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 드넓은 바다도 한 방울의 물에서 시작된다. 물은 자유자재로 형태를 바꾸며 세상을 여행하고, 가는 곳마다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합창곡 ‘우리는 흐르네’(2024)를 작곡한 이원지(건반·08년졸)씨는 해외에 사는 동문들을 물에 비유했다. 이대학보도 ‘이화는 흐르네’ 코너에서 해외로 떠난 동문들의 발자취를 좇는다. 이번 호에서 는 현재 구글 수석 디자이너이자, 베스트셀러 자기계발서인 ‘생각이 너무 많은 서른살에게’의 저자인 김은주(정보디자인·96년졸)씨의 이야기를 담았다.

김은주 수석 디자이너가 미국 캘리포니아주(California) 마운틴뷰(Mountain View)에 위치한 구글플렉스(Googleplex) 건물 앞에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그는 사진을 촬영한 이 장소가 “뉴스에 구글(Google)이 언급되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곳”이라고 말하며 활짝 웃었다. <strong>안정연 사진기자
김은주 수석 디자이너가 미국 캘리포니아주(California) 마운틴뷰(Mountain View)에 위치한 구글플렉스(Googleplex) 건물 앞에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그는 사진을 촬영한 이 장소가 “뉴스에 구글(Google)이 언급되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곳”이라고 말하며 활짝 웃었다. 안정연 사진기자

“0에서 1을 만드는 일(Zero to One)을 해내고 나면 굉장히 성취감이 커요. 그래서 중독처럼 항상 그런 일을 찾아다니는 것 같아요.” 김은주(정보디자인·96년졸)씨는 1996년 디지틀조선일보에서 웹 디자이너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28년이 흐른 2024년, 김씨는 모토로라(Motorola), 삼성전자를 포함한 10개 이상의 직장을 거쳐 구글(Google) 수석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이제는 연륜이 생겨 결과보다 과정을 즐기게 됐다”는 그를 마운틴뷰(Mountain View)의 구글 사옥 내 카페에서 만났다. 먼 회사 건물 사이를 자전거를 타고 이동할 수 있는, ‘꿈의 직장’이라는 별명에 걸맞은 구글 본사였다.

구글(Google)에서 제공하는 무료 자전거의 모습. 방문자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어 서로 멀리 떨어진 구글 건물들을 쉽게 둘러볼 수 있다. <strong>안정연 사진기자
구글(Google)에서 제공하는 무료 자전거의 모습. 방문자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어 서로 멀리 떨어진 구글 건물들을 쉽게 둘러볼 수 있다. 안정연 사진기자

 

0에서 1을 향해

졸업 후 입사한 첫 직장은 디지틀조선일보였다. 웹디자인이 아직은 생소하던 1996년 당시 김씨는 회사의 첫 번째 웹 디자이너였다. “(웹디자인에 대해)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알아서 하라고 하더라고요. 근데 그게 좋았어요.” 정해진 틀에 맞춰 일하는 것을 답답해하는 그에게 웹 디자이너는 오히려 천직이었다. 디지틀조선일보에서 약 2년간 일한 뒤 이직한 CJ에서는 멀티미디어 디자이너로 일했다.

그러던 중, 김씨는 미국 대학원에 합격한 남편을 따라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남편을 따라온 학생 동반자 비자로는 학교를 다닐 수도, 직장을 다닐 수도 없었기에 학생 비자부터 받아야 했다. 대학에서 디자인은 충분히 배웠다고 느낀 김씨는 미국 대학에서만큼은 다른 전공을 시도하고 싶었다. ‘사람들이 왜 이 기능은 좋아하고 저 기능은 쓰지 않는지’와 같이 사람들의 선택과 선호를 파악하고자 했던 그는 인지심리, 인간공학 등을 추가적으로 공부하고자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마음먹었다.

미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가 할 줄 아는 영어라고는 “Hello”, “Sorry”, “Thank you”가 전부였기에, 첫 1년간은 시카고(Chicago)시에서 운영하는 커뮤니티 칼리지(Community College) 영어 교실에 다녔다. 영어 실력을 차츰 쌓아가며 대학원에 원서를 넣은 결과, 일리노이 공대(Illinois Institute of Technology) 디자인스쿨에 합격했다.

