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숙사로 가기 위해 저녁 기차에 몸을 실었다. 쉬려는데 아이의 옹알이가 들려왔다. 아우- 아아 아우.  기차에  탄 사람들의 서늘한 시선과 침묵 속에서 '조용히 좀 시켜요. 애가 시끄럽네.' 라고 말하는 목소리를 들은 듯 아이 엄마는 급히 호실 밖으로 나갔다. 한 아이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노! 나 이건 아는데, 엄마 키즈가 뭐야? 뭐가 안된다는 거야?' 이제 막 글자를 읽을 수 있게 된 아이가 '노'를 이해하는 기쁨과 새로운 글자를 알 기대에 차 있었다. 그러나 기쁨이 슬픔이 되고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던 아이의 표정이 기차안의 순간과 맞물려 숨이 막혔다.

대한민국 출산율이 올해 2분기에 0.75명으로 역대 최저를 기록할 것이라 보도한 기사를 떠올렸다. 그리고 0.75명의 아이들을 생각했다. 스스로의 언어를 사용한 것뿐인데 질타의 눈초리를 받는 아이들은 사회가 안전하다고 느낄까. 출산을 위한 갖은 방법을 논하는 어른들에게 아이들이 행복한 사회를 만들 고집은 있나?

 영업장은 교육기관이 아니기에 아이의 발달에 기여할 의무는 없다. 그러나 그곳도 사회의 일부다. 규칙은 없지만 외려 서로를 배려하기 위한 암묵적 약속이 있는 곳을 경험해봐야 알 수 있는 것들도 있다. 아이들을 아이라는 이유로 배척하는 곳이 많아지면 그들은 아이로 존재할 수 있는 세계에서 어른으로 존재해야 하는 세계로 가지 못한다.

방정환 선생은 '싹(어린이)를 위한 나무는 잘 커가고 싹을 짓밟는 나무는 죽어버립니다.' 라고 말했다. 싹과 나무는 함께 살아야한다. 주위를 둘러보면 온통 짓밟힌 싹만 남아있지 않도록 나무가 그늘도 만들어주고 햇빛도 쬐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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