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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여성 100명이 한국 땅을 밟았다. 모두 한국에 ‘가사관리사’로 임시고용된 이들이다. 이들이 8월6일 입국한 이래로 언론은 “영어 유창한 ‘필리핀 이모’ 왔다…“한국어 열공했어요””, ““한국행 주변서 부러워해… 돈 많이 벌어서 돌아갈 것””, ““한국, 설레요”하며 손하트…명품백 멘 필리핀 가사관리사도”와 같은 제목의 기사를 발행했다. 필리핀 가사관리사 여성들은 기사 제목에서 주로 ‘이모’로 호명됐다. 영어 능통, 명품백 소지, 주변인들의 부러움과 같이 노동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요소로 특정되기도 했다.
필리핀 가사관리사 사업이 가진 태생적 한계
필리핀 가사관리사 사업은 오세훈 서울시장이 저출생, 고령화로 인한 돌봄 공백을 해결하려는 목적으로 현 정부에 제안하며 시작됐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필리핀 가사관리사 사업이 되려 돌봄 노동 저가치화를 심화해 저출생을 유도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주희 교수(사회학과)는 필리핀 가사관리사 사업이 내포한 위험성으로 의료와 돌봄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점을 꼽았다. 이 교수는 “(돌봄을) 국가가 사회 서비스로 책임져야 될 일이 아닌, 손쉽게 외주화하면 되는 일로 간주해 저개발국에게 낮은 임금을 주겠다고 한 것”이라며 “돌봄 노동이 이주 노동자에게 가볍게 전가할 수 있는 저임금 일자리라는 메시지를 국민에게 전달한 것”이라고 해설했다.
플로리다 아틀란틱(Florida Atlantic University) 대학교의 김양숙 교수(사회학과)는 2022년 6월 ◆가사근로자법이 제정되며 근로기준법 제정 이래 68년 만에 가사노동도 법적 보호 대상이 된 와중 2024년 하반기에는 필리핀 가사관리사 사업이 시행됐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 노동의 가치를 재구성하려는 투쟁에 역공격이 들어왔다”고 말했다. 저임금으로 가사 노동력이 들어오게 되면서, 겨우 개선한 돌봄 노동의 사회적 인식을 한순간에 뒤바꿨다는 것이다.
돌봄 노동이 저개발국가의 이민자들에게 저임금으로 시킬 수 있는 일로 인식된다면, 괸련업에 종사하는 비이주민 노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김 교수는 “(필리핀 가사관리사 사업으로 인해) 비이주민 노동자들은 낮은 질의 고용 환경을 감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거나, 이들의 노동력이 이주 노동력으로 대체될 수도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가사관리사는 이모가 아니다
언론에서 보도하는 이들의 호칭은 성별 분업을 전제한다. ‘이모’, ‘nanny’, ‘파출부’, ‘식모’, ‘부엌데기’는 모두 여성 돌봄 노동자를 이르는 말이다. 필리핀 가사관리사들은 이 중 ‘이모’로 불리고 있다. 성별이 여성임을 전제하는 ‘이모’라는 호칭은 돌봄 노동이 여성의 것이라는 사회적 고정관념을 고착화한다. 연남경 교수(국어국문학과)는 이러한 호칭이 젠더화된 돌봄 노동을 강화한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돌봄 노동자를 칭할 때 성별을 전제한 표현이 사용되는 이유에 대해 “우리 사회의 돌봄 노동자가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아 돌봄의 책임을 자연스럽게 여성에게 전가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여성 호칭을 사용해서 노동자를 지칭하는 것 자체가 돌봄 노동이 여성에게 편중된 노동임을 방증하는 것이다.
‘이모’는 성별 정보를 포함했을 뿐 아니라 친족 관계를 기반으로 하는 호칭이다. 이 교수는 주로 사적 영역에서 사용되는 ‘이모’라는 호칭을 가사관리사에게 붙임으로써 돌봄 노동을 전문성의 영역이 아닌, 가정 내 무급 노동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게 만든다고 설명한다. 이미 저임금임에도 불구하고, 노동의 가치를 더욱 폄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필리핀 가사관리사로 고용된 이들의 시급은 1만3700원으로, 최저시급인 9860원에서 4대보험 가입 비용을 감안해 책정된 금액이다. 이들의 임금에 대해 오 시장은 8월27일 국회 토론회에서 “(필리핀 가사도우미들의 임금이) 지금과 같은 비용이라면 지속가능하지 않다”며 비용을 낮춰야 함을 주장했다.
