한 겉이 번지르르한 대화가 오갔다. 그러나 나는 둘 사이의 유쾌한 대화가 왜인지 텅 비어 있다는 생각을 했다.

말만 언니와 같이 사는 것이지, 사실상 서로 얼굴을 보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나는 낮부터 저녁까지 과외를 하거나 밖에 나가서 곧 있을 어학 시험을 준비했다. 언니는 매일 밤늦게 돌아오자마자 샤워를 했고, 젖은 수건을 두르고 나와서는 가계부를 끄적거리고 영수증을 정리했다. 나는 매트리스에 누워 스탠드 불빛에 비치는 언니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언니는 내가 이미 그 안에 있는 내용을 훔쳐보았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르는 채로 보지 말라며 장난스럽게 타박했다. 그러면 나는 날이 갈수록 두툼해지는 그 수첩을 노려보다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언니가 늦게 들어오는 날 수첩을 팔락거리며 넘겨보았다.

언니와 함께 두 달 정도를 지내며 때로는 한결같은 것이 주변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언니는 삶에 자신의 비중을 두지 않는 것처럼 하루하루를 보냈다. 내가 기분을 전환할 겸 친구들과 1박2일로 대전을 다녀오고, 비가 온다는 이유로 평소라면 사지 않을 옷과 헤드폰을 사는 동안 언니는 자신에게 최소한의 것만 주었다. 생필품과 음식. 그게 전부였다. 언니가 작은 쇼핑백을 가지고 집에 들어오는 날에는 진심으로 기뻤다. 그 작은 변화 하나만으로 사실은 언니가 생각보다 괜찮은 상태일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차올랐다. 적어도 언니가 그 안에서 예쁘게 포장된 새 가계부를 꺼내기 전까지는 그랬다.

나는 과외에서 집으로 돌아갈 때마다 새파란 고래 벽화를 마주했다. 하늘을 헤엄치며 솟아오르는 고래. 부드럽고 온화하게 미소 짓는 얼굴. 무엇이든 용서해 줄 것 같은 존재. 사람들이 기대하는 환상 속 고래의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 평화로운 그림을 볼 때마다 나의 마음에서는 반발심이 솟아올랐다. 벽화 속에 파묻힌 그 고래는 가짜고, 저 부드러운 미소는 우리가 바라고 강제하는 표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멈추어 서 있으면 내 뒤에서 산책을 하고 있던 사람들은 휴대폰을 꺼내 벽화의 사진을 찍었다. 그림이 정말 예쁘다고 작게 탄성하면서.

그 네 사람이 언니의 인생에 들어와 있었던 시간은 고작 6개월이었다. 하지만 그 6개월이 우리 가족에게서 빼앗아간 시간은 5년이었다. 어쩌면 지금도 우리는 그 사람들이 심어 놓은 기억에 갇혀 서로에게 솔직할 시간을 빼앗기고 있는 중일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라는 확신을 가지기 위해 언니가 완벽히 괜찮아졌다는 사실을 확인받고 싶었다. 언니를 진심으로 위하는 마음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내가 혼자 발버둥 쳐야 했던 시간들이 제값을 했는지 보상 받고 싶은 마음이었으니까.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네 개의 이름이 적혀 있는 메모를 자주 펼쳤다. 이제는 맨 처음 적었던 하나의 이름만은 외울 수 있을 지경이었다. 심해인. 심해인. 심해인. 예쁜 이름 아닌가. 새파란 벽화를 지나칠 때마다 나는 언니의 이름 한 번, 엄마의 흐느껴 울던 목소리 한 번, 그리고 그 이름 한 번을 되새겼다. 심해인, 심해인, 심해인. 그 넷 중에서 가장 예쁜 이름이었다. 소설의 주인공이나 가질 것 같은 적당히 독특하고, 발음하기에 편한 이름. 아까운 이름.

