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미선(신방·88년졸) 여행작가
최미선(신방·88년졸) 여행작가

졸업 후 동아일보사 기자로 10여 년 일했다. 사직한 뒤로는 지구촌 곳곳을 여행하며 책을 쓴다. 『국내여행 버킷리스트 101』 『대한민국 역사여행 버킷리스트』 『지하철로 떠나는 서울&근교여행』 『산티아고 가는 길』 『사랑한다면 스페인』 『사랑한다면 파리』 등을 썼고, 얼마 전부터 유튜브 채널 ‘호랑이여행’을 운영하고 있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하버드 박사 출신 미국인이 오랫동안 한국에서 살면서 느낀 점을 담은 에세이 제목이랍니다.

살다 보면 우연찮은 계기로 인생의 방향이 바뀌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겐 그 계기가 여행입니다. 기자 생활 중에 제 별명은 ‘밤도깨비’였습니다. 원고 마감하자마자 한밤중에 훌쩍 차를 몰고 강릉 바닷가에 가서 고작 자판기 커피 한 잔 마시고 돌아온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번개여행’ 하다가 결국 기자 일을 불쑥 때려치우고 ‘어쩌다 여행작가’가 되다 보니 가끔 듣는 말이 있습니다. “여행이 일이니 얼마나 좋아요~.”

하지만 그 말처럼 여행이 일이다 보니 마냥 좋기만 한 건 아니랍니다. 흔히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고, 그동안 집보다는 길에서 보낸 시간이 훨씬 많다 보니 길 위에서 단맛, 쓴맛, 매운맛에 별별 오묘한 맛까지 다 봤으니, 세상에 쉬운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여행을 하다 보니 사소한 것에 감사하는 일은 많아졌답니다. 특히 800km 걸음 여정인 ‘스페인 산티아고길’에선 더더욱 그랬는데요. 날마다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배낭을 메고 걷다 숙소에 들어갔을 때 잠자리가 생각보다 편하거나 기대하지 않았던 음식이 먹을 만할 때, 심지어 똑똑 두드린 화장실이 비어있을 때도 엄청 고마웠답니다. 이렇듯 일상생활에서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것이 얼마나 감사한 건지 새삼 느끼게 해준 것도 여행입니다.

어쨌든 여행은 일상에 지친 나를 놓아주는 한 방편으로, 많은 사람이 버킷리스트 1순위로 꼽는 것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이렇게 토를 답니다. ‘여유가 있다면~’. 하지만 그 ‘여유’라는 건 사람마다 다르다 보니 흔히 이런 우스갯소리들을 하기도 합니다. ‘젊어선 돈이 없어 못 가고~ 중년층이 되면 시간이 없어 못 가고~ 늙으면 다리가 떨려 못 간다~’고. 그러니 문득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아일랜드 극작가,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 떠오르기도 했답니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반면에 몇 년 전, 프라하 민박집에서 만난 청년도 떠올랐는데요. ‘5박6일 동안 6개국을 돌았는데 그동안 뭘 봤는지 제대로 기억나는 게 없다’라며 툴툴대던 모습입니다. 모처럼 별러서 온 여행이니 보다 많은 곳을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야 이해하지만 많은 것을 쥐려고 욕심내다 보면 어느 것 하나 잡을 수 없듯 여행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남들 눈에 좋아 보이는 여행도 일이다 보니 몸 어딘가가 시원찮으면 만사가 귀찮기도 했는데요. 걷는 여행을 좋아해 국내든 해외든 주야장천 걷다 보니 제 경우는 발이 제일 고생이랍니다. 특히 자전거 ‘쌩초보’였기에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걱정도 많았지만 45일 동안 꿋꿋하게 서해안을 거쳐 남해안 찍고 동해안을 돌아오는 자전거 해안 일주에서 가장 고생한 건 역시나 열심히 페달을 밟았던 발이었습니다. 그래도 그 여행이 지금껏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몸짱 열풍’이 한창인 우리 사회에서 ‘진정한 몸짱’ 분들을 꽤 많이 접했기 때문입니다.

“이것들이 우리 자식들 다 먹여 살린 기라”면서 자신의 키보다 훨씬 긴 장대를 휘저으며 거친 파도에 쓸려 다니는 미역을 한줄기라도 더 건져내려 애쓰던 울진 할머니, “아, 놀면 뭐 해. 손발 움직일 수 있을 때 일 해야제”라며 간간이 허리를 두드려가며 온종일 다시마를 씻어 말리시던 보길도 할머니, 이른 아침부터 퉁퉁 부은 손으로 밭일을 나오셨던 부안 할아버지는 “내가 말이여~ 이 손으로 서울, 안양, 안산, 수원, 전주, 울산… 자식들을 대한민국에 다 깔아놨지라. 인자 나는 전국 어딜 가도 든든하당게~”라며 환한 웃음을 짓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렇게 묵묵하게 최선을 다하며 살아온 이 땅의 어머니 아버지들이야말로 제 눈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몸짱’이었던 겁니다. 그때 길을 달리며 생각했습니다. 근육 없는 몸이, 날씬하지 않은 몸이 부끄러운 게 아니라 무위도식하는 몸이 정녕 부끄러운 몸이라고….

저 또한 점점 그분들 나이에 가까워진, 환갑이 훌쩍 넘은 상황에서 살짝 틀은 또 다른 방향이 있는데요. 그동안 SNS와 거리가 멀었던 제가 인터넷 찾아가며 열심히 독학해서 작년 여름부터 유튜브를 시작한 겁니다. 물론 여행지에 얽힌 흥미로운 역사, 문화, 인물 이야기들을 풀어놓는 원고를 쓰고 녹음하고 편집까지 하는 게 녹록지는 않지만 무엇보다 아침에 눈 뜨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게 행복합니다.

이제 졸업 후 또 다른 세상을 마주해야 할 후배님들도 이런저런 진로 고민이 많을 겁니다. 그런 후배님들에게 저 또한 살짝 전해드리고 싶은 말도 바로 이겁니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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