‘이모’의 사용은 노동자와 사용자 간의 계약 관계를 모호하게 만들기도 한다. 김 교수는 “사용자와 노동자라는 비대칭적인 관계를 친족 용어가 가리며 (그들이 수행하는 노동의 상당 부분을) 온정에 기대게 한다”고 말했다. ‘이모’라는 호칭이 교묘하게 노동을 착취하는 언어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백경흔 교수(여성학과)는 ‘이모’는 사용자가 노동자에게 암묵적으로 가족과 같은 과도한 친밀성과 헌신을 강제하는 효과가 있어,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요구하기 어려워지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백 교수는 “가정은 가사관리사에게 공적인 작업장이지만 동료없이 혼자 일해야 하는 소외된 공간이며 외부인이지만 유사가족처럼 일해야 하는 환경임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가사관리사가 돌봄 노동을 제공하는 가정은 그들에게는 공적 공간임에도 사적 공간으로 둔갑시켜 노동자가 쉽사리 목소리를 내기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다.
‘필리핀 가사관리사는 영어를 잘한다’, ‘K-문화를 좋아한다’, ‘명품백을 멨다’ 등 노동 외적인 부분을 강조한 것에 대한 지적도 잇따랐다. 김 교수는 언론의 이러한 보도에는 가사관리사 사업이 필리핀과 한국 모두에게 이득임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해석했다. 그는 “젠더화된 노동이 지구적으로 재분배되는 맥락과 필리핀이라는 노동력 송출 국가라는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며 가사관리사로서의 취업은 필리핀 여성들이 주어진 환경 내에서 가능했던 제한적 선택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됨을 강조했다.이 교수는 본질에서 벗어난 언론의 보도가 문제를 흐릿하게 할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는 “언론은 필리핀 가사 노동자의 K-문화 선호도보다 사적 영역인 가정 내에서 발생하는 (필리핀 가사관리사들에 대한) 불공정한 처우를 어떻게 개선할지에 더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돌봄 공백 해결 위해서는 근본적인 수준에서 개혁 필요
전문가들은 돌봄 공백은 한국의 장시간 노동이라는 특성과 고착화된 성별 분업이 맞물리며 발생했기에 이를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김 교수는 “자본주의 사회, 그리고 한국 사회는 돌봄 의무가 없이 언제든지 일을 할 수 있게 준비가 돼 있는 남성 중심적 노동자상을 전제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령화도 돌봄 공백에 영향을 미치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장시간 노동으로 인해 부족해진 가사 노동 시간에 있다는 것이다. 백 교수 또한 “돌봄에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적정 시간과 소득을 보장해달라는 요구를 할 수 있어야 한다”며, “돌봄을 특정 성별, 계층, 연령의 사람만 하는 일이 아니라 시민이라면 누구나 해야 하는 권리이자 의무라는 새로운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구체적 대안으로 주 4일제와 같은 노동시간 단축의 선제적 검토를 제시했다. 이어 “육아 휴직 제도를 보완해 활용 가능 인력을 확대하고, 소득 보전을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백 교수는 돌봄 노동 전문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 개선이 필요함을 주장한다. 돌봄 노동 일자리가 승진과 승급이 가능한 방식으로 개편돼야 한다고도 덧붙였다. 출신 국가와 성별이라는 억압의 교차성에 위치한 필리핀 가사관리사들은 3일 첫 출근해 142개 가정에 투입됐다.
◆가사근로자법: 가사근로자의 고용개선 등에 관한 법률. 정부가 인증한 가사서비스 제공기관이 가사근로자를 직접 고용하고, 가사서비스 이용자와 이용계약을 체결하여 가사근로자로 하여금 관련 서비스를 제공하게 하는 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