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정보 유출 막지 못한 서울시
전문가들, 재테크 위주 정책 지적
# 우리대학을 졸업한 ㄱ씨는 서울시가 운영하는 청년 재무상담 프로그램 ‘영테크’에서 한 자산관리사를 소개받았다. 자산관리사는 영테크 상담이 끝난 후에도 ㄱ씨에게 접근해 특정 금융상품을 권유했다. ㄱ씨는 그가 “서울시가 인정한 전문가”이기 때문에 믿고 상품에 투자했지만, 만기가 지난 후에도 원금을 돌려받지 못해 1340만 원의 손실을 입을 위기에 처했다. 피해를 인지한 ㄱ씨는 경찰서와 서울시, 금융상품 회사에 방문하는 등 여러 가지 시도를 헀지만 아직 원금 반환이 이뤄지지는 않았다.
20대 청년들이 영테크로 만난 자산관리사 박씨에게 금융사기 피해를 입었다. 박씨와 상담을 진행한 청년 중 14명이 사기를 당했고, 손해 규모는 약 2억7천만 원으로 파악됐다. 피해자들은 영테크의 상담 방식과 서울시의 미흡한 관리를 사건의 근본 원인으로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사업 초기부터 우려됐던 문제들이 현실화된 것이라 평했다. 영테크는 청년을 대상으로 1:1 재무상담 및 금융교육을 제공하는 서울시 사업이다.
박씨는 2023년 영테크 자산관리사로 활동하면서 만났던 청년들에게 자신이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는 회사의 금융상품 가입을 유도하며 사기 행각을 벌였다. 그는 높은 수익률을 미끼로 블랙골드홀딩스(홀딩스)라는 회사의 강남 소재 부동산 조각투자 상품과 채권 상품을 추천했다. ㄱ씨는 부동산에 일괄 500만 원, 채권에 매달 70만 원씩 입금했는데, “(부동산 조각투자 상품의) 만기가 지나도 돈이 들어오지 않아 의문을 가지다가 사기인 것을 알아차렸다”라고 설명했다. 채권 상품은 금융당국의 인허가를 받지 못한 불법 금융상품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 다른 피해자인 ㄴ씨도 영테크를 통해 박씨를 만나 상품에 투자했다가, 원금 약 1000만 원을 잃을 부담을 떠안았다.
원칙적으로는 영테크 상담 과정에서 자산관리사가 특정 상품을 추천해서는 안 되지만, 피해자들은 상담 진행 중에 상품을 권유받았다. ㄴ씨는 2023년 중순 영테크를 통해 박씨와 상담을 진행했고, 영테크가 제공하는 3회 상담을 모두 이용했다. ㄴ씨가 문제가 되고 있는 상품에 가입한 시점은 영테크 상담이 완전히 종료되기 이전이었다. 서울시는 자산관리사와 청년 모두에게 영테크 상담 과정에서 상품 추천은 금지된다는 내용을 여러 차례 고지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ㄴ씨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영테크 상담 중 특정 상품을 추천하는 행위에 대한 별도의 제재는 없었다.
피해자들은 현행 서울시의 영테크 운영 방식으로는 자산관리사의 개인적인 연락을 막을 방법이 없다고 비판했다. 박씨는 영테크를 통해 수집한 청년들의 개인정보를 영테크 자산관리사 해촉 이후에도 활용했다. ㄱ씨는 상담 과정에서 자산관리사와 자연스레 번호를 공유하게 되는 상황을 문제 삼았다. 상담에 참여한 청년은 본래 자산관리사의 번호를 알아서는 안 되지만, “상담을 받을 때 개인적으로 전화가 와서 (박씨의) 번호를 알게 됐다”라고 설명했다. 영테크처럼 청년들에게 재무상담을 제공하는 ‘광주청년드림은행’의 위탁업체 광주청년지갑트레이닝센터(광주청지트)는 상담사와 청년 사이에서 개인적인 접근이 이뤄지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고 있다. 광주청지트 박수민 상임이사는 청년의 개인정보를 보호하기 위해 “상담사 개인 휴대전화가 아닌 사무실 내 정해진 유선 전화로만 내담자와 소통할 수 있도록 한다”고 전했다.
영테크 상담이 지정된 장소가 아닌 일반 카페 등에서 자율적으로 진행된 점도 문제 발생의 원인으로 꼽혔다. 청년이 자산관리사와 공적인 공간이 아닌 사적인 장소에서 만나면서 금융 사기 위험에 쉽게 노출될 수 있다는 것이다. 광주청지트는 정책 홍보 및 가벼운 정보 전달을 위한 상담 부스 이외에는 청년이 직접 센터를 방문해 기관 내부에서 상담을 진행하는 방식으로만 사업을 운영한다. 박 상임이사는 “상담사가 취득한 정보가 외부로 유출되는 문제를 예방하는 것과 함께 청년의 기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이러한 방식을 택했다”고 말했다. ㄱ씨는 “영테크도 정부에서 하는 사업인데 서울시청 같은 기관 내부에서 상담을 진행하는 것이 맞지 않나”라는 의견을 밝혔다.
피해자들은 서울시와 영테크 사무국의 미온적인 대응을 지적하기도 했다. ㄱ씨보다 이른 시점에 박씨와 상담을 진행했던 피해자가 6월과 8월 사무국에 피해 사실을 알렸지만, 별다른 조치는 없었다. 오히려 서울시는 박씨로 인한 피해 사실을 인지한 이후인 20일 성수동에서 영테크 사업을 홍보하고 재무상담을 진행했다. 언론 취재가 시작된 후에야 서울시는 전수조사에 나섰다. 사무국 또한 피해자들이 단체가 아닌 개인으로 방문하면 도와주기 어렵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사안이 공론화되자 22일 사무국은 청년금융피해 전담팀을 꾸려 피해자들에게 무료 법률 지원 서비스, 피해 유발 판매사 방문 동행 등을 지원하겠다는 문자를 발송했다.
전문가들은 청년들의 재테크를 돕겠다는 명목으로 만들어진 영테크의 정책 방향성 자체를 꼬집었다. 영테크의 전신 사업에 참여했던 금융과미래 한영섭 대표는 “(영테크는) 자산관리사가 금융상품 판매를 통해 얻을 개인 수입에 대한 유혹과 구체적인 금융상품 추천을 바라는 청년들의 수요가 맞아떨어져 이러한 사건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고 말했다. 청년들의 자산 증식을 목표로 하는 정책이기 때문에 예견된 문제였다는 것이다. 박 상임이사도 현재 발생한 문제는 영테크 도입 초기부터 우려됐던 부분이라며, 서울시가 해당 사업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사업의 목표를 재테크를 통한 자산 형성으로 뒀다는 점에서 자산관리사 한 명의 일탈과 사기로만 문제를 진단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이어 “영테크 사무국인 한국에프피에스비(FPSB)의 교육 및 재무설계 내용을 보면 투자를 주요하게 다루는 업체”라고 분석했다. 한 대표도 “위탁업체 선정부터 그 업체의 사업 철학을 충분히 고려하는 등 신중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남대문경찰서는 피해자들이 박씨와 홀딩스 대표를 상대로 제기한 고소 사건(사기 및 유사수신행위법 위반 등)을 수사 중이다. 홀딩스는 영테크뿐 아니라 SNS 광고, 인터넷 재무상담 서비스 등 수법을 활용해 300억 원 이상의 피해액을 발생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시는 박씨가 영테크 사업 기간 동안 취득한 정보를 악용하고, 특정 상품을 판매한 것에 대해 법적 책임을 물을 예정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