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대한민국을 기쁘게 한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한 아시아 11개국 여성 미술가들을 조명하는 ‘접속하는 몸: 아시아 여성 미술가들’. 전혀 관련없어 보이는 이 두 사건의 공통점은 과거 ‘여류’로 취급됐던 여성 작가들을 시대가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대학보는 여성 미술 작가의 존재를 조명한 ‘그들도 있었다’와 여성 문인 작가를 집대성한 ‘한국 여성문학 선집’으로 여성 예술의 역사를 살펴본다.

 

규수 작가, 여류 작가. 근대 문학사가 여성 작가를 불러온 호칭이다.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여성 작가는 호(號)를 달고 문학장의 이방인으로 활동했다. 엘리트, 중산층, 이성애자남성의 관심, 욕망, 이데올로기, 경험이 투영된 작품이 ◆정전화됐던 남성 중심 문학장에서 여성 문학을 문학사에 온전히 기입하기 위해, 7월5일 ‘한국 여성문학 선집’이 세상에 나왔다. 

‘한국 여성문학 선집’ 톺아보기

선집은 2012년 결성된 여성문학사연구모임이 12년간 작업한 결과물로, 민음사에서 출판됐다. 방대한 근현대 문학사를 총망라해 작품을 선정한 선집 형태다. 여성문학사연구모임 소속 경희대 김은하 교수(후마니타스칼리지)는 현재 통용되는 정전이 엘리트 남성 계층 중심으로 선별돼 많은 여성 작가들이 문학사에서 삭제됐다고 본다. 김 교수는 “유령화된 여성 작가를 찾고 여성문학의 역사를 복원하는 작업을 해야 공정한 한국 문학사 평가가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질문 하에 선집을 작업했다. 작품 편집을 맡은 민음사 박혜진 편집자(국문·10년졸)는 “여성문학에 속하는 작품들을 평가하는 언어가 독자들과 공유됐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며 “작품을 평가하는 언어가 세분화되고 명확할수록 작품 창작 환경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국 최초 여성문학 아카이빙 작업은 1967년에 출판된 ‘한국여류문학전집’이다. 박구비 교수(호크마교양대학)는 “‘한국여류문학전집’ 이후 여성문학의 정전을 만들고자 하는 시도가 이어지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시기적, 장르적 확장이 이뤄졌다는 점에서 선집의 의의를 설명했다. 특히 주류 문학 장르인 소설과 시뿐만 아니라 편지나 일기까지 담았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러한 비주류 장르까지 포괄한 선집은 엘리트 계층 여성 작가뿐 아니라 여성 노동자의 글쓰기 역사를 집대성했다. 연남경 교수(국어국문학과)도 선집은 ‘한국여류문학전집’의 출판 원칙을 잇는 차원에서 의의가 있다고 본다. 연 교수는 “한국문학사에서 여성작가가 여류라는 멸칭으로 주변화되고 문학사 및 정전화에 속하지 못했기에 1967년 ‘한국여류문학전집’이 출판됐다”며 “이러한 ‘한국여류문학전집’의 의의를 잇는 게 이번 선집”이라 말했다.

근현대 한국 여성들의 지성사 총망라

선집은 1898년부터 1990년대까지의 여성문학을 시대별로 구분해 1권부터 7권으로 나눴다. 1권에서는 1898년~1920년대 중반 여성문학의 탄생을, 2권에서는 1920년대 후반~1945년 계급, 민족,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교차해 식민 현실 속에서 태동하는 여성문학을 다룬다. 3권은 1945년~1950년대 해방 이후 한국 전쟁 상황을 시대 배경으로 이념 갈등에 뒷전이 된 여성 해방에 주목했다. 당시 모(母) 가장, 전쟁미망인, ‘양공주’ 등 가부장제 밖에서 질서를 교란시키는 여성 존재가 등장한 문학을 주로 수록했다.

