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미지근한 진실이 아닌
'거대하고 차갑고 뜨거운 거짓말'을 원하는 세계
저에게 소설은 무한한 가능성의 논리이고 거짓말의 안전지대입니다.
20일 우리대학 중강당에서 ‘현실과 환상의 결합-이야기(소설)라는 세상의 모형에 대해서’를 주제로 조예은 작가(32)의 북콘서트가 열렸다. 2016년 ‘시프트’로 제4회 교보문고 스토리공모전 대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조 작가는 ‘칵테일, 러브, 좀비’, ‘트로피컬 나이트’, ‘적산가옥의 유령’ 등 유수한 작품을 내며 SF 장르 소설가로서 활발히 활동 중이다. 해사한 미소를 띤 조 작가가 강단에 등장하자 학생들은 열렬한 박수로 그를 맞았다. 당초 200명이 정원이었던 행사는 뜨거운 성원에 힘입어 140명을 추가 모집했다. 중강당은 조 작가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자리한 학생들로 빼곡히 채워졌다. 본 행사는 호크마교양대학에서 2년에 한 번씩 주최한다.
소설이란 '빛나는 모형들'
조 작가는 소설을 ‘선명하고 강렬한 색감의 음식 모형’에 빗댄다. 몇 년 전 떠난 삿포로 여행 중 그는 한 가게 앞에서 번쩍거리는 음식 모형을 발견했다. 그는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입맛을 돌게 하고 사람을 사로잡는 존재에 신비함을 느꼈다. 동시에, 감각을 자극하고 맛을 상상하게 만드는 음식 모형이 우리가 즐기는 이야기와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조용하고 어두운 거리에서 환하게 빛나는 모형들을 보며 ‘나도 이런 걸 만들고 싶구나’라고 깨달았다”고 덧붙였다. 조 작가는 음식 모형뿐 아니라 동대문 거리의 새벽 풍경 등 영감의 원천이 된 사진들과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풀어가며 자신의 소설을 찬찬히 설명했다.
“우리에게 언어가 있는 이상, 누구든지 책이라는 세계로 들어갈 수 있잖아요.” 대학 시절 조 작가는 개인의 심연을 파고드는 창작이 아닌, 바깥으로 퍼져 나가 보통의 사람과 소통하는 창작을 하고 싶었다. 그는 소설이 바로 그러한 창작물이라 믿었다.
거대하고 정교한 거짓말일수록 진실에 가까워지는 곳, 소설
조 작가는 소설이 “거짓말이 거짓말 취급을 당하지 않는 유일한 안전지대”라고 말한다. 미지근한 진실보다 차갑고 뜨거운 거짓말을 원하는 곳이 바로 소설이라는 것이다. 그는 작가가 되는 데에는 이야기하고 싶다는 욕망, 거짓말하고 싶다는 욕망이 전부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며, “나만의 거짓말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면, 그 마음에 충실해져도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먹지도 못하는 가상의 모형들, 다시 말해 이야기를 왜 즐기는 걸까요?
조 작가는 독서의 이유를 묻는 이들에게 도리어 질문의 이유를 되묻는다. 어떤 행위를 할 때 반드시 남는 것이 있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는 “나의 시간을 투자했으니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가 돌아와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책을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독서는 지금 당장은 흩어져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랫동안 켜켜이 쌓인 독서의 흔적은 삶의 단단한 기반이 돼주기 때문이다.
조 작가는 소설 쓰기를 비롯한 창작 행위에는 치유의 힘이 있다고 말한다. 소설 속 인물은 작가의 손과 발이자 분신이 된다. 그는 “현실의 나라면 하지 못했을 선택과 결정을 인물에게 대신 시키며 감정이 해소되기도 한다”며 소설 쓰기의 매력을 전했다.
선배 작가로서, 창작을 꿈꾸는 학생들에게
이번 북콘서트에선 이례적으로 약 45분이라는 긴 시간을 질의응답에 할애했다. 사회를 맡은 최수현 교수(호크마교양대학)는 “우리대학 학생들이 조 작가님을 정말 좋아하고 궁금해했다”며 “사전 질문도 정말 많았고, 작가님도 학생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는 의견을 주셔서 소통 시간을 늘렸다”고 말했다.
질의응답 시간에는 ‘조예은’이라는 사람의 삶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솔직하고 진정성 있는 답변이 이어졌다. ‘글을 쓰는 일을 하고 싶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현실적인 걱정이 든다’며 글짓기를 본업으로 삼는 삶을 고민하는 질문에, 조 작가는 글을 계속 써야 할지, 취업 준비를 해야 할지 끊임없이 고민했던 자신의 취업 준비생 시절을 떠올렸다. 그는 “일상과 예술의 균형을 잘 맞추며 예술의 길 또한 계속해 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어느 한쪽, 특히 예술에만 몰입하게 되면 오히려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적어진다”며 “글 쓰는 일은 어느 정도는 겸업이 가능하니 멀리 내다봤으면 한다”고 조언했다.
조 작가의 창작 과정과 작품 세계를 깊이 파고드는 질문도 많았다. 글에서 성별을 뚜렷이 드러내지 않는 이유에 대한 질문에 그는 “한 편의 소설에서 특정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자세히 묘사하기보다, 비워둘 것은 비워두고 힘을 줘서 묘사할 부분을 강렬히 표현하면 더 극적인 효과를 낼 수 있다”는 노하우를 전했다. 작품 내 서사가 흐려지고 단순히 로맨스로만 연결되는 해석을 지양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는 “현실에서 벗어난 환상 소설을 쓰고 싶었는데, 남자와 여자의 로맨스에만 몰입하게 되니 환상으로 읽히지 않을 것 같아 일부러 드러내지 않기도 했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노트와 펜을 꺼내 조 작가의 말을 받아 적을 만큼 강연에 집중했다. 황채민(중문·25)씨는 “평소 소설 쓰기를 좋아하지만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완성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며 “오늘을 계기로 꼭 전업 작가가 아니더라도 꾸준히 글을 쓰며 창작을 시도하고 싶다”는 소감을 남겼다.
이어진 사인회에서 조 작가는 학생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며 대화를 나눴다. 이날 자리한 원현정(호크마·25)씨는 “현실에는 없는 허구적 요소를 사용해 현실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조 작가 작품의 매력”이라고 답했다. 이지유(경영·24)씨는 “감성적이면서도 은연중에 서늘함과 공포를 곁들인 ‘서정적인 호러’가 조 작가만의 장르”라고 말했다.
새로운 장을 펼쳐 갈 작가, 그리고 독자
이번 북콘서트는 단 한 권의 책이 아닌, 작가 조예은에 주목해 그의 작품 세계를 알아보는 시간이었다. 앞으로 어떤 작품을 쓰고 싶냐는 질문에 그는 “(조예은이 어떤 작가라는) 경계를 없애고, 세상이 예상하는 행보에 어긋나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답했다. 차기작으로 오컬트물을 준비하고 있는 그는 “연차가 쌓일수록 이전보다 크고 정교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욕심이 커진다”며 “가장 오래 집필한 작품이 될 것 같다”고 웃음을 지었다.
조 작가는 “이렇게 많은 관객과 행사를 한 것이 처음이고, (관객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긴장해 아쉬움도 남지만 즐거운 시간이었다”는 소감을 남겼다. 창작자를 꿈꾸는 이들에게 그는 “이 시대에 무언가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으로 시작하는 것 그 자체로 응원한다”며 “꿈을 이뤄나가는 과정에 고난과 역경은 분명히 있겠지만, 꾸준히 하는 것만이 답”이라는 조언을 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