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14일, 새벽3시경 게르 안 석탄이 다 떨어 져 난방이 꺼졌다. 꺼질 듯 말 듯한 약한 불씨를 보고 전날 밤 핫팩 여러 개와 패딩을 잠자리 옆에 준비해 두고 잤다. 불이 꺼져 추위가 조금씩 느껴지니 자연스럽게 눈이 떠져 준비해 둔 핫팩과 패딩을 주섬주섬 껴입었다. 다행히 추위는 면했으나 참으로도 낯선 경험이었다.몽골 여행에서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포장도로를 달리는 것도, 밤새 따뜻한 보일러가 돌아가는 것도, 오밤중에 혼자 갈 수 있는 화장실도, 따뜻한 물이 나오는 샤워실도 모두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한국에 돌아와 집으로
10월 22일 오후 4시, 나는 우이천에서 짝지은 원앙들을 보았다. 물 위에선 한없이 평온할 줄만 알았던 저 원앙들이 한껏 몸을 부풀리며 다른 원앙들을 위협할 때가 있었다. 그건 자기 짝에게 공격이 가해질 것 같을 때. 대체 저 말 못 하는 동물들은 뭘 알길래 사랑을 하고, 계산 없이 본능적으로 짝을 지키려 할까. 이런 면에서 보면 일부 동물들은 인간보다 한 차원 높은 사랑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저 원앙들을 보면서 내가 가진 사랑에 대해 둘러보았고, 어떤 태도로 사랑을 마주해야 할지 정의하는 시간을 가졌다.나는 원래도 사랑이 많
10월27일 오후 4시,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어쩌면 우리의 무한(無限)한 가능성일지도 모르는 하늘을 만났다. 6학기째 학교에 다니고 있는 3학년이지만, “졸업하면 무엇을 할 생각이야?”라는 무수한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있는 나는 이 하늘을 보며 조금의 위안을 받았다. 작곡을 전공하는 음대생으로서, 그리고 고학년으로서 3학년쯤 되었으면 뚜렷한 길이 있을 것 같았지만 사실 아직은 없는 상태. 과연 나의 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나는 임용고시를 보려고.”, “나는 유학을 가고 싶어.”, “나는 대학원에
9월28일 오전6시12분, 졸린 눈을 비비며 명절 귀성길 고속버스에서 내렸다. 줄을 서니 4살 아이가 보인다. 시선을 내리니 보이는 모녀의 커플 운동화. 모녀가 사랑스럽기 때문인지, 오랜만에 가족 얼굴이 보고 싶어서인지 카메라를 들었다. 집에 오니 뉴스에서 ’취업 부담에 고향 못 내려가는 20대’에 대해 말하고 있다. “표도 구하기 힘들고 내려가면 가족 얼굴 보기도 힘들어서….”라고 말하는 축 처진 어깨. 밀린 숙제 해나가듯 ‘처리’하기 바쁜 인생의 관문들이 우리를 힘들게 만들었을까. 10명 중 3명이 혼자 사는 대한민국, 그 많은
7월3일 오후4시, 인생 첫 교육봉사를 위해 복지관 방과후교실로 향했다. 사범대생이지만 3학기째 학교에 다니며 들은 교직 과목이라고는 고작 2개. 인생을 살아오며 교사라는 직업은 생각조차 해 본 적도 없으며 대학에 들어온 지금도 임용고시를 볼 생각은 꿈에도 없는 나에게 교육봉사란 솔직히 말해 많고 많은 졸업 요건 중 하나일 뿐이었다.매주 4시간씩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두렵고 힘들기도 했지만, 예상외로 금방 적응해 나갔다. 아이들의 이름도 제대로 외우지 못해 “친구야”라고 부르던 날들에서 이름뿐만 아니라 아이들
8월27일 오후9시. 친구들과 학교 앞 와인 바에서 적당한 술기운을 빌려 적당히 진지하고 무거운 이야기를 나누는 밤이었다. 타인과 함께하는 데에서 큰 행복감을 얻는 친구가, 자신의 고민이라며 ‘홀로 서지 못하는 자신’을 단단하지 못하다고 여기고 자조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는 사회적으로 보이기에 독립적인 사람이라, 그 친구의 고민이 이해되면서도, 함께 할 때의 아름다움을 아는 친구의 모습이 멋있어 보였기에 적잖은 충격을 받고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혼밥’, ‘혼영’ 등, 1인 행위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사회가 되었다. 소위
10일 오후1시, 대동제 첫날 카메라를 들고 돌아다니던 중 생활관 근처 쓰레기통이 눈에 들어왔다. 통 하나가 축제 중 야외에서 발생하는 쓰레기를 감당하고 있었다. 쓰레기가 산처럼 쌓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양이 넘친 나머지 바닥에 종류를 가리지 않고 뒤얽혀 있었다. 화단에는 자리가 나길 기다리는 쓰레기들이 줄을 지었다. 바깥에서 학생들끼리 가볍게 먹을거리를 즐기다 보니 일회용품 사용이 어쩔 수 없다는 것은 알지만, 화기애애한 부스 뒤편의 광경은 조금 충격으로 다가왔다.이상기후가 정말 피부 표면으로 느껴지는 요즘이다. 17일 세계기상기구
