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10시.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평소 같으면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크게 들으며 걸어갔을 길이었겠지만 그날은 아무것도 끼지 않았다. 학교에서 지금 살고 있는 자취방까지, 걸어서 10분도 채 되지 않는 나의 하굣길은 눈을 감고도 걸어갈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하고 편한 길이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며칠 전 확인했던 뉴스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 주위를 살피며 걸었다. 어둠이 깔린 거리를 눈과 귀로 확인하며, 원래 이 시간에 사람이 이렇게 없었나, 생각하기도 했다.

살고 있는 오피스텔 근처에 다다랐을 무렵에 왼쪽 뒤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주 가까이, 시야가 닿지 않는 곳에 사람이 있다는 걸 깨닫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사람은 공포를 마주했을 때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을까. 그날의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그저 걷고 있던 속도에서 아주 조금 더, 천천히 걷는 것뿐이었다. 곧이어 검은 자켓을 입은 남자가 나를 앞질러 걸어갔다.

2주 전이었다. 11월3일 오후8시50분경. 신촌의 한 거리에서 술에 취한 20대 남성이 모르는 여성을 길에서 폭행했다. 또, ‘묻지마 폭행’이었다. 피해자는 그날의 나처럼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걷고 있었다.

사건이 기사화된 이후, 주위 사람들이 기사를 첨부하며 걱정 어린 메시지를 보내왔다. 공포와 분노가 뒤섞인 반응들이 함께였다. 뉴스 보도를 확인하기 위해 영상을 틀자, 기자의 목소리와 함께 뒤로 깔리는 배경은 나도 아는 길이었다. 그 길은 나도 매주 신촌에서 열리는 동아리 모임을 마치고 돌아올 때 지나기도 하는, 신촌에서 시간을 보내는 날이면 언제나 지나치는 길에서 한 블럭도 더 들어가지 않는 길이었다. ‘인적 드문 길’이라고 하기엔 바로 앞에 대로변이 있는 길이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그냥, 집에 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늘 집에 가는 길을 걱정한 적이 많았다. 나 스스로뿐만 아니라, 여성인 친구와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밤이면 친구의 뒷모습에 대고 “집에 가면 꼭 연락해!” 소리치는 게 습관이 됐다. 그저 인사치레라기 보다는, ‘정말 안전하게 집에 도착했는지’가 진심으로 걱정됐다.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 친구의 연락에 덜컥 전화를 걸어 확인해 본 적도 있었다.

집 가는 길이 ‘걱정이 되는’ 현실이다. 집에 가는 길은 그저 집에 가는 길일 뿐인데도. 누군가가 뒤따라오진 않을지, 같이 엘리베이터를 탄 저 사람이 현관문 앞까지 쫓아오진 않을지 걱정한다. 안전하게 사는 것, 그게 그렇게 힘든 일인가? 그저 길에서 지나가는 모르는 사람이 나를 폭행하지 않기를, 늦은 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음껏 이어폰을 끼고 걸어도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게 큰 꿈일까. 홀로 집에 돌아가는 친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걱정된다’는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있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나조차도 덜컥 겁부터 났다. ‘여대생이 모여 살기 때문에 안전하다’는 이유 하나로 날이 가면 갈수록 비싸지는 월세를 주며 학교 앞에서 살고 있지만, 자취방에서 뛰어서 10분도 채 안 될 거리에서 또 여성이 모르는 남성에게 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은 공포로, 그리고 공포는 분노로 속절없이 변해갔다. 집에 가는 길엔 신경이 예민해졌고 지나가는 모든 사람을 경계하는 버릇이 다시 도졌다.

신촌, 특히 이대 앞 주거환경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혼자 사는 여성이 안전해지기 위해 여성이 모여 살고 있는 곳을 찾고, 그곳은 날이 갈수록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위한 비용이 비싸진다. 그리고 그건 마치 이곳을 지배하고 있는 원리인 것처럼 공유된다. 그렇게 살아가는 장소에도 위협은 멀리 있지 않다. ‘안전하다’는 감각을 보장받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값은 점점 더 오르고, 그저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기를 원했을 여성은 또다시 그 값을 지불한다. 누군가는 그걸 감당하지 못하기도, 누군가는 그렇게 버티고도 공포에 떨기도 하면서. 그 주체는, 여성이 된다. 그저 안전하게 살아가기를 원했을 뿐인데도. ‘어쩔 수 없다’, ‘원래 그렇다’고 말하기엔 그 밑에 깔린 짙은 어둠이 있다.

중학교 2학년 도덕 시간, 선생님이 수업 도중에 반 학생들 모두에게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누군가에게 물리적으로, 혹은 성적으로 위협을 받아본 적이 있냐는 질문이었다. 그때 교실의 절반 정도를 채우고 있던 인원이 손을 들었다. 모두 여성이었고, 그 안에는 나와 도덕 선생님도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이 현실을 마주하고 아찔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건 이번에 느낀 공포나 분노와 여전히 같은 종류일 것이다.

집에 가는 길을 조심하는 것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나의 동기가, 스쳐 지나가는 벗이, 세상 어딘가에서 집에 가는 길을 걷고 있을 어떤 여성이. 그 모두가 집에 가는 길을 걱정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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