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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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일어난 강남역 살인 사건은 우리 사회에 ‘여성혐오’ 개념 정립의 필요성을 제시했다. 이를 기점으로 8년간 여성혐오는 기성 언론에서 꾸준히 등장했다. 2024년 11월15일 기준 10대 종합 일간지에서는 1345개의 여성혐오 관련 기사가 발행됐다.

8년 동안 꾸준히 늘어난 여성혐오 범죄에 대한 인식은 10월15일 여성혐오를 범행 동기로 인정한 국내 첫 판결로 이어졌다. ‘진주 편의점 폭행 사건’ 가해자 남성에 대해 재판부가 “여성에 대한 근거 없는 혐오와 편견에 기반한 범행 동기”라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여성혐오’ 범행 동기 인정 배경은

진주 편의점 폭행 사건은 2023년 11월 경상남도 진주시 한 편의점에 손님으로 방문한 20대 남성이 머리가 짧다는 이유로 여성 근로자를 무차별 폭행한 사건이다. 10월15일 열린 2심 재판에서 가해 남성은 원심과 동일한 징역 3년을 선고받았지만 2심에서 발표한 창원지방법원 제1형사부 판결문에서 최초로 범행 동기를 여성 혐오로 규정했다.

범행 동기로 여성혐오가 인정된 배경에는 여성 단체의 연대가 있었다. 진주 편의점 폭행 사건 이후, 경남여성회, 여성의당 경남도당, 진주성폭력상담소를 포함한 여러 여성 단체가 결집해 경찰 수사 단계부터 피해자를 도왔다. 경남여성단체연합 윤서영 대표는 “진주 편의점 폭행 사건은 단순 폭행이 아닌 여성혐오 범죄라고 생각했었다”며 경찰 수사 단계부터 해당 사건을 혐오 범죄로 범주화해 강력히 수사할 것을 촉구했다. 윤 대표는 2심 재판 당시 탄원서 제출하고 법원 앞 집회와 재판 방청 연대 집회를 열어 기자회견을 하며 연대 의사를 지속적으로 밝혔다. 이와 같은 여성 단체의 노력 끝에 2심 재판을 담당한 창원지방검찰청(창원지검)은 구형문에 해당 사건의 범행동기를 “여성혐오”로 명시했다. 재판을 담당한 창원지방법원은 창원지검의 구형 사유를 받아들였다. 국내 최초로 법정 판결문에 여성혐오가 기록된 순간이었다.

여성혐오 동기 포함한 판결의 의의는

여성의당 경남도당 정재흔 비상대책위원장은 “이번 판결은 신세대와 구세대의 협력으로 맺은 페미니즘 운동의 결실”이라며 “여성들이 연대해 사회가 해당 사건에 관심 두게끔 노력했기에 재판부가 이를 반영한 것”이라고 말했다. 정 위원장은 “항소심에서 심신미약이 인정돼 형이 가중되지 않은 점은 아쉽지만 1심과 달리 여성혐오적 언행과 심신 미약 사이 연관성을 단절한 판결이라 점에서 유의미하다”고 말했다. 가해 남성은 1심부터 변호인을 통해 심신 미약을 주장하며 여성혐오적 언행을 정당화하려 했지만, 법원은 이를 별개의 사안으로 판단했다. 

사법부에서 여성혐오 범죄를 인정한 것과는 별개로, 여성혐오 범죄 개념이 법적으로 규정된 상태가 아니기에 창원지방법원의 판결이 법적 의미를 지니지 못할 것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서강대 박용철 교수(법학전문대학원)는 ◆판례법이 아닌 ◆성문법을 따르는 우리나라의 사법 원칙을 들며 진주 편의점 폭행 사건 2심 판결은 다른 판결을 내릴 때 참조 정도로 활용되는 수준에 머물 것으로 예측했다. 그럼에도 박 교수는 이번 판결에 상징적 의미가 있음을 말한다. 박 교수는 “(이번 판결은) 여성혐오를 비난할 만한 범행 동기로 여겼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며 판례로서 효력을 기대하긴 어렵지만 사회적으로 관련 문제의식을 환기하고 입법과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봤다. 숙명여대 홍성수 교수(법학과) 또한 “현직 법관이 여성혐오 범죄라는 표현을 썼다는 것 자체는 (여성혐오에 대한) 문제의식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계속해서 유예됐던 여성혐오 범죄 논의

출처=빅카인즈.
출처=빅카인즈.