3월2일 오후5시. 인생 첫 ‘통학러‘가 된 나는 개강 후 첫 수업을 마치고 돌아가던 길에 발목을 다쳤다. 깁스만은 피하고 싶었지만 결국 붕대를 칭칭 감은 채 병원에서 나왔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50분. 그중에서 걸어야 하는 시간 15분, 지하철 20분, 버스로 환승해 또 15분. 물론 택시를 타고 가면 편하겠지만 가난한 대학생에게 택시비는 사치다. 지도 앱을 켜고 최소 도보 경로를 한참 찾아 헤맸다.다음날 만반의 대비를 한 채 통학길에 나섰다. 깁스를 한 채 역까지 힘들게 걸어가 탄 지하철에 나를 위한 자리는 없었다. 한 칸에 6
23일 오후2시40분, 얼룩말 ‘세로’가 서울어린이대공원을 탈출했다. 올해로 4살이 된 세로는 인간의 수명으로 환산하면 고작 10대 중반의 사춘기 얼룩말이다. 비록 탈출한 지 3시간만에 다시 동물원으로 끌려가야 했지만, 세로는 무얼 찾아 울타리 밖으로 나갔을까.2005년 코끼리, 2010년 말레이곰, 2018년 퓨마 탈출에 이은 발생한 동물원 탈출 사건이다. 이번 사건은 어떠한 재산상의 피해나 인명피해 없이 세로가 마취총에 맞아 쓰러지는 것으로 종결됐다. 서울시설공단 공식 유튜브 채널에서 탈출 2개월 전 올린 소개 영상에 따르면,
3월9일 오전12시. 본교 정문 근처 오피스텔촌에 위치한 전봇대 하나가 ‘펑’ 소리를 내며 터졌다. 순식간에 전기가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다. 밝았던 집이 잠깐 어두워진 순간,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위협의 감정이 다가왔다. 걱정되는 마음에 본교 온라인 커뮤니티 에브리타임(everytime.kr)의 ‘자취게시판’부터 들어갔다. 전기가 끊기면서 와이파이도 끊겨 데이터로 접속해야 했고, 아니나 다를까 다른 학생들도 무슨 일이냐며 걱정을 토해냈다. 같은 건물 입주민들이 들어갈 수 있는 오픈 채팅방에서도 당황스럽다는 반응이 실시간으로 쏟아져
2월 28일 오후 2시 7분, 낮 일정을 마치고 당 충전이나 할 겸 아이스크림 할인점에 들렀다. 그런데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아이스크림이 아니라 수정된 가격표였다. 그 옆에는 ‘아이스크림 전 제품 인상’이라는 안내판이 있었다. 과자 또한 편의점에서 살 법한 가격대로 판매되고 있었다. 친구에게 사진을 찍어 이 상황을 얘기하니, 아이스크림 가격이 그렇게 오른 지는 꽤 되었다고 했다.요즈음 물가가 끝을 모르고 치솟고 있다. 사소한 간식 소비조차 함부로 하기가 어려워졌다. 파리바게는 2월부터 95개 품목의 가격을 평균 6.6% 인상
지난 13일, 내 생일을 맞아 코트를 사고자 가족들과 백화점 나들이를 나갔다. 하지만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 채 빈손으로 돌아왔다. 생각보다 옷의 가격대가 지나치게 높았다. 오빠는 “여자 옷은 잘 몰랐는데, 질도 별로 안 좋으면서 비싸기만 한 게 많다. 너는 괜찮은 옷 사려면 나보다 돈을 2배는 내야 할 것 같다.”며 혀를 찼다. 남성 의류보다 여성 의류가 질과 가격, 두 가지 면에서 소비자를 만족시키기 힘들다는 사실이 그는 나름 충격적인 것 같았다.우리는 이따금 일상적인 소비에서 성차별을 마주한다. 기장이 비슷한데도 남녀 요금을 다
아무리 Y2K가 돌아와도, 아날로그가 유행해도 우리는 현재에 머물러 있다. 지금으로부터 딱 11년 전, 처음으로 핸드폰을 가졌었다. 이제는 시간 속으로 사라진 추억의 슬림팬더폰. 그 시절 핸드폰이 으레 그렇듯, 문자와 전화, 유치한 미니게임이 전부였지만 2011년의 12살에겐 첨단의 극이었다. 매일 밤 친구와 몰래 숨죽여 키득이는 전화와 문자의 재미에 빠진 덕분에 늘 배터리와 긴장의 줄다리기를 탔다.학교가 끝나고 마지막 한 칸의 수명이 다했을 때, 나를 구한 건 지겹도록 낡아빠진 아날로그의 산물이었다. 사실 자주 있던 일이었기에 익
2022년 9월8일 오후1시 추석 귀성길, 인산인해를 이룬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멍하니 앉아 숨을 고르는데 다급한 어르신의 목소리가 나를 깨웠다. ‘다 매진됐대! 사람들이 미리 예매를 해서 여기서는 표를 살 수 없다네.' 어르신은 발을 동동 구르며 떠나는 버스들을 망연히 바라보셨다. 오분 간격으로 사람들을 가득 실은 버스가 오고 가기를 반복했다. 저 많은 버스에 어르신을 위한 자리 하나가 없다니. ‘터미널에서 표를 살 수는 없을까. 추석같이 사람들이 버스를 많이 이용하는 때에 미리 예매하는 방법은 뭘까.’ 그런 걱정들을 해본 적이
