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선한 바람이 부는 ECC 밸리, 돌계단 위 삼삼오오 모여 앉은 학생들이 미래 사회의 여성을 담은 미디어아트를 보고 있다. 교내 곳곳에 위치한 스크린에는 인간과 비인간의 연결을 그리는 작품들이 상영됐다. 학생들의 대화 소리와 영상 속 인물들의 소리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늦여름밤을 연출했다.
ECC 밸리, 중강당을 비롯한 교내 여러 장소에서 진행된 2024 EMAP(Ewha Media Art Presentation)는 2일~6일에 걸쳐 열렸다. 우리대학 출신 작가를 포함한 전 세계 37명의 작가가 다양한 미디어아트 작품을 출품했다.
EMAP는 2001년 고(故) 백남준 교수를 우리대학 명예교수로 초청하면서 시작한 미디어아트 야외 상영 행사다. 코로나19로 인해 2019년을 끝으로 잠정 중단된 이후 5년 만에 돌아왔다. 이번 EMAP는 ‘우주를 엮는 모든 것들, 그 양자적 관계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개최됐다.
테이트 모던(Tate Modern Museum) 소속 발렌타인 우먼스키(Valentine Umansky) 큐레이터는 “이번 전시회 주제는 디지털 기술 시대에 인간과 다른 유기체 사이 상호작용의 변화를 성찰하는 문제 제기에서 시작했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그리고 그는 양자역학의 상호연결성을 강조하며 “이 전시로 여러분이 앞으로의 여정에서 더 많은 연결 관계를 만들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말했다.
2024 EMAP는 4일~7일 코엑스에서 열리는 ‘프리즈 서울’(Frieze Seoul)의 일환인 ‘프리즈 필름’(Frieze Film)과 협업해 ‘EMAP X Frieze Film’으로 진행됐다. 2024 EMAP와 처음 협업한 프리즈 서울은 실험적이고 젊은 작가를 발굴하는 아트페어다. EMAP 관계자로 참여한 최서진(섬유예술·21)씨는 “큰 아트페어인 프리즈와 우리대학의 협업에 참여하는 것이 의미 있게 다가왔다”고 말했다.
전시는 8개의 소주제로 구성됐다. 소주제는 순서대로 ▲양자 얽힘에 관한 질문 ▲갈망과 소속감 ▲시간, 데이터, 속도에 관하여: 포스트 현대성과 가속주의가 제시하는 비전 ▲살아있는 존재들과의 연대 만들기 ▲흙, 돌, 강철, 그리고 영혼에 관하여 ▲자신을 만나려는 선 ▲심층 시간 ▲이화 하이라이트: 디지털 시대 인간 경험 탐구로 구성돼 있다. 각각의 소주제는 ‘상호연결’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관통된다.
모든 주제는 서로 연결돼 순서의 개념을 해체한다. 일정한 순서에 맞춰 작품을 보지 않더라도 전체 주제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8번째 소주제인 ‘이화 하이라이트: 디지털 시대 인간 경험 탐구’는 우리대학 출신 작가들의 작품으로만 구성됐다. 작품들은 급변하는 디지털 시대상을 배경으로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 질문들을 던졌다. 박주원 큐레이터(사학·11년졸)는 “이화에서 전시할 때 이 장소에서 배우고 생각했던 우리대학 출신의 젊은 작가들이 얼마나 훌륭하게 활동하고 있는지를 조명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정문 앞에 위치한 8번 스크린에는 임우재(서양화 전공 박사과정·21년졸)씨의 작품이 흘러나왔다. 디지털 시대의 인간을 탐구하는 소주제를 관통하는 작품이다. 현실에 있을 법한 도시 풍경이 웹 페이지가 스크롤 되듯 상하로 움직여, 시시각각 변하는 도시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위를 걸어가는 사람을 통해 사람과 세계의 연결이 어떻게 재구성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임씨는 “2018년에 (EMAP에) 출품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관객들이 우리대학의 풍경과 함께 전시를 즐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며 “작품과 장소가 어우러지며 만드는 맥락은 다른 전시에서 볼 수 없는 매력”이라고 말했다.
헬렌관 앞을 비롯한 교내 6곳에 설치된 스크린에서는 우리대학 학생들의 작품도 볼 수 있었다. 전시된 영상들은 <실험디지털비디오> 수업에서 만든 영상으로, 영상 콜라주, 촬영, 애니메이션을 비롯한 다양한 기법이 사용됐다. 전시에 참여한 조현영(디자인·20)씨는 “큰 행사에 참여해 부끄럽긴 하지만 멋진 작품들 사이에 낄 수 있어서 뿌듯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박주원 큐레이터는 이번 행사의 뜻깊은 점으로 전시 전 과정에 여성들만 참여한 것을 꼽았다. 박주원 큐레이터는 “전시 기획을 거의 10년 넘게 했는데, 단 한 번도 전 과정에 여성들만 참여한 적은 없었다”며 “아직도 사람들은 어떤 일에는 남성이 더 적합하다고 보는데 그런 일들까지 여성들만으로 해낼 수 있다는 걸 이화가 증명했다”고 말했다. 행사에 안내팀 관계자로 참여한 박지현(서양화·22)씨 역시 “박주원 큐레이터의 말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여성들로만 (전시를) 진행할 기회가 없었는데, 이번 EMAP는 여성들끼리 함께 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