여성혐오 범죄라는 사실이 법적으로 명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비슷한 범죄는 매년 반복됐다. 빅카인즈(bigkinds.or.kr)에서 키워드로 ‘여성혐오범죄’ 를 검색해, 한 달 동안 120개 이상의 기사가 나온 연도를 분석한 결과, 기사 수 증가를 전후해 굵직한 여성혐오 범죄 사건들이 있었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은 여성 혐오 범죄 논의를 폭발적으로 촉발한 사건으로 꼽힌다. 가해 남성은 강남역 근처 한 주점의 건물 화장실에서 일면식도 없는 여성을 수차례 찔러 숨지게 했다. 피해 여성이 범행 장소에 들어오기에 앞서 7명의 남성이 방문했지만, 8번째로 들어온 여성이 피해자가 됐다. 가해 남성은 “여성이라서 죽였다”고 범행동기를 진술했지만, 해당 사건은 여성 혐오 범죄로 인정되지 않았으며 여성 혐오 범죄에 대한 법적, 제도적 방안의 확립으로도 이어지지 못했다. 

2018년에는 전 세계적인 ‘미투(#Me Too) 운동’이 국내에 들어왔다. 미투 운동은 여성들이 일상에서 경험하는 폭력과 혐오를 수면 위로 드러내며 한국 여성운동의 포문을 열었다. 서지현 검사의 검찰 내 성추행 폭로를 시작으로 문단, 연극계, 영화계, 학계, 종교계 등에서 연이어 미투 운동이 일어났다. 학내에도 스쿨미투 운동이 확산해 여성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2018년 5월에는 여성 대상 불법 촬영 범죄 편파 수사를 두고 수만 명의 여성들이 지하철 4호선 혜화역에 모여 대규모 규탄 집회를 열었다. 2019년 N번방 사태와 버닝썬 사태는 우리 사회 내 만연한 성범죄와 권력 구조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여성의 목소리가 체계적으로 무시되는 현실을 직시하게 했다.

2020년 서울역 폭행 사건과 2022년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 2024년 디지털 성범죄와 교제폭력까지. 수많은 여성살해와 폭력은 여성혐오에서 발생했음에도 그 범행 동기가 여성 혐오로 기록되지는 못했다. 디지털 성범죄는 딥페이크 기술 발전에 따라 범행 방식이 더욱 교묘해져 수많은 피해자가 발생하고 있음에도 교육부는 11일, 관련 조사를 잠정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아직도 여성 혐오 범죄에 대한 법적 논의가 유예되는 상황에서,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으로부터 8년이 지난 2024년에서야 여성 혐오 범죄를 인정하는 판결이 내려진 것이다.

법률 제정뿐 아니라 혐오범죄 입증 과정도 고민해 나가야

판결에서 더 나아가, 여성폭력 방지와 피해자 보호를 국가적 책임으로 규정하는 현행 여성폭력방지기본법의 수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정 위원장은 “여성폭력방지기본법을 더 세밀하게 짤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일면식 없는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여성 혐오 범죄는 묻지마 범죄로 분류될 뿐 여성 폭력으로 정의되지는 않아 피해자가 체계적 보호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윤 대표는 “재판부의 성인지 감수성이 아직 부족하다는 것을 많이 느낀다”며 국민 정서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못하는 사법부도 지적했다. 

박 교수는 “법률 제정뿐만 아니라 범죄의 실질적 입증 과정도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법이 제정되더라도 여성 혐오라는 동기 입증이 어려울 수 있기에 적용까지 많은 논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홍 교수도 “일차적으로는 혐오범죄를 가중처벌 할 수 있는 특별법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며 “이와 함께 경찰 수사 관행이나 실무도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혐오범죄법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경찰 수사, 검찰 기소, 법원 판단 모두가 정확히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수사와 재판이이 개선되지지 않는다면 범죄자의 평소 여성 혐오적 행동 및 발언 여부가 재판에서 입증하기 쉽지않고, 오히려 혐오 범죄로 인정되기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에서다. 평소 여성 혐오적 발언을 하지 않았다면 동기 입증 자체가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혐오 범죄는 묻지마 범죄와는 다르다”며 “혐오 범죄 근절을 위해서는 혐오 범죄법 제정 뿐만 아니라, 사회 저변에 깔린 사회적 약자 또는 특정 집단에 대한 차별을 해소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판례법 : 법원의 재판을 통하여 형성되는 법.

◆성문법 : 문자로 적어 표현하고 문서의 형식을 갖춘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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