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강 주간이다. 매 학기 개강을 맞이하지만, 유독 이번 학기는 학교에 생기가 가득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아마 코로나로 인해 온라인 강의가 병행되던 시기가끝나고 상당수 교양과목과 인문대 전공과목의 강의실로 사용되는 학관이 문을 연 후 맞이한 첫 번째 3월 개강이라 그런 듯하다. 이제야 비로소 긴 코로나 시기가 끝나고 신입생을 맞이한 것만 같다.코로나 시기 동안 대학은 강의만이 아니라 학생들의 각종 대면활동들을 어떻게 원활히 진행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한 반에 배정되면 1년간 일상을 나누며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는 고등학교 시절까지와는
“교수님 MBTI은 뭐세요?!” 한동안 사적으로 학생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이다. 이제 자기보고서 문항을 통해 개인의 성격을 16가지 유형으로 구분해 주는 MBTI는 일상의 문법으로 자리 잡았다. 심지어 입사지원 시 지원자의 MBTI 유형을 가지고 자기소개서 작성을 요구하고, MBTI가 특정 유형인 경우 지원하지 말라는 채용공고를 해서 사회적인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이쯤 되면 MBTI 광풍, 바야흐로 MBTI 전성시대다.그런데 뿐만이 아니다. MBTI 못지않게 혈액형과 사주(四柱), 타로점, 각종 심리
19세기 영국의 비평가, 수필가로 알려진 토마스 드 퀸시(Thomas De Quincey)가 1804년 옥스퍼드대학의 학생이었던 어느 날, 치통으로 인해 며칠간 두통을 겪게 된다. 그때 친구 권유로 진통제 ‘아편팅크’를 마시게 되면서 아편중독으로의 첫발을 내딛게 된다. 그는 처음에 복용량이 적어 문제가 없었지만, 점점 의존성이 강해지면서 다양한 아편류에 빠져들었고, 이를 회복하기 위한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였다고 소설 ‘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Confessions of an English Opium-Eater)’에서 밝히고
많은 사람들이 초연결 디지털 혁명이 달성되면 마치 초합리적 초효율성이 극대화되어 인간의 새로운 유토피아가 도래할 것처럼 선전한다. 위험천만한 주장들이다. 초연결 디지털 혁명은 현실이어서 피할 방법이 없지만 제대로 알고 사용하지 못하면 인간은 모두 디지털이 만든 초합리적이고 초효율적인 아바타에 종속된 노예의 삶을 살게 될 운명이다.아바타로 살 것인가?인간으로 살 것인가?우리 연구팀(코넬대 Lawler 교수, 서던캘리포니아대 Thye 교수, 본교 윤정구 교수)은 20여 년 전부터 초연결 디지털 혁명 시대에 개인화를 향한 분절이 극대화되
지난 2020년 7월 헌법재판소(헌재)는 여자대학교들에 설치된 로스쿨과 약대가 “헌법 상 평등권을 침해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당시 약대 편입학을 준비하고 있던 한 학생이 여대들에 배정된 보건·의료계열 정원이 “직업 선택의 자유와 평등권을 침해”한다고 헌법소원을 제기한 것에 대해, 헌재가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합헌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여대들에 설치된 로스쿨이나 의대, 약대를 둘러싼 논쟁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2009년에도 세 명의 남성이 이화여대 로스쿨에 대해 남성 역차별을 이유로 헌법소원을 제기함으로써 세간의 이목을
우리의 일상이 음악, 영화, 미술, 웹툰, 방송 등 수많은 콘텐츠에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휴대폰이나 태블릿 PC와 같이 휴대와 이용이 간편한 디지털 기기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콘텐츠를 손쉽게 즐길 수 있다. 메타버스로 대표되는 가상공간을 배경으로 한 콘텐츠,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을 활용한 콘텐츠는 이제 영화 속의 이야기가 아니다. 특히 콘텐츠 산업의 부가가치가 증가하고 특히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콘텐츠 제작이 용이해짐에 따라 1인 크리에이터에 의한 콘텐츠 창작 역시 급
아주 예전 1990년대 초 유학 시절에 다른 한국 유학생들에게서 자주 듣던 질문이 있다. “이 대학교와 도시에서는 장애인들이 많이 눈에 띄는데 한국에 있을 때는 거의 본 적이 없다. 이 도시가 장애인이 유난히 많은 곳이냐”는 것이다. 물론 그건 아니었다. 그 당시 서울을 포함한 대한민국의 어느 곳도 장애인이 지역사회에 나와서 다니는 것이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집에 또는 시설에, 특수학교 안에만 주로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본교 특수교육과 학부 재학 시절인 1985년경에 장애학생과 함께 어딘가로 이동하려고 택시를 잡으