여기까지 왔다면 언니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고 싶은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답은 늘 하나였다. 운이 안 좋았다고. 내가 아는 한 시작은 아주 단순했다. 언니가 다닌 고등학교는 학생들 사이의 경쟁 심리가 애매하게 강했고 하나같이 남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러니 배치고사에서 조용하고 묵묵하게 일등을 차지한 언니가 아니꼬웠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 언니는 자신을 향한 교묘한 악의를 받아칠 줄 몰랐고,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반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아는 언니는 착하고 섬세하고 겁이 많았으니까. 가장 끌어내리고 싶은 대상이 가장 괴롭히기 쉬운 대상이라니. 이만한 사냥감이 어디 있겠는가. 물론 이게 그 모든 일의 해답이 될 수는 없겠지만.

언니는 자퇴하고 난 뒤에야 그 학교를 다니는 동안 매일매일 울었다고 고백했다. 너무 많이 울어서 나중에는 눈물이 나오지 않아 더 서러웠다고 말했다. 자신이 고장 난 것 같아서 정말로 무서웠다고. 언니가 학교를 떠나자 언니와 한 반을 썼던 아이들은 알록달록하고 아기자기하게 꾸민 롤링페이퍼를 보내왔다. 엄마는 결국 그놈들도 자기가 잘못한 건 아는 거라며 의기양양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끄적여 준 것이었다. 언니는 그 종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우리 가족 중에서 그 편지들을 제대로 읽어 본 것은 나 하나였다. 나는 꾹꾹 눌러쓴 손글씨들을 하나하나 읽었다. 특별할 건 없었다.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었는데 이렇게 헤어져서 아쉬워. 우리 대화는 많이 못 나누었지만 가서도 잘 지내. 그리고, 미안해. 나는 심해인이라는 이름 바로 위에 박힌 그 세 글자를 보며 중얼거렸다. 미안해?

그러니까 나는 언니를 대할 방식을 확실히 정하고 싶었다. 언니를 볼 때면 화가 치밀어 올랐고, 마음이 아팠고, 이만 정신을 차리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서글서글한 미소를 짓는 언니를 꽉 껴안아 주고 싶었다. 나만은 언니의 편이고 내가 언니를 정말 사랑한다는 사실을 믿게 만들고 싶었다. 그게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이었다. 하지만 이것 또한 결국 나 자신을 편안하게 만들기 위해 언니를 이용하는 셈이었다. 나는 언니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얼마나 그 시간에서 멀어졌는지 알지도 못한 채 행복의 겉모양만 열심히 빚고 있었다. 언니가 고난을 극복하고 완벽히 괜찮아진 사람처럼 보였으면 했다. 벽화 속에서 온화하게 웃고 있는 그 커다란 고래처럼.

그날은 시험 직전인 평소보다 과외에서 늦게 돌아온 참이었다. 현관에 깔끔하게 정리된 언니의 운동화를 보며 언니는 제 시간에 왔구나 생각했다. 방에 들어서니 언니가 작은 전신거울을 마주보고 앉아 얼굴에 무언가를 찍어 바르고 있었다. 설마 화장을 하고 있는 건가. 언니는 자기관리는 꽤나 철저했지만 그 이상으로 자기 자신을 꾸미는 것에 대한 관심은 적었다. 나는 조금 놀란 마음으로 나를 등지고 있는 언니를 향해 다가갔다.

“다친 거야?”

내가 불쑥 내뱉자 언니는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하얀 이마에 새파란 멍이 든 것도 모자라 무언가 뭉툭하게 솟아 있었다. 나도 모르게 검지로 약하게 툭 튀어나온 부분을 누르자 언니는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틀었다. 손가락에 하얀색 연고가 묻어났다.

“이거 어쩌다 이랬어?”

나의 질문에 언니는 민망해하며 대답했다.

“오늘 보육원 봉사 가서 애들하고 놀아 주다가. 앞을 못 보고 기둥에 꽝 부딪혔어.”

“누가 멍자국에 후시딘을 발라. 피가 난 것도 아닌데.”

