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여자 이론은
자신의 취약함을 마주한 여성들의 경험을 가시화하며,
문제의 원인이 여성이 아닌 사회에 있음을 드러냅니다.
고귀한 당신은 고쳐질 필요가 없습니다.
LA(Los Angeles)와 베를린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요하나 헤드바(Johanna Hedva) 작가는 직접 고안한 ‘아픈 여자 이론’을 통해 질병과 장애로 상징되는 타자화된 존재의 소외와 고통을 다뤘다. 그는 만성 질환이나 장애가 없는 이들도 공감의 폭을 넓혀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10월28일 오후5시 학관 108호에서 ‘여성, 장애, 돌봄’을 주제로 요하나 헤드바 작가의 특강(특강)이 열렸다. 그는 한국계 미국인이자 퀴어, 장애인으로서 복합적인 자신의 정체성을 소재로 글쓰기, 영상, 퍼포먼스, 음악 등 다양한 장르를 오가며 작품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특강은 향후 여성, 장애, 돌봄 관련 연구의 발전 방향성을 탐구하고, 그로부터 유의미한 성과를 도출하자는 취지에서 기획됐다.
특강은 헤드바 작가의 강연, 미술사학과 대학원생 5인과의 대담, 질의응답 순으로 진행됐다. 청중의 접근성을 고려해 한영 음성 해설과 동시통역을 제공했다. 통역은 남유정(영어영문학 전공 석사과정)씨가 맡았으며, 약 60명의 학생과 교수진이 참석했다.
헤드바 작가는 두 개의 퍼포먼스 영상을 청중에게 선보이며 특강을 진행했다. 판소리를 기반으로 제작한 ‘Scream Demo’는 가사 없는 음성 퍼포먼스로, 그의 한국인 정체성과 판소리를 향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그는 2018년 어머니의 죽음 이후 한의 정서를 표현하는 판소리에 흥미를 느껴 판소리를 직접 배웠다. ‘Scream Demo’에서 판소리의 전통적 발성을 참고해 목소리와 몸의 한계를 넘어서는 소리를 만들어냈다. 닳고 부서지고 깨져가는 소리도 아름답다는 점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다음 영상은 베를린 거리에서 진행했던 퍼포먼스를 담았다. 영상 속 헤드바 작가는 저승사자 같은 모습으로 기타를 연주했다. 그는 “저승사자는 퀴어 혹은 성별의 탈경계에 있는 존재”라며 영상을 설명했다. 이는 기존 여성성이나 남성성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건강하지도 아프지도 않은 경계를 넘나드는 존재인 작가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시도였다.
이후 미술사학과 대학원생 5인과 헤드바 작가의 대담이 진행됐다. 김다혜(미술사학 전공 석사과정)씨는 헤드바 작가가 사용하는 점성술·주술·메탈 음악과 같은 낯선 표현 방식이 남성 중심 자본주의 사회의 언어를 향한 도전인지 질문했다. 헤드바 작가는 작업에서 사용한 다양한 표현 방식의 언어를 “마법”이라 표현했다. 새로운 언어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지니며, 기존의 질서를 부수고 새로운 세계관을 열어주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에 헤드바 작가는 어떤 부분은 아프고 어떤 부분은 아프지 않은 여성으로 자신을 인식할 때 생성되는 복합적 정체성에 관한 질문을 받았다. 그는 “사회는 당신이 아프지 않더라도 ‘아픈 여자’라는 정체성을 부여할 수 있다”며 “‘아픈 여성 이론’은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을 병적인 존재로 낙인찍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는 이론”이라 답했다. 개인이 스스로를 어떻게 인식하든 사회가 특정 정체성을 강요하는 문제를 지적한 것이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남성이 겪은 트라우마는 ◆셸 쇼크(shell shock)로 진단됐지만, 여성의 유사한 증상은 ◆히스테리(hysteria)로 치부된 사례를 예시로 들어 설명했다.
특강을 마친 강의실에는 청중이 다 함께 부르는 아리랑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판소리를 좋아하는 헤드바 작가에게 아리랑을 불러주자는 최종철 학과장(미술사학과)의 제안 때문이었다. 그 소리를 감상한 헤드바 작가는 “한국어를 더 공부해서 다시 방문한다면 아리랑을 불러드리겠다”고 약속했다. 특강 참석자들은 타자화된 존재들에 대한 통찰이 담긴 헤드바 작가의 ‘아픈 여자 이론’과 그의 신선한 작품들에 만족했다. 한승희(서양화·24)씨는 “때로는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때로는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여성의 마른 몸을 향한 이중적인 사회적 시선에 대해 고민하던 중, ‘아픈 여자 이론’이 비정상으로 규정된 이들을 하나로 묶는 언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장이정(사학·20)씨는 “장애와 장애를 바라보는 사회에 대해 새롭게 접근해 예술로 풀어가는 작가님의 작업 방식이 흥미로웠다”고 소감을 전했다.
◆셸 쇼크(shell shock):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고안된 용어로, 전쟁 중 많은 병사가 겪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유형
◆히스테리(hysteria): 신경증의 한 형태로,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제어할 수 없는 비정상적 흥분 상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