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잠하는 세계를 바라보는 방관자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매 새벽, 잠에 들지 못하거나, 잠을 자지 말아야 할 때마다 멸망하고 있는 한 세계의 낭떠러지에 서 있는 방관자가 된다. 나를 지탱하고 있는 이 가느다란 한 폭도 언젠가는 끊어질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부서지고 있는 것들을 다만 목도하고 무력해 한다. 그 연쇄를 끊어낼 수 있었던 적이 없다.여느 밤과 새벽이었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늘 그렇듯, 가로선들과 어지러운 스캐치들을 바라보며 이것들을 끼워맞춰보려 한다. 나의 의지에 따라 나타나는 방향들과 음형들. 나타난 것들과
삶에 급격한 균열이 생길 때 우리는 충격과 당황으로 우왕좌왕한다. 그리고 기존의 체계로 더 이상 방어할 수 없는 수준으로 균열이 점점 더 깊어지고 확산될 때 공포와 불안에 휩싸이게 된다. 이것을 결정적으로 실감한 계기는 고작 3개월 만에 전 세계를 위기로 몰아넣은 코로나 팬데믹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바이러스가 우리 삶에 전방위적으로 미친 영향력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얼마나 강력한가를 가르쳐주었다. 사회적으로 기존 질서의 축이 흔들릴 때, 개인적으로 질적인 도약이 나타나는 발달 전환기에, 혹은 살아가면서
영국 마트에서는 어디서든 비건 음식을 찾아볼 수 있다. ‘새우 없는 새우튀김’ 같은 대체육부터 팔라펠을 비롯한 식물성 음식까지. 올해 초, 프랑스에서 교환학생을 했던 한 친구는 내게 유럽이 채식 지향의 삶을 위해서 너무나도 좋은 공간이라 말했다. 영국 또한 마찬가지다. 이 나라는 학교 식당에서마저 채식 메뉴를 제공할 정도로 다양한 삶의 방식에 민감하다. 하지만 이들은 분리수거를 하지 않는다.잠깐, 분리수거를 하지 않는다고? 재활용을 아예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가장 충격적인 것을 먼저 언급하자면 이들은 음식물 쓰레기를 따로
드라마/나기의 휴식(2019)사회는 자꾸 우리에게 주어진 길을 쉬지 말고 달리라고 다그친다. 게임 속에서 퀘스트를 클리어하듯 사회에서 요구하는 각 단계를 착실히 완료해왔지만, 성인이 된 우리는 여전히 ‘나 자신’을 잘 모른다. 몸과 정신을 혹사해 얻어낸 결과물을 보면 보상처럼 만족감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약간의 허탈함과 불안함 역시 찾아온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걸까? 나는 어떤 삶을 원하는 걸까?이 물음은 나기라는 여성에게도 주어진다. 나기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에 의해 통제된
한국 내 퀴어 행사로는 가장 규모가 크다는 서울퀴어문화축제(퀴어축제). 365일 동안 단 하루, 15만 명의 사람들은 대한민국 곳곳에서 갑자기 나타나 반나절의 자유와 혐오 세력의 맹공격을 맛본다. 그리고 또다시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자신을 숨기고 어딘가로 사라진다. “이 많은 사람이 다 어디로 가는거야?”통계적으로 인류의 10%는 성소수자라는 글을 읽은 적 있었다. 그렇다면 내 친구 중 몇 명이 자신을 퀴어로 정체화할 수 있는 것일까. 지하철에서 마주친 수많은 사람 중, 자신의 성적 지향성이 사회 규범과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사
삼성증권 리서치센터 수석연구위원으로 글로벌 소비재 섹터를 담당하고 있다. 2006년 입사 후 리테일 영업과 외화 채권형 상품 운용을 거쳐, 2016년부터 해외주식 컨설팅 전문가로 활동 중이다. 부자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그들은 자산관리를 기본 소양으로 여기고, 항상 돈의 흐름을 주시합니다. 참 이상하죠? 자산가일수록 돈을 쓰러 다니고 가난할수록 치열하게 부를 갈구할 것 같은데, 현실은 그 반대입니다.지난 16년 동안 투자 컨설턴트로 활동하면서 자산의 크기와 금융지식이 비례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산가들의 관심사는 부동산,
본교 물리학과에서 학부 및 석사과정를 마치고 미국 노스웨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8년 본교에 부임하여 중성자별과 블랙홀의 성질 연구, 중력파 자료 분석 연구를 하고 있다. 과학과 대중 소통, 시각화를 통한 과학 데이터 활용에도 관심이 있다. 2008~2010년 마리퀴리 펠로우십, 2016년 브레이크스루상(라이고과학협력단 공동수상), 2017년 교육부 학술연구지원사업 우수성과 부총리 겸 교육부장관 표창 등을 수상했다.이대 교정에서 가장 추억어린 장소를 꼽아보자면 오후 햇살이 어린 중앙도서관 서가이다. 입학하고 한동안은 잊