2023년 1학기, 대학 캠퍼스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활기로 가득 차 있다. 강의실에서 학생들이 웃고, 서로의 안부를 묻고, 배움을 위해 눈을 반짝이며 질문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수업하는 즐거움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청년들의 취업과 독립 문제를 다룬 소설을 함께 읽으면서 오늘날 우리가 감내하는 현실을 마주하게 되면,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현실의 고달픔을 누군가에게 표현하지도 못하고 홀로 인내해야 했던 학생들이 자신의 마음을 내보일 때면, 문학 속 현실을 어떻게 재맥락화하고, 학생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남겨야 할지 다시
연일 마약 관련 기사들이 뉴스에 쏟아지고 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혹은 유명 연예인들에게만 일어나는,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마약 문제가 우리 삶에 깊이 파고들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모든 마약류의 사용이 법적으로 일체 금지되고 있으며, 마약의 원료가 되는 식물이나 원료 등을 재배하거나 소지, 수출입, 매매, 매매알선까지도 금지하고 있어 이를 어길 시 현행법으로 처벌 대상이 된다. 이러한 법적 대응에도 불구하고 마약 청정국은 이미 옛말이 되었고, 며칠 전에는 국가에서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아름다운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아름다운 장소에 가면 힘들었던 마음이 치유된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이 지속되어 또다시 그곳을 찾고 싶어질 때 그 모습 그대로 변함없이 나를 반겨주길 기대하게 된다. 아름다운 숲에 가서 생명의 역동성을 느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아마도 그 숲의 소중함을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아름다운 숲이 지속되기를 원하고 나아가 숲의 아름다움을 지켜내기 위해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참여하게 된다. 석회 동굴에서 수만 년에 걸쳐 형성된 석주와 석순을 보고 신비로움을 느낀 경험이 있다면 그 동굴의 시간적, 공간적 가
매해 3월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다. 1908년 3월 미국 뉴욕에서 여성 노동자들은 노동시간 단축, 임금 인상, 노동환경 개선, 여성의 참정권 쟁취를 위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는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여성들의 대규모 시위였다. 당시 미국의 여성 노동자들은 먼지가 가득하고 쉴 곳도 없는 환경에서 하루 12시간 이상 일했지만, 임금은 남성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고 선거권도 갖지 못했다. 1910년 뉴욕의 의류공장에서는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던 여성 노동자들 수백 명이 화재 사고로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고, 당시 미국의 여성
몇 주 전 다른 대학에서 진행한 교양교육 포럼에 참석했다. 교양교과의 방향, 의사소통 교육, 소프트웨어교육 등 포럼의 중요 주제를 듣던 중 공통적으로 등장한 화제가 있었다. 장안의 화제가 된 CHATGPT가 그 주인공이었다. 특정 키워드를 제공하면 AI가 참고자료를 추출, 검토하여 원하는 분량의 글을 쓰기도 하고 음악을 만들기도 했으며 프로그램 코드를 간결히 짜기도 했다. 관련 자료를 소개한 연사는 직접 CHATGPT를 사용한 결과를 보여 주었다. 특정 주제로 글쓰기를 지시하자 순식간에 그럴듯한 글이 나왔다. 허술한 부분이 많았어도
이번 학기부터 학부생을 대상으로 여성학 수업 가운데 를 가르치고 있다. 노동운동에 대한 대학사회의 관심이 1980~90년대와는 상당히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그 어느 때보다 취업을 준비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장기화되고 있어 학생들의 처지는 상당히 힘겨운 상황이다. 취업을 할 수 있는가, 혹은 언제 할 수 있는가, 과연 자신이 원하는 곳에 취업할 수 있는가가 중요한 이슈로 부상한 지도 이미 오래다. 이런 상황에서,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여성노동 이슈에 관심을 갖고 문제의식을 심화할 수 있도록 무엇을 질문하고 무엇을 논의