8월21일 오후5시50분. 제주도 여행 마지막 날, 피곤한 몸을 이끌고 202번 버스에 탑승했다. 강한 햇빛에 땀은 쉴 새 없이 흘렀고 가야 하는 정류장은 20개가 넘었다. 그래도 우리는 빠른 택시보다 느린 버스를 택했다.여행 출발 직전까지 과연 여행을 가는 게 맞을까 수도 없이 고민했다. 처리해야 하는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고 급한 연락이 올까 봐 휴대폰 소리를 최대로 켜놓았다. 마치 현실에서 도피하는 것만 같아 일종의 죄의식을 가지고 여정을 시작했다. 거대한 마케팅 시장이 만들어놓은 ‘MZ세대’와 ‘갓생’의 이미지가 무의식을
기숙사로 가기 위해 저녁 기차에 몸을 실었다. 쉬려는데 아이의 옹알이가 들려왔다. 아우- 아아 아우. 기차에 탄 사람들의 서늘한 시선과 침묵 속에서 '조용히 좀 시켜요. 애가 시끄럽네.' 라고 말하는 목소리를 들은 듯 아이 엄마는 급히 호실 밖으로 나갔다. 한 아이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노! 나 이건 아는데, 엄마 키즈가 뭐야? 뭐가 안된다는 거야?' 이제 막 글자를 읽을 수 있게 된 아이가 '노'를 이해하는 기쁨과 새로운 글자를 알 기대에 차 있었다. 그러나 기쁨이 슬픔이 되고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던 아이의 표정이 기차안의 순간
17일 오후1시18분. 부쩍 더워진 날씨에 나무 그늘을 찾다가 교내에서 텃밭을 발견했다. ‘밟지 마시오’라는 지킴이 표지판 옆에, 얼마 전 심은 듯 파릇파릇한 잎이 올라오고 있었다. 새싹을 감싸고 있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검정 비닐이 아닌 신문. ‘혐오·차별 청산하고 포용의 정치 펼쳐라’라는 제목의 새 대통령에게 바라는 바를 시민에게 물어 적은 기사였다. 재배 시 경작지의 흙을 덮는 자재를 멀치(mulch)라고 한다. 멀치는 토양의 침식을 막아주고, 수분을 유지하며, 땅의 온도를 조절하고, 잡초가 자라는 것을 막아주는 등 다양한
2일 오후4시9분. 카메라를 들고 등굣길에 지나친 버스정류장에 다시 갔다. 이대부고 정류장에 있는 ‘바비톡’ 광고 때문이다. ‘대한민국 1등 뷰티 정보앱’ 딱지가 붙어있는 이 광고에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살펴보는 여성의 그림 위로 크게 ‘바비톡 할까?’라는 문구와 혼잣말을 표현하듯 작게 ‘뭐가 그렇게 맛있었냐...’라는 문구가 적혀있다.버스를 타고 지나가는 짧은 순간에도 문구와 그림의 부조화가 눈에 띄었다. 그림 속 여성의 허리는 한 줌에 잡힐 정도로 가늘게 표현돼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내 허리는 한 줌에 잡히지 않는
3월29일 오후10시41분. 3번째로 도착한 편의점에서 1시간도 넘게 기다린 끝에 ‘포켓몬 빵’을 손에 넣었다. 1번째 편의점에선 벌써 매진이라 실패했고, 2번째 편의점은 오래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서 아예 팔지 않는다고 했다. 몇 시간씩 기다리기도 하고 없어서 못 사기도 하는 이 빵이 전국적으로 유행하고 있다. 맛있어서는 아니고 그 안에 ‘띠부띠부씰’이 들어있기 때문이다.유행에 따라 유튜브 등 SNS에서 포켓몬 빵 개봉기도 많이 보인다. 한 편의점에서 팔 수 있는 양을 2개로 제한하고 있는데도 영상 속에는 수많은 포켓몬 빵들이 있
대한민국의 유리천장은 아직도 굳건하다.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Economist)가 매년 발표하는 ‘유리천장지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 국가들의 직장 내 여성 차별 수준을 나타낸 것이다. 성별 간 임금 차이, 경제활동 참여율, 의회 및 관리직 내 여성 비율 등 10가지의 지표를 통해 산출한다. 2021년 유리천장지수에서 한국은 조사 대상 29개국 가운데 29위를 기록했다. 10년 연속 최하위권이다. 순위가 낮을수록 직장 내 여성 차별이 심하다는 뜻이다.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4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더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