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호 무용수 · 예술감독 인터뷰
편집자주| 한국을 떠나 오랜 세월 타국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오히려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에 큰 의미를 두고 살아간다. 무용수이자 예술감독 남영호(무용과·89년졸)씨도 마찬가지였다. 대학 시절, 자신만의 색을 고집해 친구들로부터 ‘남개성’이라 불렸던 그는 이방인의 삶 속에서도 한국이라는 뿌리에 대한 탐구심과 애정을 놓지 않았다. 그 깊어진 애정은 그를 한국문화축제 총감독 자리로도 이끌었다. 2월5일, 겨울에도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프랑스 남부 도시 몽펠리에에 위치한 자택에서 그를 만났다.
프랑스에서 다시 나를 발견하다
남씨가 처음 프랑스에 발을 디딘 건 대학 졸업 다음 해인 1990년, 파리였다. 소르본 대학에서 1년간 공부하던 중, 우연히 몽펠리에에서 열린 오디션 겸 워크숍에 참여하게 됐다. 워크숍에서 좋은 평가를 받아 프랑스 대표 무용단 중 하나인 ‘자키 타파넬 무용단’에 발탁된 그는 그해 9월부터 무대에 서기 시작했다. 연간 50회에 달하는 공연 일정 속에서 그는 “집에 있을 시간이 없을 만큼” 무용에 몰입했다.
눈 뜨면 춤을 췄고, 눈을 감아도 춤이 생각났다. 무용만 생각하며 활동한 7년, 남씨는 어느덧 최고참 무용수가 돼 있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말을 좋아한다는 남씨는 무용단을 나와 자신만의 무용단 ‘코레그라피(Corégraphie)’를 창단했다. 프랑스어로 ‘안무’를 뜻하는 ‘Chorégraphie’에서 따온 무용단의 이름은 ‘한국(Corée)’과 ‘그리다(graphie)’를 재치있게 결합한 말이기도 하다. 그는 한국적인 미학을 담은 창작 무용을 통해 자신의 뿌리를 움직임에 고스란히 새기고자 했다.
“나는 밥을 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밥 짓는 법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무용수마다 신체 조건과 성격도 모두 다르기에, 정형화된 몸짓이 아닌 자신만의 움직임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남씨의 철학이다.
현대무용을 전공한 남씨는 프랑스에서 활동하며 점차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질문하게 됐다. 그는 한국무용이 ‘숨(息)’과 ‘선(線)’의 미학을 중심으로 구성된다는 점에 주목했다. 특히, 호흡을 기반으로 한 느린 움직임과 내면의 감정을 절제한 동작은 서구의 직선적이고 외향적인 현대무용과는 다른 결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전통적 요소를 단순히 재현하거나 반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만의 창작 언어로 재해석하고자 했다. 그에게 창작은 전통을 답습하는 것이 아닌, 전통이라는 나무에서 새로운 가지를 뻗어내는 일이다.
'코레디시 페스티벌', 예술로 한국과 프랑스를 잇다
무용수로서 커리어를 이어가던 남씨는 2006년, 한불 수교 120주년을 맞아 프랑스에서 기념 공연을 기획했다. 10년 후, 2016년에는 한불 수교 130주년을 계기로 그는 새로운 형식의 한국문화축제를 몽펠리에에서 시작했다. 바로 ‘코레디시 페스티벌’이다. ‘여기에 한국이 있다’는 의미의 코레디시 페스티벌은 당시에는 생소했던 한국이라는 나라를 몽펠리에에 소개하고자 기획한 축제다. 페스티벌은 10일간 한국을 주제로 한 공연과 전시, 경제 포럼, 교육 프로그램을 아우른다.
매년 축제 기간이 되면 몽펠리에 일대는 ‘작은 한국’으로 변모한다. 남씨는 “코레디시 페스티벌을 계기로 프랑스와 한국이 서로의 언어로 함께 춤출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코레디시 페스티벌은 단순한 문화 공연이 아닌 복합적인인 예술·교류의 장이다. 축제에는 남씨가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며 오히려 더 선명해진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한국에 대한 애정이 깊이 스며 있다. 그는 예술을 통해 교육과 관광, 경제까지 아우르는 장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첫 회부터 10년을 내다보고 축제를 기획했다. 페스티벌 이후 몽펠레에에는 프랑스 최초로 한국어 수업이 공식 교육과정으로 도입됐고, 몽펠리에를 찾은 한국인 관광객 수도 4배가량 증가했다. 그의 삶이 녹아든 작업이 끌어낸 결과물이었다.
제2의 언어, 춤
많은 변화를 만든 프랑스 생활이었지만, 늘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남씨는 “프랑스는 겉으로 보면 불편하지만 자세히 보면 디테일이 뛰어난 나라”라고 말한다. 생활의 편의성이나 행정 절차 측면에서 불편함이 많지만, 작은 것 하나에도 신경쓰는 섬세한 문화라는 뜻이다. 남씨는 남이 어떻게 나를 보는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프랑스 분위기 속에서 스스로를 더 깊이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저는 오히려 프랑스에 와서 애국자가 됐어요.” 한국과 너무도 다른 나라에 살았기에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더욱 선명히 자각하게 됐고, 이를 예술로 승화시키기도 했다. 다만 외국 생활이 모두에게 맞는 건 아니라며 “외국에서 산다는 건 생각보다 외롭고, 그 고독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후배들에게 프랑스 정착을 추천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사람마다 다르다”고 답했지만, 분명히 강조한 한 가지는 ‘자기만의 개성을 찾아라’는 것이었다. “나만의 것을 찾으세요. 어디서든 중요한 건 자기만의 색깔이에요.”
60대에 접어든 그는 그동안 자신이 쌓아온 몸의 경험을 전달하는 사람으로의 전환을 준비 중이다. “방향을 제시해 줘야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오래 가기 힘들어요.” 그에게 예술은 결국 움직임 속에 철학을 담는 일, 춤을 통해 자신의 언어를 말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