대학원 졸업 후에는 미국과 한국을 넘나들며 직장 생활을 했다. 2015년에는 삼성전자에서 세계 최초 원형 스마트워치를 디자인 해내기도 했다. 해가 지나고, 경력이 쌓일수록 그에게는 디자이너가 아닌 관리자의 역할이 요구됐다. 그가 2018년, 구글로 향한 가장 큰 이유는 여기에 있다. 관리자가 아닌 디자이너의 삶을 지속하고 싶었고, 구글은 ‘디자이너 김은주’로서의 삶을 살 수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김씨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구글의 유명한 사내 복지가 아닌, “0에서 1을 만드는 일”을 할 수 있는 디자이너로서의 업무였던 것이다.

 

역할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곳으로

따뜻한 미소와 함께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 김은주씨의 모습. <strong>안정연 사진기자
따뜻한 미소와 함께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 김은주씨의 모습. 안정연 사진기자

구글이 누구에게나 꿈의 직장인 것은 아니다. 직급에 따라 권위가 주어지는 한국 조직과 달리, 구글에서는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는 이가 사람을 끌어당긴다. 소속된 팀도 상관없다.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직급과 소속을 불문하고 자유롭게 제안할 수 있다. 처음 입사한 김씨는 구글의 조직 문화에 기분 좋은 충격을 받았다. 그는 “혁신을 만드는 데 있어 팀 사이에 벽을 쳐놓으면, 자기 분야가 아니라고 검열할 수밖에 없다”며 “개방성, 유연성, 상호존중이 깔려있는 구글의 문화가 신기했다”고 말했다. 조직에 ‘적당히 묻어가는 것’은 구글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김씨에게도 처음은 어려웠다. 성과를 보여야 한다는 부담감에 잠을 설치기도 했다. 그는 문제 해결 방안을 회사가 아닌 자신에게서 찾았다. 김씨는 “나의 힘듦을 외부에서 찾으면 답이 없으니,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가져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왜 힘든지,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이 상태는 왜 만들어진 것인지’를 적어나가는 작업에서 도움을 받았다. 스스로를 힘들게 했던 변수들을 하나씩 지워나가다 보니 해결책을 찾을 수 있었다. 영어 실력이 불안하면 영어를 공부하면 됐고, 팀이 안 맞는 것 같으면 팀을 바꾸면 됐다. “회사 때문에 힘들고 회사 때문에 회복한 게 아니라, 제가 저를 힘들게 한 거고 제가 저를 회복시킨 거예요.”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는 동료들과 함께하며, 김씨에게 구글은 계속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곳이 됐다.

미국 캘리포니아주(California) 마운틴뷰(Mountain View)에 위치한 구글(Google) 사옥의 전경. <strong>안정연 사진기자
미국 캘리포니아주(California) 마운틴뷰(Mountain View)에 위치한 구글(Google) 사옥의 전경. 안정연 사진기자

 

낯선 땅에서 ‘나’로 살아가기

낯선 미국에서 김씨는 동양인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제약이 아닌 장점으로 작용하는 곳을 찾아 나섰다. 대학원 졸업 후 스테이트 팜(State Farm) 보험회사 디자이너로 취직했다. 그러나 미국 시스템을 잘 모르는 김씨에게 ‘미국 국내 보험 회사’는 잘 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었다. 김씨는 ‘이곳에서는 나의 장점을 살리기 어렵겠다’는 생각에 모토로라, 구글을 비롯한 IT기업으로 향했다. 신기술을 활용해 전 세계적 영향을 도모하는 IT기업에는 폭넓은 시각을 제시할 다양한 정체성의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이다. 김씨는 “아시안의 시각, 여성의 시각, 엄마의 시각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이점이 됐던 것 같다”고 말했다. 

꾸준한 노력으로 현재진행형으로 성장하고 있는 그의 성장은 이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가 이화에서 얻은 가장 큰 배움은 스스로 일을 하는 ‘주도성’이었다. 남자아이가 반장, 여자아이가 부반장을 맡는 익숙한 모습에서 벗어나, 여성도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증명하는 곳이 우리대학이었다. 과 엠티를 준비하며 꼼짝하지 않을 것 같던 무거운 물건을 손수 옮겼다. ‘원래 해야 할 일’이자 ‘원래 할 수 있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여대인데도 오히려 여자가 아닌 김은주인 나를 만날 수 있던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이 모든 여정 끝에 김은주 자신을 찾은 김씨는 이화의 후배들에게 조언을 건넸다. 

 

성장을 위해서는 배우는 능력이 중요해요. 무언가를 많이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배우는 능력 자체를 키우는 게 중요합니다. 이화의 시간 동안 주도적으로 배우는 능력을 키워보세요.

김은주 디자이너가 자신 있는 미소와 함께 안드로이드(Android)동상 옆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strong>안정연 사진기자
김은주 디자이너가 자신 있는 미소와 함께 안드로이드(Android)동상 옆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안정연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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