'한국 여성문학 선집’은 여성문학사연구모임의 첫 번째 프로젝트이자 성과물이다.  프로젝트는 “왜 우리에게는 ‘다락방의 미친 여자’ 같은 전복적인 여성문학사, ‘노튼 여성문학 앤솔러지’ 같은 여성문학 선집이 없는가?”라는 명확한 의문과 강렬한 열망으로부터 시작됐다. <strong>남현지 사진기자
'한국 여성문학 선집’은 여성문학사연구모임의 첫 번째 프로젝트이자 성과물이다.  프로젝트는 “왜 우리에게는 ‘다락방의 미친 여자’ 같은 전복적인 여성문학사, ‘노튼 여성문학 앤솔러지’ 같은 여성문학 선집이 없는가?”라는 명확한 의문과 강렬한 열망으로부터 시작됐다. 남현지 사진기자

4권에서는 1960년대 남성적 혁명 흐름 속 가정에 머무는 존재로 전락한 여성의 존재를 담았다. 작품 속 억압된 여성들은 무질서한 내면을 표출하며 미쳐있고 기괴한 모습을 보인다. 또한 저자로서의 정체성을 향한 여성 작가들의 투쟁을 좌담과 선언문을 통해 전시했다. 1957년 우리대학 3학년 재학 중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정연희(국문·57년졸) 작가의 소설 ‘정점’은, 남성의 트로피로서 존재하는 모녀가 성적 공상과 몽유병, 환각을 겪으며 생기는 비극적인 일들을 그리고 있다. 박정희 통치 시절 ‘개발독재기’로 대표되는 1970년대를 다룬 5권에서는 중산층 여성과 일하는 여성을 기록하는 노동자 계층 여성 작가가 출현한다. 6권은 1980년대 여성 저자가 운동권 여학생, 여성 노동자, 중산층 여성으로 다변화되며 장르적으로 확장된 여성문학을 다룬다. 7권에서는 1990년대에 들어서며 문학장 중심부에 진입한 여성문학을 보여준다. 7권에는 202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내 여자의 열매’가 수록돼 있다.

이화 출신 문인으로는 2권에 김일엽, 모윤숙, 노천명, 이선희 작가, 3권에 노천명, 이선희, 정충량, 강신재 작가, 4권에는 정연희 작가, 6권에는 홍희담, 김채원, 강석경, 김향숙 작가, 7권엔 천양희, 배수아 작가가 작품과 함께 담겼다. 이화 출신 문인이 주도적으로 만든 잡지 <여성>이 6권에 수록되기도 했다.

‘쓸모없음’으로써 쓸모 있는 여성문학의 현재와 미래

여성문학이 보통 문학이 된 시대다. 10월11일 한국 번역원에 따르면 2020년부터 2024년까지 5년 동안 한국 문학 작품이 국제 수상을 한 사례는 19건이며, 그중 16건이 여성 작가 수상이다.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성과까지 포함하면 20건 중 17건이 여성 작가다. 이러한 여성 작가의 출현과 약진을 두고 박 교수는 “지금 한국 문학사를 여성 문학사라고 얘기해도 되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여성문학사연구모임 소속 중앙대 이경수 교수(국어국문학과)는 “현재 여성 문학 경향에 대해 말하자면 2016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성문학의 흐름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문학계에서 자행된 위계적 성폭력을 고발하는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과,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국제적 미투운동으로 촉발된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2010년대 여성문학은 일상 폭력에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성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됐다는 것이다.

소수자 당사자성을 지녀 소수자의 상처를 세심하게 보듬는 여성문학의 흐름은 인간과 인간의 경계를 넘어 비인간 존재로까지 확장하고 있다. 연 교수는 최근 여성 작가와 독자가 열광하는 SF 장르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그는 “여성 작가들은 과학소설이자 ◆사변소설인 SF소설로 답답한 현실을 재발명하고자 한다”며 “여성뿐 아니라 퀴어, 노년, 장애 문제와 교차하고, 나아가 인간중심주의가 타자화한 사이보그, 동물, 식물과 같은 비인간 존재자들과 이어지고 공감한다”고 말했다. 박 교수 또한 “여성 작가들은 주변부에 있던 정체성으로 비인간 존재들과 공존할 방법까지 다채롭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라며 앞으로의 여성문학에 기대감을 표했다.

 

◆정전: 한 시대의 징표로 삼을 만한 요소를 지닌 작품. 그 시대의 정신을 보여 주는 작품.

◆페미니즘 리부트: 2016년,  #00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 강남역 여성 혐오 살인사건 등으로 촉발된 페미니즘 대중화 흐름

◆사변소설: 과학 소설의 일종이나, 과학에 지나치게 얽매이지 않고 현대인의 사고의 틀을 넓히는 데 중점을 두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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