“그냥 뭐라도 바르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

“퍽이나 그렇겠네. 감기 걸리면 후시딘 삼키게?”

날선 나의 말투에 언니가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무엇이 담겨 있을지 모를 새카만 눈동자를 보고 있으니 또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분노, 사랑, 연민....... 온갖 감정들이 다 섞인 기분이.

“애들이랑 어떻게 놀면 이마가 터져서 오는데.”

조금 누그러진 말투에 안심이 되었는지 언니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너 나랑 어렸을 때 비행기 놀이터에서 놀던 거 생각 안 나? 우리도 장난 아니게 과격했어. 너 여기에 없을 때도 이 정도 멍은 생겼었어. 어른이 되면 안 뛰어 노니까 덜 다치는 거지, 애들이 별난 건 아니야.”

“엄청 편 드네. 걔들은 일주일만 지나도 언니 잊어버릴 텐데.”

“너 무슨 일 있어?”

언니가 이마에 하얀색 연고를 묻힌 채로 어색하게 물었다. 무례한 말을 들은 상황에서도 상대의 사정을 묻는 태도가 한결같아 마음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래서일까. 지금 당장 멈추어야 한다는 경고음을 무시한 채 나는 마지막으로 뱉었다.

“이제 자신한테 도움이 되는 일을 좀 해 봐.”

변명의 여지도 없이 내가 잘못했다. 그 말을 뱉은 이후로 언니는 다시 어색하게 웃으며 상황을 넘겼다. 나는 언니가 차라리 화를 내 주기를 끝까지 바라며 불편한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언니는 평소처럼 잘 자라는 간단한 인사를 하고, 뻐근한 몸을 쭈욱 뻗으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누웠다.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을 빌려 최대한 빨리 사과해야 할지, 아니면 이대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어가야 할지 고민하며 기나긴 밤을 보냈다.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헤엄쳤지만 무엇보다 언니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사실이 마음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내가 그 이름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게 속상했다.

일주일이 흘렀다. 언니는 그날 나와의 대화를 완전히 지워 버린 것처럼 계속해서 아르바이트와 봉사를 오갔다. 하지만 나는 언니가 애써 넘겨야 할 상처로 남고 싶지 않았다. 언니가 5년 동안 느껴야 했던 무력함을 어렵게 독립한 집에서 느끼도록 만들고 싶지 않았다. 언니가 집을 비운 사이에 책상 위에 놓인 달력을 확인했다. 이번 주 토요일을 가리키는 칸에 작고 파란 글씨가 적혀 있었다. 바다사랑 남해 해안 정화.

“언니 토요일에 남해 가지.”

봉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언니에게 불쑥 말을 꺼냈다. 언니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해안가 청소하는 봉사인 거야?”

“쓰레기 줍는 것도 할 수 있고. 그런데 나는 잠수해서 쓰레기 줍는 역할이야.”

이번에는 내가 놀랄 차례였다.

“언니 잠수도 해?”

“응, 스쿠버 다이빙. 처음에는 취미로 시작했는데 도움이 될 방법이 있더라고. 그런데 갑자기 봉사는 왜?”

“나 마케팅 쪽 희망하는 거 알지. 예전에 같이 대외 활동했던 지인이 남해에 있거든. 포트폴리오나 면접 관련해서 조언해 줄 수 있다고 해서...... 나도 겸사겸사 같이 갈까 했지.”

나는 최대한 방금 떠올린 생각인 것처럼 가볍게 말했다. 늘 붙어 있는 장소가 아닌 넓은 바다에서 이야기를 나누면 사과도 조금 수월해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언니는 고민스러운 듯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다 이내 끄덕였다. 한시름 놓았다는 생각에 작게 한숨을 쉬며 화장실에 들어가려는 순간 뒤에서 언니가 말했다.

“너, 기다리는 거 잘하지?”

 

5.

“물속에 너무 오래 있는 거 아니야? 그러다 죽어.”