아일랜드 코크 UCC 약대에 1학년 재학 중인 신입생 만 28살. 지금의 나를 정의하는 단어다. 한국인의 상식에서는 대학 졸업 후 직장을 다녀야 할 나이건만, 왜 다시 대학으로 향했는지 그리고 또 왜 꼭 아일랜드였는지 궁금하지 않은가?고등학생 시절 나의 1순위 목표는 약대 진학이었다. 당시 약대는 신입생을 선발하지 않고 대학 2학년 이상 과정 수요(예정)자가 약학대학입문자격시험 (PEET)을 응시한 후 오직 편입으로만 입학 가능했다. 분자생명과학부 13학번으로 입학해 2학년 1학기까지 학교를 다니다가, PEET 시험에서 고득점을 하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지난 여름 한국과 전 세계에 잔잔한 감동과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이 드라마는 기존의 법정을 소재로 한 영화와 드라마와는 몇 가지 면에서 달랐고 신선했다.우선, 주인공이 변호사인데도 불구하고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사회적 약자에 속했다. 일반적인 법정 영화의 주인공들은 사회적 약자를 돕기 위해 싸우는 ‘영웅’들인데 비하여, 우영우는 로스쿨을 졸업했는데도 취업을 할 수 없었다. 어떤 법무법인에서 힘겹게 계약직 자리를 얻은 이후에도, 회사 현관의 회전문을 출입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할 만큼,
편집자주|영국 센트럴랭커셔대 교환학생으로 파견된 이수영 선임기자가 2022-2학기 '이수영의 영국 갈 결심' 칼럼을 제작기간 중 매주 연재합니다. 영국 대학에서의 흥미진진한 일상을 전합니다. “영어 이름은 사대주의의 산물이야.” 한국에서만 자라온 나는 다들 왜 그렇게 기를 쓰고 현지인을 배려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인슈타인을 발음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이름까지 만들어가면서까지 ‘배려’할 필요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영국에 와서 ‘외국인’들에게 둘러싸인 지 두 달, 나는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이름’을 통해
영화/월드워Z(2013)‘전염병 주식회사’라는 게임이 있다. 내가 전염병이 돼 전 세계 인구를 모두 감염시키고 치료제 개발을 막는다. 결국 세상에 건강한 사람이 한 명도 남지 않게 되고, 인류를 멸망으로 이끌면 승리하는 전략 게임이다. 졸업과 출근 사이, 잠깐의 백수 생활을 만끽하고 있는 융합보건학과 학생이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전공지식을 이용하는 악당이 된 것만 같은 기분도 든다. 한참 이런저런 병원균으로 이 세상을 멸망시킬 궁리를 하다 보면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브래드 피트의 나 홀로 좀비 바이러스 역학조사 모험을 담은
편집자주|영국 센트럴랭커셔대 교환학생으로 파견된 이수영 선임기자가 2022-2학기 '이수영의 영국 갈 결심' 칼럼을 제작기간 중 매주 연재합니다. 영국 대학에서의 흥미진진한 일상을 전합니다. 영어 학원에서나 쓸법한 둥근 테이블과 나이대를 가늠할 수 없는 10명의 학생. 교실이라 불러도 되는지 의문스러운 이 공간에서 교수는 천장에 사진을 붙이며 당부했다. “비싼 등록금을 내는데, 제발 학교를 이용하세요! 스튜디오는 여러분을 위한 공간입니다.” 한국 대학에 비해 작고 시끄러운 분위기는 오히려 학원에 가까워 보인다. 영국 대학이 내게 남
졸업 후 3년째 커머스 회사에서 패션, 뷰티, 매트리스, 안마기 등 다양한 상품을 마케팅하고 있다. 소신 있게 지내온 삶에 큰 파도가 일렁이는 요즘을 공유하고 싶다.초등학생 때부터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갈수록 엄마는 나에게 나이의 무게를 알려주었다. “이제 고학년이니까 스스로 해야 해.” “중학생이니까 공부를 열심히 해야지.” 성인이 되고 나선 내 인생의 운전대를 쥐었다. 27세인 나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30세, 40세, 그리고 노년의 삶이 너무나도 궁금하다. 그땐 무엇을 하고 있을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설렘과 두려