삶에 급격한 균열이 생길 때 우리는 충격과 당황으로 우왕좌왕한다. 그리고 기존의 체계로 더 이상 방어할 수 없는 수준으로 균열이 점점 더 깊어지고 확산될 때 공포와 불안에 휩싸이게 된다. 이것을 결정적으로 실감한 계기는 고작 3개월 만에 전 세계를 위기로 몰아넣은 코로나 팬데믹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바이러스가 우리 삶에 전방위적으로 미친 영향력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얼마나 강력한가를 가르쳐주었다. 사회적으로 기존 질서의 축이 흔들릴 때, 개인적으로 질적인 도약이 나타나는 발달 전환기에, 혹은 살아가면서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지난 여름 한국과 전 세계에 잔잔한 감동과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이 드라마는 기존의 법정을 소재로 한 영화와 드라마와는 몇 가지 면에서 달랐고 신선했다.우선, 주인공이 변호사인데도 불구하고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사회적 약자에 속했다. 일반적인 법정 영화의 주인공들은 사회적 약자를 돕기 위해 싸우는 ‘영웅’들인데 비하여, 우영우는 로스쿨을 졸업했는데도 취업을 할 수 없었다. 어떤 법무법인에서 힘겹게 계약직 자리를 얻은 이후에도, 회사 현관의 회전문을 출입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할 만큼,
연구년이라 학교와 거리두기 중이던 지난여름, 연세대 대학생들이 청소, 경비노동자의 학내집회를 학습권 침해 사유로 형사소송에 이어 민사소송까지 제기했다는 보도를 접했다. 무려 5개월간의 투쟁 끝에 이들의 시급이 8월 말 약 400원 남짓 올랐다고 한다. 내가 다녔던 80년대의 대학과 너무나 다른 모습에 놀라지 않은 것은 아니나, 전쟁 같은 취업 상황에서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일이라 여겨지기도 한다.학습권과 노동권이 동시에 침해될 때 어떤 권리가 우선되어야 할까? 법원은 청소노동자의 손을 들어주었다. 2006년 한국외대에서 유사한 사
2014년에 작고한 개리 베커(Gary Becker)교수는 과거 경제학이 다루어 오지 않았던 연구 분야를 개척한 것으로 유명하다. 베커 이전까지 경제학의 전통적인 분석 대상은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경제 행위, 특히 시장에서 일어나는 행위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그는 모든 인간이 자신의 편익과 비용을 계산해 이익이 극대화되는 방향으로 행동한다는 최적화 사고를 바탕으로 인간의 사회적 행동에 대한 경제학적 접근을 시도하였다. 사회학이나 심리학, 인구학에서 주로 다루어 왔던 결혼, 이혼, 출산, 범죄, 중독행위 등을 경제학적
현재 우리 사회를 대표하는 특징 중 하나는 ‘혐오’이다. 혐오표현은 사회경제적 위기에 화풀이 대상을 찾기 위한 목적으로 특정 집단을 사회적으로 소외시키는 선동적 형태로 나타난다. 자신의 의사를 정확히 표현해 대항할 수 없는 아동은 가장 손쉬운 혐오 대상이 된다. 아이 출입을 거부하는 노키즈존의 증가, 기차나 비행기에서 아이가 울거나 시끄럽다는 이유로 부모를 폭행해 논란이 된 사건은 아동에 대한 혐오, 아동을 통제하지 못하는 부모에 대한 혐오가 공기처럼 퍼져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대개 혐오는 무지와 무시에서 나온다. 아동 혐오가 확산
코로나19 상황이 많이 진정되고 엔데믹을 운운하는 시점, 한동안 미뤄 두었던 인사동 고서점을 방문하였다. 온 세상이 신종 바이러스와 씨름하는 동안 고서들은 제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었던 듯… 고서가 뿜어내는 꿉꿉하지만 은은한 옛것의 냄새가 반가움, 설레임 등과 섞여 뭔지 모를 미묘한 감정으로 다가왔다. 새로 들어온 고서들을 이리저리 구경하다가 5-60년대 여성백과사전을 발견하고는 착한 가격에 챙겨 나왔다. 고서점을 나와 종로통으로 향한 나는 신촌으로 가는 버스를 타는 대신 길을 건너 동대문 쪽으로 발길을 돌려보기로 했다. 동묘,
소비는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제한된 소득으로 가장 큰 만족을 얻기 위한 경제적 행위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소비는 욕망과 취향, 나아가 문화자본의 획득을 둘러싼 투쟁으로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가로지르며 한 사회의 문화적 가치나 권력구조 등이 반영된 사회문화적 행위이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젠더와 소비 이슈가 첨예하게 얽혀 있는 것도 이를 잘 보여준다.역사적으로 여성은 생산영역에서 배제되어 온 만큼이나 소비영역에서도 왜곡된 시선에 시달려 왔다. 1990년 중반 처음 등장한 ‘된장녀’는 이후 ‘신상녀’, ‘명품녀’, ‘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