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김미현 교수(국어국문학과)의 마지막 비평과 제자들의 글을 엮은 ‘젠더 프리즘, 그 이후’(2025)가 출간됐다. 기획부터 출판까지, 모든 과정에는 제자들의 손때가 묻어 있었다. 김미현 교수에게서 문학을 배운 연구자 13명이 책을 쓰고 다듬었다. 이들은 ‘그림자의 빛’(2020)을 보는 방법을 알게 해준 스승을 애도하는 마음으로 한 자 한 자를 눌러썼다. 본지는 ‘포스트 김미현 세대’인 김윤정 교수(호크마교양대학), 박구비 교수·허윤 교수·황지선 연구교수(국어국문학과)를 만나 여성문학 비평의 궤적을 따라가 봤다.
제자 13명이 스승의 글을 덧쓰는, 거대한 공동 프로젝트를 기획한 계기는
윤│1주기에 선생님의 마지막 글들을 모은 ‘더 나은 실패’(2024)라는 비평 선집이 나왔어요. 그 후로 선생님을 잘 기억할 방법을 고민하다가 올해 2주기를 기념해 선생님의 글과 제자들의 글을 엮었습니다. 선생님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책이 없다는 아쉬움도 컸었고요.
구비│‘더 나은 실패’에 대한 제자들의 응답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함께 글을 쓰면서, 함께 선생님을 생각하자는 마음으로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무엇보다 글을 통해 제자들을 보고 싶으실 테니까요.
같이 공부한 동학(同學)이자 선후배들이 모여서 만든 책인데, 제작 비하인드가 있다면
윤│책의 표지를 보고 여러 사람이 ‘김미현 선생님 옷장 같다’라고 얘기했던 기억이 나요. 선생님이 컬러풀한 의상을 좋아하시고, 의상에 맞춰서 메이크업과 액세서리도 통일하는 스타일로 유명하셨어요.(웃음) 사람들에게 선생님을 떠올리게 하는 효과가 있었던 것 같아요. 또, 편집을 맡아 주신 민음사 강소희 편집자가 선생님 제자이기도 해요. 민음사 한국문학팀 박혜진 팀장도 우리대학 국어국문학과 출신이라 더 넓은 의미의 공동 작업이 됐습니다.
김미현 교수의 ‘젠더 프리즘’(2008)은 몸, 환상, 가족, 동성애, 여성 이미지, 동물성을 비롯한 열두 가지 프리즘으로 한국문학을 비췄다. 기존 페미니즘 비평의 맹점을 짚고, 다음 세대의 문학 비평이 나아갈 길을 모색했다. ‘젠더 프리즘’에서 제시한 키워드는 17년이 지난 지금도 그 빛을 잃지 않았다.
‘젠더 프리즘, 그 이후’에서 허윤 교수는 ‘김미현론’을 저술해 학자 김미현의 역사를 살폈다. 김윤정 교수는 ‘몸’을 키워드 삼아, 한·중·일 여성 SF 문학을 비교했다. ‘인간의 살’에 한정됐던 몸의 주체가 동식물, 로봇 등 비인간으로 확장된 점에 주목했다. 황지선 교수 역시 ‘인간의 이성으로 재단한 후에야 조금 이해할 수 있는 저열한 존재’였던 동물에 집중함으로써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어느 때보다 다양한 여성 서사가 등장하는 지금, 박구비 교수는 가족 내에서 타자화됐던 어머니와 딸 서사를 중심으로 ‘가족’이 수행적으로 재발명되는 지점을 살폈다. ‘포스트 김미현 세대’가 그리는 문학은 그렇게 소외된 존재와 맞닿아 있다.
