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고 평론가이자 교수, 어머니이자 딸이고 아내인 정끝별 인터뷰

시는 보이지 않고 유동하는 마음을 언어로 묶 는다. 정끝별 교수(국어국문학과)는 올해로 등단 37년 차를 맞이한 시인이다. 성실하게 읽고 쓰는 “1인 가내 수공업자”이자 “글쓰기 노동자”다. 지난 2월28일 발간한 산문집 ‘깨끗한 거절은 절반의 선물’에는 그렇게 꼬박꼬박 적어 온 글들을 묶었다. 시는 잠시 미뤄두고 처음으로 개인적 얘기를 꺼내놓은 이번 산문집 은 “삶의 길목들에서 가로등처럼 환한 불이 됐던 편편의 점등”과도 같은 글이 담겼다.

신간 ‘깨끗한 거절은 절반의 선물’의 표지에는 가로등에 불을 밝히는 ‘점등인’이 그려져 있다. 정끝별 교수는 “표지가 마치 ‘삶의 길목에서 환한 불이 됐던 점등과도 같았던 글들’을 상징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진유경 사진기자
신간 ‘깨끗한 거절은 절반의 선물’의 표지에는 가로등에 불을 밝히는 ‘점등인’이 그려져 있다. 정끝별 교수는 “표지가 마치 ‘삶의 길목에서 환한 불이 됐던 점등과도 같았던 글들’을 상징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진유경 사진기자

 

거절은 선물이 될 수 있을까

산문집에는 어머니이자 딸이며 아내인 ‘생활 시인’ 정끝별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표제작이자 책의 제목인 ‘깨끗한 거절은 절반의 선물’은 아버지에 관한 얘기다. 사뭇 역설적으로 보이는 이 제목은 아버지의 입말이다. 거절은 상대방과의 관계를 껄끄럽게 만들 수 있기에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 교수 는아버지의 말을 되새기며, 깨끗하게 거절하기 어려운 진짜 이유가 부탁이 단순한 요청이 아니라 “일종의 거래”기 때문임을 되짚는다. 명령이라서, 제안이고 약속이라서, 거절하지 못했다는 핑계 이면에 사실은 상대방에게 무엇인가를 바라는 욕심이 있었음을 상기시킨다.

혈연, 학연, 지연을 들이대며 ‘알음알음’, ‘사바사바’ 청탁하고 부탁하는 한국 사회의 민낯을 드러내는 것이다. 정 교수는 산문집을 통해 부드럽되 단호하게 거절해야 상대방이 깔끔하게 단념할 수 있기에, 깨끗한 거절이 절반 정도는 선물일 수 있다는 상쾌한 조언을 전한다.

정 교수는 사회인이 돼 비로소 아버지의 말을 이해하게 됐다. 거절하고, 거절 당해야 하는 상황들에 놓이며 “거절할 권력조차 가져 본 적이 없는” 자신, 그리고 “숱한 거절을 하고 거절을 당했을”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도 나름의 고통과 억압을 겪었으리라 감히 추측해 보게 됐다. 가부장제하에서 집안의 기둥이자 동시에 싸우고 부정해야 할 존재였던 아버지. 정 교수는 아버지의 삶 일부를 모방해 보며 비로소 아버지와 화해하게 됐다.

정끝별 교수가 그의 저서 ‘시 쓰기 딱 좋은 날’과 ‘깨끗한 거절은 절반의 선물’을 들어보였다. 동시에 제자가 그려준 그림 속 자신과 비슷한 미소를 짓고 있다. 진유경 사진기자
정끝별 교수가 그의 저서 ‘시 쓰기 딱 좋은 날’과 ‘깨끗한 거절은 절반의 선물’을 들어보였다. 동시에 제자가 그려준 그림 속 자신과 비슷한 미소를 짓고 있다. 진유경 사진기자

 

주변인들을 조각조각 모은 퍼즐 같은 삶

그는 어렸을 때는 부모와 형제자매, 이후 함께 공부한 친구들과 선생들, 지금은 딸들과 학생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살면서 물들어간답니다.” 그는 이 때 부딪히고 패이며 퍼즐 조각처럼 변했다. 정 교수는 “퍼즐은 조각으로 보면 모서리가 울퉁불퉁하지만, 조각들이 모이고 이어지면 하나의 그림이 된다”며 조각을 맞춰가다 보면 어느새 그림이 되듯 삶도 그렇다고 말했다.

“모방하고, 인용하고 표절하며 살았던” 이들 중 가족 공동체가 정 교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줬다. 그는 아버지를 통해 과거 가부장제 사회에 편입했으며, 딸들을 통해 미래 사회의 주역인 젊은 여성성을 배웠다. 이처럼 가족 공동체는 성별과 나이가 다른 타인이 부대껴 살아가며 성장과 변화를 경험하는 곳이다. 정 교수에게 가족은 사회의 구조와 단면을, 이론을 넘어 현실에서 경험하는 매개체 다. 정 교수는 요즘 사람들은 상처받거나 손해 보기를 꺼리지만, 충돌하지 않는 관계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생채기가 나고 피 흘리고 딱지가 생기더라도 삶을 나누고 감정을 느끼는 것이 인간다운 삶이 아닐까”라고 질문을 던졌다. 정 교수는 지금도 타인과 부딪히고 깨지며 삶의 조각들을 모아나가고 있다.

 

‘생수 같은 시의 마음’으로 읽고 쓰기

문학에서 인간이 놓여있는 존재론적인 조건은 ‘시간’이다. 정 교수의 글과 시에는 날씨, 시간, 계절의 감각이 자주 등장한다. 정 교수는 지금의 순간을 붙잡기 위해 글을 쓴다. 그는 “우리는 대개 안 변하는 것처럼, 마치 안 늙는 것처럼 살지만 우리는 날씨에 따라서도 금방 바뀌는 존재”라며, 이 모든 것은 마음이 하는 말이라고 설명한다. 보이지 않지만, 움직이는 마음은 언제나 거취를 옮기고, 우리는 마치 변온 동물처럼 조금씩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에게 변화하는 마음을 헤아려주는 언어가 바로 시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질적인 것을 생산하지 못하는” 시는 어떤 의미로는 ‘쓸모없는 것’이다. 그러나 권력과 자본이 모이는 시스템으로부터 가장 멀리 위치했기에 무해함과 무욕의 응집체기도 하다. 정 교수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도록 하는 시의 선한 의지를 “생수 같은 시의 마음”이라고 말했다. 그는 변화하는 마음에 따라 시를 읽을 때도 시가 모습을 달리한다고 말했다. 시 읽기는 변화하는 나를 살피고 돌보는 방식이기도 한 것이다.

정끝별 교수는 “시는 돈도 권력도 되지 않으나 그렇기에 가장 무해하다”고 하며 “보이지 않는 가치들과 ‘선한 의지’를 지향하는 것이 결국 시의 마음” 이라고 말했다. 진유경 사진기자
정끝별 교수는 “시는 돈도 권력도 되지 않으나 그렇기에 가장 무해하다”고 하며 “보이지 않는 가치들과 ‘선한 의지’를 지향하는 것이 결국 시의 마음” 이라고 말했다. 진유경 사진기자

그는 인터뷰를 마치며 이화인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시가 있냐는 기자의 질문에 많이 웃고, 많이 도전하는 이화가 되길 응원한다며 ‘이화의 새벽’의 한 구절을 읊었다. ‘나의 이화처럼 해해해, 우리 이화니깐 돼돼돼.’(이화의 새벽/정끝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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