언니는 입에 문 기다란 호스를 툭툭 친 후 고개를 끄덕이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아마 '이거로 숨을 쉴 수 있으니 문제없다'는 뜻이었다. 나는 몇 번이나 언니에게 들었지만 이적 지 정확한 명칭을 외우지 못한 호스를 언니가 뱉어내는 것을 보며 손을 내밀었다. 언니가 마지막으로 건져 올린 건 조금 찌그러진 원기둥 모양의 플라스틱 통이었다. 15분을 훌쩍 넘 긴 잠수의 결과물 치고는 지나치게 가벼운 무게였다. 약 5년 정도 전까지만 해도 예쁜 파스 텔 색깔이었을 통 위에는 새카만 따개비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나는 장갑에 끈질기게 달 라붙어오는 거미줄 같은 해초 줄기들을 거칠게 털어냈다. 그리고 언니가 모은 쓰레기 더미 들 옆에 그 통을 던졌다. 언니가 허공을 툭툭 걷어차서 주황색 오리발을 바닥에 벗어던졌다. 바다사랑의 단장이 수고했다며 성큼성큼 다가와서는 노란 꿀홍삼 병을 건넸다.

“진하 씨, 우리 매운탕 먹을 건데 정말 안 올 거야? 왜 저기, 동생분이랑 같이 오지.”

“동생이 해물을 별로 안 좋아해서요. 아이고 단장님, 저희는 따로 잘 먹을게요.”

언니는 쓴맛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단장 앞에서 굳이 홍삼을 크게 한 모금 들이켰 다. 나는 바쁜 척 둘에게서 등을 돌리고 군청에서 배부한 누런 자루에 쓰레기들을 하나씩 넣었다. 저 밑의 바다는 안에 아무것도 들지 않은 것처럼 어둡고 고요했다. 저 안에 팔백만 톤에 달하는 쓰레기가 잠들어 있다고 누가 상상이나 해 봤겠는가. 저렇게 캄캄하고 조용한 데. 바다가 푸르다는 말은 바다에 가까이 가 보지 못한 사람들이 퍼트린 소문이 분명하다.

“윤하야, 좀 도와주라.”

언니의 목소리가 생각의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언니를 거들러 가면서도 계속 생각 했다. 이 지경까지 온 건 바다가 조용했던 탓이다. 바다가 조금만 덜 조용했더라면 사람들 은 그 안에 쓰레기를 던져 넣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조금만 더 거세게 철썩였더라면 아까 내가 안간힘을 다해 들어올렸던 썩어가는 타이어라든가 지금 우리가 함께 옮기고 있는 누가 어떻게 버렸는지도 모를 양변기라든가 그런 쓰레기들을 버릴 엄두조차 못 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안에 얼마나 거대하고 장엄한 존재가 살고 있는지 바다가 조금이라도 티를 냈더라 면. 순간 이제는 물어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해 바닷가에서 함께 양변기를 옮 기고 있는 이 순간이 아니면 안 된다는 확신이 섰다. 입을 벌리자 짭짤한 바닷바람이 혀를 톡 쏘며 지나갔다. 나는 최대한 딱딱하게 들리도록 노력하며 말했다.

“잘 돌려서 표현할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나는 그런 거 못해. 그냥 물어볼게.”

양변기가 깡 소리를 내며 돌바닥에 섰다. 언니는 기능을 잃은 세라믹 덩어리가 흔들거리 다 멈추는 걸 확인한 후 나를 쳐다보았다. 긴장이 전혀 묻어나지 않은 맹한 얼굴이 어서 물 어보라며 내 마음을 떠밀었다. 메모장에 묵혀 두었던 이름들이 그림처럼 둥둥 떠올랐다.