2008년 ‘젠더 프리즘’의 열두 가지 키워드를 나눈 과정은
윤정│선생님께서 제기했던 문제의식과 질문에, 오늘날 다시 대답할 수 있는 주제를 택하다 보니 맞는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배정이 된 것 같아요. 같은 키워드를 통해 이전의 ‘젠더 프리즘’과 ‘젠더 프리즘, 그 이후’가 공명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선생님의 책과 우리의 책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거죠. 선생님은 돌아가셨지만, 책을 통해 연결되면서 여전히 살아 있는 관계를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구비│연구자마다 색깔이 다르고 관심 분야가 다르잖아요. 프리즘에서 여러 색의 빛이 나오듯이 각자 다양한 연구 방향을 가지고 있어서 배분이 잘 됐습니다. ‘어떻게 제자를 이렇게 키우셨지’ 싶기도 했어요.(웃음)
‘젠더 프리즘’과 동일하게 핵심 키워드를 병렬로 배치해 서술했다
윤정│‘젠더 프리즘’의 키워드 12개는 사실 하나의 관통하는 주제, 이론으로 엮을 수 없어요. 프리즘의 정의 자체가 모두 다른 모습으로 발산하는 거잖아요. 병렬 배치라는 서술 방식을 그대로 가져온 것도 키워드 사이에 위계가 없기 때문이에요. ‘젠더 프리즘, 그 이후’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감정, 감각, 환경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수평적으로 연결해 놓은 책이라고 볼 수 있어요.
‘포스트휴먼’이라는 키워드가 새롭게 들어왔는데, 페미니즘과는 어떻게 맞닿아 있나
윤│포스트휴머니즘은 근대적 인간을 넘어서자는 개념이잖아요. 근대의 상상은 늘 백인, 서구, 남성, 엘리트를 중심으로 설명돼 왔어요. 이들만이 인간화될 수 있었고, 유색인, 비서구, 여성, 퀴어, 동물은 비인간화됐습니다. 페미니즘은 이러한 근대적 남성성에 문제를 제기했어요. 포스트휴머니즘은 근대 문명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서로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페미니즘 비평을 기본값으로 위치시킨 김미현 교수는 문학계에서 어떤 존재로 남아 있나
지선│페미니즘 비평의 문을 여신 분이죠. 생전에 ‘언제나 자신이 잊히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셨는데, 절대 잊힐 일은 없을 것 같아요.
윤정│선생님 이전에도 여성문학이 있었지만, 선생님은 여성문학의 학술적 지평을 마련하신 1세대라고 볼 수 있거든요. 여성이라는 기표를 다시 구성하신 분이라고 생각해요. 이전에는 여성문학이 ‘생물학적 여성’만을 대상으로 논의했다면 선생님은 남성의 문학 안에서도 여성성을 보고, 여성의 문학에서도 여성을 가장한 남성성을 보셨어요. 경계를 왔다 갔다 하며 여성문학의 저변을 넓히신 거죠.
스승의 글을 제자가 덧쓰는 행위는 어떤 의미였나
지선│선생님께서 수많은 가지가 펼쳐져 있는 커다란 나무를 심으셨다면, 저는 그중 하나를 잡아서 가지를 좀 더 키웠어요. 선생님이 피우신 꽃 옆에 나만의 색깔을 가진 꽃을 놓아보고 싶은 마음으로요. 평소 선생님께서 ‘언제나 학문으로 만나자’고 말씀하셨는데, 이번 작업을 통해서 선생님의 뜻을 느꼈습니다.
구비│양피지에 글을 쓰듯, 선생님의 기억과 글이 내 안에 남긴 자국 위에 조금씩 내 글을 보탠다고 생각했어요. 나중에는 제 글도 지워지고 흔적으로 남겠죠. ‘그런 자국들 위에 계속 쓰는 과정이 문학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포스트 김미현 세대의 비평은 어떤 모습인가
윤정│아직 우리는 진짜 고민을 시작하지 않았어요. 이 책이 우리끼리 소박한 위로와 애도를 나누는 장이었다면, 이제부터 김미현 선생님의 성과를 논의하고 이어갈 담론을 마련해야 해요. 3주기, 4주기를 넘어 여성문학장에서 선생님이 제기한 문제의식을 이어 나갈 장기 계획을 짜야 하는 거죠.
김미현 교수를 기억하는 우리대학 학생들에게 한 마디
윤정│‘여성문학이 궁금하면 김미현 선생님의 책을 찾아라. 거기서부터 공부를 시작하면 된다’라고 말해 주고 싶네요. 과거에 머무는 책이 아니라, 여전히 유효한 논점을 다루셨기 때문에 충분히 공부가 될 거예요.
윤│이걸로 마무리하면 될 것 같아요.(웃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