이야기를 듣고, 쓰고, 찍는 다큐멘터리스트. 좋은 질문을 던져, 세상에 흩어져 있는 이야기를 엮어내고 전달하는 일이 좋아 다큐멘터리 PD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미디어 환경의 변화를 온몸으로 겪으며 콘텐츠 기획자로, 때로는 브랜드 콘텐츠 전략가로 하는 일이 확장됐다. 다큐에세이 ‘우리는 아직 무엇이든 될 수 있다’를 썼다. 본교 영어교육학과를 2012년에 졸업했다. 얼마 전 긴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비포 선라이즈’를 봤다. 1996년에 개봉한, 100분 내내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가 비엔나를 배경으로 단 한 순간
연구년이라 학교와 거리두기 중이던 지난여름, 연세대 대학생들이 청소, 경비노동자의 학내집회를 학습권 침해 사유로 형사소송에 이어 민사소송까지 제기했다는 보도를 접했다. 무려 5개월간의 투쟁 끝에 이들의 시급이 8월 말 약 400원 남짓 올랐다고 한다. 내가 다녔던 80년대의 대학과 너무나 다른 모습에 놀라지 않은 것은 아니나, 전쟁 같은 취업 상황에서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일이라 여겨지기도 한다.학습권과 노동권이 동시에 침해될 때 어떤 권리가 우선되어야 할까? 법원은 청소노동자의 손을 들어주었다. 2006년 한국외대에서 유사한 사
드라마/구경이(2021)‘모든 생명이 살아갈 가치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이를 긍정할 사람도 있을 것이고, 부정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모호하게 모르겠다고 대답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최근 사회면의 끔찍한 뉴스들을 보고 난 후 저 질문을 받았다면 어떻게 될까? 대다수가 부정적인 대답을 하지 않을까. 드라마 는 이 지점에서 시작되는 아주 철학적인 이야기다.여기서 범죄자들에게 죽음을 선물로 내어주는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연쇄 살인마 K이다. 연쇄 살인마임을 숨기며 살아가는 K의 본명은 송이경으로,
편집자주|영국 센트럴랭커셔대 교환학생으로 파견된 이수영 선임기자가 2022-2학기 '이수영의 영국 갈 결심' 칼럼을 제작기간 중 매주 연재합니다. 영국 대학에서의 흥미진진한 일상을 전합니다. 영국은 겨울이 되면 해가 아주 짧아진다. 한국보다 위도가 높아 계절마다 낮의 길이도 더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한겨울에는 오후 4시에도 하늘이 어둑해진다는 말마따나 9월의 영국은 밤이 길어지고 날씨가 추워지고 있다. 하지만 온몸으로 느껴지는 짧은 해보다도 더 짧게 것은 바로 가게의 영업시간이다.오후 6시 57분. 센트럴 랭커셔 대학교(Univ
올해 9월14일, 신당역에서 순찰을 돌던 20대 여성 역무원이 30대 남성에 의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가해자 남성은 피해자의 서울교통공사 입사 동기로 지난해 10월 피해자를 불법 촬영하여 고소당했으며 직위해체된 이후 원한을 품고 보복성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우리는 해당 사건을 단순한 보복성 범죄의 영역으로 보아 마땅한가? 신당역 사건은 단순한 보복성 범죄, 개인사에 의한 비극으로 볼 수 없으며 구조적 성폭력에 대한 안일한 대처의 결과물이다. 아래에서는 한국 사회의 여성혐오 범죄에 대한 미시적 시각에 대해 의문
영화/존 말코비치 되기(1999)나 자신이 미덥지 않아 다른 누군가가 되길 바란 적이 있는가? 선망하다 못해 그 사람 자체가 되고자 노력한 적이 있는가?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1999)는 이 모든 욕망에 대한 답장이다. 세상에는 자기 자신을 삭제하고 타인의 개성과 자아를 베끼려는 미성숙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이들을 우스갯소리로 ‘손민수’라 부른다. 우리 주변에는 심심치 않게 ‘손민수’들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친구가 자신의 소지품부터 옷, 머리 스타일, 심지어 말투까지 따라 하다 결국 애인까지 뺏었다는 사연, 유
2016년 사범대학 교육공학과에 입학, 2022년 졸업했다. 같은 해 스포츠서울 공채로 입사, 한국체육기자연맹 소속으로 프로야구, 프로농구 및 다양한 스포츠 현장을 취재하고 있다. 올여름 초입, 배우 박은빈을 만났다. 잠시 영화 담당을 맡았을 때 나간 영화 ‘마녀2’ 인터뷰 자리에서였다. 벌써 3달이 넘게 지났지만, 여전히 마음에 남는 말이 있다.“어렸을 때부터 너무나 당연하게 분신처럼 나와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 게 숙제였다. 작품 속 인생은 그 작품에서 기승전결로 완결을 맺지만, 실제 나는 계속 나아가고 있는 존재로서 이 삶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