“나는 만나 본 적 없는데도 그 사람들 이름 기억해. 한 글자도 안 틀리고 세 명 다 말할 수 있어. 하필이면 세 개 다 흔해빠진 이름들이라 같은 이름 가진 사람도 자주 만나. 그러 면 나는 출신 고등학교부터 확인해. 걸리기만 하면 어떻게 해 버리려고. 나도 이래. 심지어 나도 이래. 그런데 언니는 다 알 거 아냐. 그 사람들 말투, 입꼬리, 눈빛, 머리카락, 교복 은 바지를 입었는지 치마를 입었는지, 전학 가던 날 롤링페이퍼에 그 사람들이 뭐라고 썼는 지. 그런데 어떻게 그 사람들 이름을 잊어. 왜 눈에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해? 아직 못 잊 어서 이런 봉사 활동이나 하고 있는 거 아냐? 다른 기억으로 덮어 보려고.”

언니가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저 창백하고 동그란 얼굴이 화를 낼 줄은 알 까. 바닷물에 젖어 번뜩거리던 언니의 검은 다이빙 슈트는 어느새 말라 칙칙해져 있었다.

“거짓말 아니야.”

언니가 말했다. 겨우 그 한마디 들었을 뿐인데도 후회스러운 마음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정말로 잊었어. 지나가면서 들어도 놀라지 않을 정도로. 딱 그 정도로만 잊었어.”

언니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어떻게 완벽히 잊겠어.”

나는 무슨 권리로 잊은 흉내를 낸다는 이유로 이 사람을 다그쳤나. 어떤 말을 꺼내야 이

모든 상황을 되돌리고 예전처럼 적당히 멀어질 수 있을까. 미안하다고 말하면 되려나. 하지 만 그 사람들도 롤링페이퍼에 정말로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쓰지 않았는가. 나는 그 사람들 과 똑같은 사람인 건가. 정신없이 흘러가는 생각에 휩쓸려 저릿하게 굳어버린 몸을 주머니 속 진동이 깨웠다. 입수하기 전 맡아 두었던 언니의 휴대폰이 울리고 있었다. 나는 삐걱거 리는 팔을 겨우 움직여 작은 휴대폰을 꺼냈다.

‘심해인’

내 휴대폰 메모장에 기록된 이름들 중 첫 번째, 언젠가 우연히 마주치는 상상을 하는 이 름들 중 첫 번째. 그 사람의 이름이었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여보세요, 해인아.”

멍한 귓가에 언니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 이름이 저렇게 친근하게 부를 수 있는 이름이었던가. 덜걱거리며 내려앉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작은 미소가 떠오른 언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성적 잘 나왔나 보네, 다행이다. 거봐, 틀리더라도 열심히 하면 기분이 덜 나쁘지?”

언니는 이제 환하게 웃으며 상대가 앞에 있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만 가르쳐 준 거지. 나머지는 다 해인이가 한 거야.”

나는 바닷물이 말라 흰 소금이 묻어나는 언니의 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위에 묻어나는 온화한 미소도 눈에 담았다. 언니는 언제부터 그 이름을 따뜻하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된 걸까. 어떻게 하면 텅 비어버린 시간을 누군가를 위하는 마음으로 채울 수 있는 걸까. 완벽히 괜찮아질 수는 없더라도 가끔 웃을 수 있다면 충분한 게 아닐까. 생각해 보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 중에서 완벽히 정상적인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받은 상처를 되갚아주기 전까지는 절대 부를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그 이름을 언니는 상처 위에 포개어 부르고 있었다. 자신의 낙하를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바다의 밑바닥으로 서서히 가라앉는 고래처럼, 그 과정에서 하나의 우주를 만들어내는 고래의 살결처럼. 언니는 그렇게 고요하게 밑으로 낙하하며 상처를 보듬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밑으로 바다가 잔잔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나는 저 멀리 어딘가에서 느리게 낙하하고 있을 고래를 상상했다. 심해를 지나 밑바닥에 닿기까지 그 여정이 얼마나 어둡고 아득할지는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우주가 그 몸에 올라타 함께하고 있으니, 부디 외롭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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