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급격한 균열이 생길 때 우리는 충격과 당황으로 우왕좌왕한다. 그리고 기존의 체계로 더 이상 방어할 수 없는 수준으로 균열이 점점 더 깊어지고 확산될 때 공포와 불안에 휩싸이게 된다. 이것을 결정적으로 실감한 계기는 고작 3개월 만에 전 세계를 위기로 몰아넣은 코로나 팬데믹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바이러스가 우리 삶에 전방위적으로 미친 영향력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얼마나 강력한가를 가르쳐주었다. 사회적으로 기존 질서의 축이 흔들릴 때, 개인적으로 질적인 도약이 나타나는 발달 전환기에, 혹은 살아가면서 굳게 믿고 있어 의식조차 하고 있지 않던 당연한 신념이 깨어지는 사건을 경험하게 될 때 삶에는 균열이 생긴다.

이런 경험을 하게 될 때 사람들의 최초 반응은 충격과 당황이다. 예측이 불가능하고, 통제가 불가능한 경험을 할 때 우리는 불안, 두려움, 수치심, 분노 등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삶이 순항할 때는 그럭저럭 질서있게 조화를 이루고 사이좋게 어우러졌던 다양한 페르소나들이 삶의 균열이 생기는 순간에 매우 낯선 그(녀)로 튀어나와 나를 당혹시킨다. 진정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한낱 코스프레에 불과했다는 아찔한 깨달음이 나를 위협하기도 한다.

이때 대부분의 사람은 외적인 사건과 환경을 변화시킴으로서 다시 통제감을 회복하려는 노력을 일차적으로 하게 된다. 외적인 문제를 얼른 봉합하려고 온 힘을 기울이는 것은 항상성이 깨어진 상태가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어야 할 것은 ‘무엇을 해야 하지?’ 혹은 ‘어떻게 해야지’와 같은 doing에 관한 질문이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being에 관한 근원적 질문이다.

균열이 생긴 일상의 질서, 그로 인해 파생된 감정적 혼란도 처리하기 힘든데 “나는 누구인가?” 와 같은 근원적인 질문까지 자신에게 답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너무 과중한 요구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 대부분은 급한 불부터 끄자는 심정으로 부딪힌 문제 해결이나 불안과 우울의 증상 처치를 위한 각종 대처법을 절실히 찾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나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현실적인 문제나 겉으로 드러난 심리적 증상만을 처리하려고 하면 당장 문제는 겨우 봉합된 듯 보일지 모르지만 이후 더 큰 인생 파도가 닥쳐왔을 때 “언제 난파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삶의 언저리에서 늘 어른어른 거린다.

독일의 문호 괴테는 “인간은 모두 무언가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누구도 무언가가 되려고 노력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진정한 자기가 되고 싶어 하지만 진정한 자기가 되기 위한 노력은 잘 하지 않는다. 이 세상을 살면서 무언가(somebody)가 되지 못하고 살아가는 거야 큰 문제가 될 수 있겠나마는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유체이탈의 삶이란 정말 큰 문제가 아니겠는가?

자기다움을 발견해 나가는 과정에 어울리는 비유는 퍼즐 맞추기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본캐만을 고집하는 고지식함에서 벗어나 다양한 부캐들을 융통성있게 개발하라고 한다. “나는 누구인가?”의 질문은 하나의 본캐를 정답처럼 찾아내는 숨은 그림 찾기가 아니라 다양한 위기 속에서 만나게 되는 다양한 부캐들이 자기 자리를 찾아가며 완성되어 나가는 퍼즐 맞추기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각각의 부캐들이 한 조각의 퍼즐이 되어 통합된 하나의 전체 그림을 이루어 가는 퍼즐 맞추기 과정은 개방적이고, 역동적인 탐색의 과정이다. 퍼즐 조각이 하나씩 맞추어지면서 윤곽이 일단 드러나면 고난도의 퍼즐조각도 제 자리를 찾아주기 쉽다. 자기 자신 퍼즐 맞추기도 마찬가지다. 조각조각 분절되었던 내 모습이 자기 자리를 찾기 시작하면서 나라는 사람의 윤곽이 점점 드러나고 통합되지 못했던 내 모습들도 함께 어우러지게 된다. 진정한 나의 퍼즐 맞추기는 구체적인 자기 경험의 조각들인 나의 생각, 감정, 욕구들을 생생하게 마주하면서 완성해 나가는 과정이다.

그런데 나다움의 퍼즐 맞추는 첫 단계는 자기가 갖고 싶지 않아 버리고 싶은 퍼즐 조각인 자기 모습을 집어 들고, 마주할 용기를 갖는 것이다. 용기란 영어로 courage로 라틴어 어원인 “core” 심장에서 나온 말이다. 심장은 신체적으로는 피돌기의 핵심부를 지칭하며, 심리적으로는 성격의 핵심으로 특별히 직관과 감정을 지칭한다. 수치심 연구의 대가인 브레네 브라운(2010)에 따르면, 용기의 원래 의미는 “자신의 심장에 있는 것, 자기 마음을 말하는 것”이었다. 즉 진정한 용기는 영웅적인 대담함(bravery)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드러내고 마주할 수 있는 것이다. “미움 받을 용기”를 제안한 아들러도 용기를 잃은 상태, 즉 ‘낙담된(discouraged)’ 상태에서 각종 문제가 발생한다고 말한다.

차마 마주할 수 없어 마음의 지하실에 깊이 가두고 나오지 못하게 했던 자기 모습은 여러 모습을 하고 있다. 이들 앞에는 모두 “접근금지”의 팻말이 굳게 세워져 있어 실제 어떤 모습으로 웅크리고 있는지 짐작도 잘 되지 않는다. 심리학 개념으로 회피, 억압, 분리, 해리 등이 이러한 접근금지를 설명한다.

그러나 기억하자! 이제까지 자동반사적으로 회피하거나, 억압했던 나를 일단 마주할 용기를 내지 않고는 근사한 나로 만들어가려는 모든 노력은 쉽게 찢어지는 포장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접근금지 팻말로 단절되어 있는 나를 만나지 않고는 나 같지 않은 느낌, 광대의 삶을 사는 것 같은 공허한 슬픔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크고 작은 개인적, 사회적 트라우마로 충격과 두려움에 서 있는 우리들이 진정한 자기다움의 소중한 퍼즐조각을 집어들게 되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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